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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라(사진)가 ‘먹고살기 위해’ 다시 한번 진땀을 뺐다. 〈명랑 히어로―두 번 살다〉의 두 번째 주인공은 김구라였다. 지난주 이경규가 그랬듯이 김구라 또한 죽음을 가장하고 조문객을 맞았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부활 의식이 치러지기 직전 김구라의 유언장이 낭독됐다. “20대의 나는 부족한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해왔고, 30대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여러 사람에 대한 독설로 분출해 많은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예능인 김구라의 재능과 파괴력만은 과연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김구라식 화법은 속을 후련하게도, 아찔하게도 만들면서 브라운관 너머 오락과 배설이라는 두 가지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그러나 과오가 너무 지독하다. 황봉알, 노숙자와의 인터넷 방송 도중 숱한 연예인이 세 치 혀에 참혹하게 도륙당했다. 이유라도 합당했다면 모를까, 외모나 성적 기호가 주로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하리수와 박경림을 거론하며 입에 담았던, 도무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끔찍한 언어는 아무리 근사하게 포장하고 화장해도 그저 한 무더기의 똥에 지나지 않았다. 엄청난 폭력이었다.

그랬던 김구라가 요즘은 거의 매일 사과를 하고 다닌다. 불편한 건 그 사과에 “먹고살기 위해 그랬다”라는 설명이 구차하게 따라붙어 연민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민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김구라는 지금,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고 결국 성공해 먹고살기 편해지면 무엇이든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례를 자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김구라의 사과가 늘 카메라 앞에서만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한때 김구라의 욕을 팔아치웠던 텔레비전이 이제는 김구라의 사과를 똑같은 자리에서 팔아치운다. 먹고살기 위해 누군가를 잘근잘근 씹어 먹었던 김구라는, 이제 또 먹고살기 위해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한다. 사고도 사과도 체온도 진심도, 그 모든 게 돈 몇 푼과 등가로 교환되는 실용적 현장이다. 놀랍지 않은가?

기자명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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