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 눈이 내린다. 의자 위에는 초콜릿이 놓여 있다. 싸늘한 기운을 이기기 어려운 계절, 밖으로 나가기보다 방 안에서 한숨 돌리고 싶은 마음에 파고든 광고. 1929년 12월19일 〈매일신보〉에 실린 ‘모리나가 밀크 초콜릿’ 광고가 이랬다. 첫 광고 문구가 말한다. “계절의 보건은 열량의 보급으로.” 초콜릿 한 조각이 찬바람 이기는 데 더할 나위 없단다. “혈행을 좋게 하고 원기를 왕성하게 하는 풍부한 열량의 원천!” 깨알 같은 설명에 따르면 광고 속 5전짜리 초콜릿의 열량은 2160Cal란다.
오늘날이라면 식품 광고가 열량을 강조할 리 없다. 하지만 당시 식품 광고는 열량과 영양소(營養素)를 뒤섞어 썼다. 뭐든 많이 담겨 있으면 덮어놓고 나은 식품으로 여겼다. 아지노모토(MSG)마저 스스로를 ‘자양품’으로 광고하던 시절이었다. 가장 이른 시기 양산 초콜릿 광고로 확인되는 〈동아일보〉 1925년 4월5일자 모리나가 밀크 초콜릿에 붙은 슬로건은 더 공격적이다. “적극적으로 열량을 보충한다!”
초콜릿은 19세기 말 커피·홍차와 함께 서양 음료를 대표하는 마실 거리로 조선에 들어왔다. 커피·홍차·초콜릿(코코아)은 ‘서양 다류 삼형제’였다. 나중에 고형 과자와 구분하면서 코코아·코코차는 음료, 초콜릿은 과자로 굳어졌지만, 처음엔 초콜릿을 음료로 인식했고 대중매체는 이를 별로 구분하지 않았다.
당시 초콜릿은 ‘교양’이었다. 〈중외일보〉 1926년 12월22일자는 거의 5단을 할애한 기사에서 이렇게 외쳤다. “다정한 맘으로 보내는 선물”은 “깊이 생각하고서 보내십시오!” 크리스마스 바로 앞, 연말 분위기를 파고든 이 기사는 통조림·와인·브랜디·페퍼민트 등에 대해서는 구입 요령을 설명하고 그쳤지만, 서양 다류 삼형제는 “겨울밤에 더욱 좋은 맛좋은 차”라고 추어올렸다. 아울러 “이 차를 만드는 법을 아는 부인이 몇 분이나 되는지는 의문이올시다”라면서 ‘신여성’을 자극했다. 이어 “차를 만들면 으레 더운 물에 넣고 끓여서 설탕만 넣으면 되는 줄 알지만 차 끓이는 법은 극히 간단하고도 어렵습니다” 하며 젠체하는 독자를 굽어보았다.
초콜릿 취향은 남녀를 가라지 않았다. 걸출한 정치인 여운형도 초콜릿을 즐겼다. 1920년대부터 영화에 출연해 1982년 이장호 감독의 〈낮은 대로 임하소서〉를 마지막으로 영화 인생을 마무리한 1세대 여성 배우 복혜숙은 대중잡지 〈삼천리〉 1935년 11월호 ‘현대 장안호걸 찾는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그 어른이, 우리 비너스 끽다점(喫茶店·다방)에도 가끔 오셔서 초콜릿을 잡숫지, 어린애들처럼….”
“그 어른이 초콜릿을 잡숫지, 어린애들처럼”
이태준의 〈문장강화〉(1940년)에는 이런 문단도 있다. “만일 춘향이라도 그가 현대의 여성이라면 그도 머리를 퍼머넨트로 지질 것이요 코티를 바르고 파라솔을 받고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먹을 것이다.” 이와 나란히, 초콜릿 좋아하는 여성을 ‘된장녀’ 취급하는 담론도 동시대에 존재했다. 초콜릿 애호 현상이 ‘현대 여성의 악취미’라는 투의 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유럽에서도 일부 상류 계급의 기호품이었던 초콜릿이 확산된 때는 조선이나 다른 나라나 겹친다. 조선 사람들은 이미 1886년 영국의 사치세와 관세를 연구하면서 코코아·커피를 문서에 올렸다. 당시 코코아는 한글로 ‘고고아’, 커피는 한자로 ‘가배(珈琲)’로 쓰면서 조선어 안에서 소화하려 했다. 한국전쟁 시기 “기브미쪼꼬렛” 하나 붙들고 초콜릿을 둘러싼 음식문화사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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