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은 지역에서 벽화 작업을 준비한다.
첫인상?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9월17일 오후 2시. 예술가들이 모여 도심 창작촌을 이루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3가. 온통 비슷비슷한 철재상가 골목이었다. 철재를 자르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문래 창작촌 연구〉라는 자료집을 펴낸 ‘예술과 도시사회 연구소’의 김윤환 연구원(43)을 만나기로 했던 랩39를 찾는 데도 한참 걸렸다. 순간 ‘내가 옳게 찾아왔나’ 싶었다. 연이은 철공소 풍경에 예술은 ‘예쁘고 뽀얀 어떤 것’이라는 선입견이 시야를 가렸다.

김윤환씨의 설명에 따르면, 문래동 3가는 전통적으로 소규모 기계금속 관련 업종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산업구조의 변화로 쇠퇴기를 맞아 공장과 철강 유통회사들이 시흥 등 수도권 다른 지역으로 떠나가기 시작했다. 5∼6년 전부터 예술가들이 빈 곳을 창작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눈에 띄게 예술가들이 늘어 지금은 53개 작업실에 예술가 150여 명이 활동한다.
장르도 다양하다. 회화, 조각, 디자인, 일러스트, 사진, 댄스, 마임, 거리 연극, 전통악기, 굿, 비평 등. 왜 문래동에 예술가들이 모여 ‘이종 예술장르 군락지’가 되어가고 있는가? 우선 임대료가 싸다. 3.3㎡당 월 임대료가 1만원 수준이라고 한다. 대학로 일대, 홍익대 인근이 문화 중심지로 유명해지면서 상권이 확대되고 임대료가 상승해 정작 주체(예술가)들이 그곳에서 버티기 힘든 역설적 상황이 벌어져 이주해왔다.

문래예술공단에 입주한 젊은 예술가들은 지난 여름에는 거리에서 축제를 진행하기도 했다.
예술가들은 ‘문래예술공단’이라는 자발적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반상회를 열어 서로 교류한다. 어떻게 지역 예술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함께 고민했다. 지난해 6월과 올해 6월, 문래동에 입주한 거리극 단체 ‘경계없는예술센터’는 두 차례 ‘경계없는예술프로젝트@문래동’ ‘경계없는예술프로젝트@문래동-유랑극단의 시간여행’ 행사를 열었다. 경계없는예술센터의 대표 이화원 교수(상명대·공연학부)는 “철공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다. 올해는 ‘이수일과 심순애’를 소재로 삼았더니 호응이 좋았다”라고 말했다.

9월17일 저녁 7시20분. 이 동네에 작업실 둥지를 튼 예술가 10여 명이 사진작가 박지원씨(43)의 작업실로 찾아들었다. ‘반상회’가 열렸다. 전기세 얘기부터 예술 작업에 대한 얘기까지, 화기애애하다. 일러스트레이터 이소주씨(34)가 설치 작업을 하려는데 용접이 고민이라고 말했다. 노네임노샵의 김건태씨(34)가 용접기가 있다고 했다. 김윤환씨가 제안했다. “작업 때문에 용접이 필요하면 내일 오후 5시쯤 용접을 함께 배울까요?” 다들 용접을 함께 배우기로 결정!

ⓒ시사IN 한향란문래예술공단에 입주한 젊은 예술가들은 한 달에 한 번 반상회를 연다.
다음 날, 오후 4시. 문래예술공단을 다시 찾았다. 이날은 ‘콘셉트 드로잉’ 과목을 듣는 경원대 미대 학생 60여 명이 야외 수업을 하고 있었다. 15개 조로 나뉘어 건물 옥상 등 장소를 섭외해 부조·벽화·설치 작품을 만든다. 김용익 교수(61)는 “학생들은 ‘예술은 예쁜 것, 예술을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알았는데, 이렇게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장인의 에너지와 예술의 에너지가 만나는 곳”

9월18일 오후 5시20분. 어제 반상회에 참여 했던 예술가들이 모였다. 용접을 배우려는 경원대 미대 여학생들도 참여했다. 수업료는 막걸리 몇 통이다. 새한철강의 함진응 사장(49)이 용접을 가르쳤다. 설치 미술가 왕희정 작가(39)는 이날 처음 용접봉을 잡았다. 그녀는 “그동안 용접을 이용한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배울 기회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교대로 실습했다.

예술가들은 문래예술공단이 뉴욕의 소호 거리나 베이징의 798예술특구처럼 예술가들이 모인 문화 중심지로 진화하기를 바란다. 김윤환 연구원은 “예술과 재래산업이 조화롭게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이 문래동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전 서울시의회가 준공업지역 공장부지에 최대 80%까지 아파트를 건립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해 불안하다. 한국에서 개발은 문화를 평토화시킨다. 

ⓒ시사IN 한향란문래예술공단이 있는 문래동 3가 전경.
9월17일 밤 9시30분. 신흥상회 앞 테이블. ‘2차’ 반상회다. 철공소들이 문을 닫으니 분위기가 낮과는 영 달랐다. 고즈넉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이소주씨는 “한적한 문래동의 밤이 정말 좋다”라고 말했다. 왕희정 작가가 “복길네” 하며 멀리 손 인사를 한다. 박지원 작가가 사진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복길네 식당 아줌마가 퇴근하는 길이었다. 문득 ‘문래동은 장인적 에너지와 창작적 에너지가 교대한다’는 김윤환씨의 말이 떠올랐다. 해질녘이면 철재상가의 열기는 그 에너지의 바통을 문래동 예술가들에게 넘긴다. 노동과 예술의 계주처럼. 여기는 문래예술공단이다.
기자명 차형석·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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