미국 드라마 〈하우스〉의 주인공 그레고리 하우스는 이따금 손에 쏙 들어오는 고무공을 벽에 던지면서 논다. 원인 모를 환자의 병을 추리하기 위한 골똘함의 과정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심심해 죽을 것 같은 장난꾸러기의 근질거림이기도 하다. 어쨌든 대형 병원의 진단의학과장이 벽에 공이나 튕기고 있다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다. 시청자들 또한 공 튀기기가 갖는 의미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하우스처럼 공 튀기기는 아무 생각이 없다거나, 또는 다른 모든 생각을 잊은 것처럼 몰두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적어도 공을 튀기는 순간 우리의 눈·손·귀·뇌는 공 튀기기 자체에 몰입한다. 〈오버워치〉 한조의 말을 빌리자면, ‘공이 내가 되는’ 순간이다.
반복적이면서도 리듬감을 잃지 않는 공 튀기기는 아날로그 시대의 〈핀볼〉을 거쳐 1972년 11월29일 역사적인 디지털화를 맞는다. 전자오락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불리는 〈퐁〉의 등장이다. 다이얼로 조작하는 스틱을 이용해 흑백 화면의 하얀 공 하나를 튕겨내 상대편 골에 넣는 단순한 게임이다. 이 게임은 공 튀기기 묘미는 물론 축구, 하키와 같은 대결 요소를 절묘하게 아우르며 동시대 최고의 히트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퐁〉의 공 튀기기는 혼자 하는 공 튀기기와는 사뭇 달랐다. 현실에서 디지털로 옮겨진 공은 여전히 입사각과 반사각에 맞춰 정확히 튕겨 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상대편의 골에 공을 넣어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최초의 상업용 게임은 1인용이 아니라 두 사람이 경쟁을 했고, 공 튀기기의 고요하고 무상한 맛은 스코어링 경쟁에 묻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디지털 공간 안에서 이리저리 튕겨 다니는 공의 오롯한 움직임을 사랑했던 모양이다. 공 튀기기 게임의 싱글 버전인 〈브레이크아웃〉과 〈알카노이드〉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 최초의 상업 게임으로서 〈퐁〉이 지녔던 두 측면, 무념무상한 공 튀기기와 2인 경쟁 게임이라는 의미는 각각 분화하면서 이후 디지털 게임 장르들의 초석이 된다. 그중 무념무상의 공 튀기기 측면에서 적자임을 자처하는 게임은 〈퐁〉의 제작사인 아타리가 1976년 후속으로 출시한 싱글플레이 게임 〈브레이크아웃〉이다.
우리에겐 ‘벽돌 깨기’ 장르로 익숙한 〈브레이크아웃〉은 〈퐁〉의 공 튀기기 로직을 싱글플레이로 변형해 화면 상단의 벽돌에 공을 쏘아 튕기며 부수는 게임이었다. 공 튀기기의 묘미를 혼자서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튕기는 공이 이제는 벽돌 같은 무언가를 부술 수 있다는 물리적인 재미가 추가되었다. 〈브레이크아웃〉의 등장과 흥행은 〈퐁〉의 공 튀기기 요소에 대한 적절한 계승이었다.
공의 빠르고 느린 움직임에 몰입하면서
사실상 최초의 디지털 게임 장르였던 〈퐁〉의 공 튀기기 요소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갖는 무상함 덕택에 지금껏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왔다. 1980년대 오락실에 등장해 벽돌 깨기 장르의 완성을 이끌어낸 〈알카노이드〉, 1990년대 PC 기반으로 대유행했던 〈DX볼〉에 이어 이제는 모바일에서도 수없이 많은 벽돌 깨기 아류 장르의 게임들을 접한다. 공의 개수가 무한정 늘어나는 방식도 있고, 벽돌이 움직이면서 슈팅 게임처럼 바뀐 경우도 있다. 다채로운 아류작의 등장은 정직하게 튀어가는 공의 움직임만으로도 사람들을 홀릴 수 있다는, 공 튀기기의 매력을 알려주는 현상일 것이다.
최초의 상업 게임 〈퐁〉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이 대결 구도에서 찾지만, 나는 그 대결의 기반에 깔려 있는 공 튀기기의 느낌이 더 사랑스럽다. 벽에다 공을 던지면서 생각에 잠기던 그레고리 하우스처럼, 나는 〈퐁〉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알카노이드〉를 켜고 공을 튕기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플레이어의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하는 공의 빠르고 느린 움직임에 몰입하면서 마냥 공이나 튕기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감 따위 모르겠고, 그냥 정말 계속 공이나 튕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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