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
직장을 뛰쳐나왔든, 다니고 있든, 들어갈 준비를 하든 ‘조직 생활’의 쓴맛을 본 20대 여성 4명이 모였다. 칼럼니스트 김현진씨(27)와 대학 졸업반 이한나씨(24), 공기업 2년차 직장인 류미애씨(가명·26)와 은행원 1년차 최순혜씨(가명·24)가 20대 여성의 항변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좌담은 9월17일 〈시사IN〉 편집국에서 진행됐다.   사회:‘20대 여성’으로서 (사회)조직 생활의 어떤 점이 힘든가?

김: 20대 여성이나 남성이나 고민은 다 비슷하다. 다만 가지가 갈라져나온 게 있다면, 바로 성역할 고정관념이 문제다. 20대 남자는 직장에서 최소한 그런 점이 자유롭다. 회사에 20대 아가씨가 들어오면 알파걸도 됐으면 좋겠고, 정숙하기도 바라고, 화사하고 발랄한 걸 바라면서 현모양처도 원한다. 남자는 일만 잘하면 된다. 류: 내가 회사에서 제일 어려웠던 점은, 아저씨들과 소통하기가 힘들다는 거다. 항상 애교스러운 리액션을 바란다. 회사에 들어가서 (평범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면 되게 싫어한다. (발랄하게) “어머! 좋은 아침이에요” 해야 한다. 평생 살면서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없었는데 여기서는 목소리가 허스키하다고 뭐라 그런다. 심지어 술자리에서 나보고 “○○씨, (도레미)‘솔’ 해봐. 솔” 이런다. 심각하게 목소리 클리닉 다닐까 고민했다. 이제껏 나는 못하는 게 없다고 자신감 있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목소리처럼 선천적인 걸 제기하니 당혹스럽더라. “우린 회사에서 고립된 섬 같다” 최: 우리 세대 여성에게는 조직 안에서 강력하고 실질적인 롤 모델이 없다는 것도 답답하다. 신입사원 연수 때 행장·부행장 오는 것 보면 뭐 여자가 있어야지 꿈을 키우든지 하지. 우리더러 너희가 첫 테이프를 끊을 거란다. 그게 기쁠 줄 아나본데 전혀 그렇지 않다. 류: 회사 여자 선배들과 친하지도 않다. 30대 이상 아줌마는 육아와 가사에 치중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우리를 자기들의 일원으로 쳐주지 않는다. 20대 여성은 회사에서 고립된 섬 같다.

ⓒ시사IN 윤무영
사회: 20대 여성이 조직에서 느닷없이 이탈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그럴까? 이: 오히려 용기 있는 거 아닌가. 박차고 나가는 게. 솔직히 중년이나 남자들이 못하는 걸 20대 여자가 자신 있게 하는 거지. 최: 여자라서 쉬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용기 있다고 하는 선택을 실행하는 것도 아직까지 사회가 요구하는 ‘가족 부양의 짐’ 같은 게 남자에 비해 덜 무거워서가 아닐까. 류: 개인주의가 윗세대보다 강한 건 맞는데 그걸 나쁘게 보는 시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세대 롤 모델을 생각해보면 한비야씨가 대표적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여성상을 지향하기 때문에 쉽게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김: 그렇다고 자아실현 한답시고 네팔 가고 이런 건 싫다. 동네에서 찾으면 안 되나? 그리고 한비야씨가 롤 모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녀는 직장인이 아니다. 조직 생활에서는 반쪽 롤 모델이다. 최: 냉정하게 말해 ‘자기찾기’를 위한 돌출 행동 같은 건 우리 20대 여성에게 ‘마이너리티’에서 더 극한 ‘마이너리티’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 어떻게든 성공을 해서 윗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김: 회사 생활에서 비참해지는 경험을 하면서 나를 찾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사회: 결국 20대 여성은 비참해지는 경험 없이 곱게 자라서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건가? 최: 군대를 다녀온 남성에 비해 별로 억눌려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올 법하다. 그런데 윗세대가 무조건 한심해하는 건 억울하다. 그들도 정작 자식을 그렇게 키우지 않나. 조급해하지 말고 우리가 적응할 수 있게끔 도움도 좀 줬으면 좋겠다. 이: 삶이 나아졌는데 곱게 자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취직 원서 쓸 때 당황스러운 게, 만날 ‘삶에서 힘든 경험과 극복방안’을 쓰란다.   김: 윗세대가 “요새 애들은 눈높이가 너무 높다. 3D 업종을 피하니 취직이 안 된다”라고 꾸짖을 때, 앞에 괄호가 있다. (남의 자식들은), (우리 옆집 애는)이라는. 자기 자식은 곱게 키우려고 발악하면서 남의 자식들은 잡초 같기를 바란다. 윗세대도 이기주의 아닌가. “술·담배 말곤 채널이 없나?”

사회: ‘웹2.0 세대’로 불릴 만큼 20대는 온·오프라인 소통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회사 조직에서는 왜 소통이 어려울까?

ⓒ시사IN 윤무영대학 졸업반 이한나씨“취직 원서 쓸 때마다 당황스러운 게, 만날 ‘삶에서 힘든 경험과 극복방안’을 쓰란다.”
김:
윗세대의 착각이 크다. 우리가 메신저 쓰고 싸이질하는 걸 보고 ‘오, 저게 쟤들의 진정한 소통방식인가 보군’이라고 멋대로 해석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냥 사교의 방식일 뿐이다. 뭔가 영혼의 링크라도 하는 줄 안다. 이: 맞다. 그냥 안부 전하거나 나를 알리려고 싸이하고 메신저한다. 우리 스스로 진정한 소통의 장이라고 별로 생각 안 한다. 최: 인터넷 쪽지 기능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지점장님이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쪽지로 ‘오늘의 유머’ 같은 거 보낸다. 그러고는 우리랑 소통했다고 뿌듯해한다.

사회: 지금 사회 초년생은 인턴 프로그램이 본격 정착되면서 그 수혜를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조직 적응을 위한 호조건 아니었나? 이: 인턴 한 친구들 보면 거의 복사만 하다 오더라. 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턴 하기가 취직하기만큼 힘들다. 류: 인턴을 해보기도 했고 부려보기도 했는데 별 도움 안 된다. 오히려 인턴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에 들어왔을 때 제대로 신입 교육을 안 해주더라. 그냥 대충 알아서 선배한테 배우라는 도제 시스템인데, 그럴 경우 여자들이 훨씬 배우기 힘들다. 선배들은 술·담배 채널이 없으니 나하고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지 몰라하더라.

사회: 신입사원의 조직 적응을 위해 대기업에서는 멘토링 제도 도입 등 노력도 한다는데. 최: 실질적으로 큰 도움은 안 되지만, 멘토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마음의 위안은 있다. 류: 난 별로. 친구 중 한 명은 멘토를 믿었다가 발등찍혔다. 멘토에게 “회사 나가고 싶다. 너무 힘들다”라고 얘기했더니 곧장 인사부에 보고한 거다. 원래 회사 멘토링 제도의 취지가 그거다. 자기가 맡은 멘티가 회사를 나가면 멘토가 욕먹는다. 김: 진짜 롤 모델과 진짜 멘토를 찾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조직은 자꾸 제도로 흉내만 내고 싶어한다. 사회: 지금 20대 여성이 30대, 40대가 되면 어떻게 변할까? 다른 세대는 또 그들을 어떻게 인식할까? 이: 우리가 20대를 지나면 더 이상 관심을 받지는 않을 거다. 지금처럼 일과 육아로 힘들어하는 평범한 30대가 되지 않을까. 워커홀릭 혹은 괴로운 슈퍼우먼

ⓒ시사IN 윤무영칼럼니스트 김현진씨“회사는 20대 여성이 알파걸인 동시에 정숙하면서도 발랄하고, 현모양처이길 바란다.”
류: 회사에서 여자 화장실에 가면 엄청 싫은 게, 오후 두세 시쯤 되면 여자 선배들이 한 명씩 와서 차례대로 애들에게 전화한다. “철수야, 숙제했니?”라며 절박하게 소리지른다. 정말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 “철수야 숙제했니”를 하루에 다섯 번씩 화장실에서 소리 질러가며 애를 키울 자신도 없고, 그랬다간 내 삶의 질이 정말 낮아질 것 같다. 최: 맞다. 선망하던 직장에 들어가도 결국 거기서 ‘굉장히 평범한 아줌마’인 여자 선배를 보면 정말 혼란스럽다. 그러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 김: 결혼 안 한 노처녀 워커홀릭이 되거나 “철수야 숙제했니”가 되거나.

사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 〈시사IN〉에서 불러 기꺼이 나왔지만 사실 〈시사IN〉에서 정말 걱정해야 할 대상은 비정규직 여성이다. 사실 오늘 얘기한 문제들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알파걸’의 고민이다. 그 점을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된다. 이: 나도 너무 배부른 소리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곱게 자란 걸 너무 당연시하며 얘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취업 준비생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한 게, 정말 꿈꾸던 일이 ‘그냥 직업’이 돼버리면 전혀 즐겁지 않은 걸까? 최: 돈벌이가 되는 순간 재미 없어진다. 류: 간혹 아닌 사람도 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무슨 일을 하건) 진짜 알파걸이고, 성공한 20대 여성이다. (참석자 일동 : 맞다) 문제는 우리 같은 대다수의 ‘즐겁지 않은 20대 여성’이다. 항상 고민에 휩싸인다. 내 개인의 마인드 탓인지, 속한 조직에 문제가 있는 건지.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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