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난나
“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선배는 달래도 보고 다그쳐도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후배가 어느날 갑자기 사표를 썼다. 평소 구김살 없이 선배·동기와 잘 지냈고 일처리도 누구보다 빠릿빠릿했던 여자 후배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그냥 회사 생활이 싫어졌어요. 재미가 없어요.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의문이 들었어요.”

“그럼 가끔 내색이라도 하든가, 고민을 나누기라도 하든가. 느닷없이 이게 뭐냐….”
후배는 눈물만 간혹 훔칠 뿐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선배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좋은 대학 나와 열심히 공부해서,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직장에 취업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자기 경력 관리에 해가 될 수도 있는데.’ 사표보다 더 당혹스러운 건 그 ‘과정’이었다. 너무나 느닷없었고, 또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게다가 ‘재미없어졌다’니, 회사를 장난으로 다니나?

새삼스러운 풍경은 아니다. 20대의 무책임·이기주의를 ‘고발’하는 목소리는 그간 지겨울 정도로 많이 제기돼왔다. 직장인도 예외일 리 없다. 지난 2월 취업정보 포털 ‘인쿠르트’가 직장인 1372명을 대상으로 ‘회사 충성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대는 10점 만점에 5.8점으로 전체 세대 중 유일하게 평균(6.4점)을 밑돌았다.

이기적이라고? 촌스럽게!

하지만 ‘문제의 20대’는 이런 평가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앞의 사례에 나온 후배(24)는 얼마 뒤 선배를 만나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나도 이기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비난받을 일인가요? 오히려 나 자신이 아닌, 조직이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한다는 게 굉장히 어색하고 촌스러운 일 같아요.”

언론사에 다니는 권 아무개씨(25)도 갑작스럽게 휴가를 내 주위를 당황케 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상관 없었다. 조직 안에 있으면 정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죽을 것 같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뿐이다. 다른 요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혹자는 ‘배부른 소리’라고 욕할 수도 있다. 인정한다. 이쯤에서 분명히 하자면, 이 기사의 주 대상은 상대적으로 괜찮은 교육환경에서 자라, 먹고사는 문제에 큰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 좋은 직장에 취직했거나 취업을 준비 중인 20대(여성)에 국한됨을 밝혀둔다.

‘나’를 다른 무엇보다 중시하는 세태는 비단 20대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위의 세대별 ‘충성도’ 조사에서도 드러나듯이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은 확연히 다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도 이 지점에서 뚜렷이 갈린다. 남성은 대체로 조직에 적응하는(조직을 자기화하는) 길을 찾는 반면, 여성은 그렇지 않은(또는 못한)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여교사인 이 아무개씨(43)는 올해 초 황당한 경험을 했다. 신입 교사 환영 회식 자리에 신입 교사(여성)를 포함해 1~2년차 여성 교사가 모두 불참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다른 일이 있다면서 안 오더라. 나이 든 ‘노땅’ 교사·교직원과 함께 어울리기 싫었던 것이다. ‘요즘 애들이 저렇구나’ 어이가 없었지만, 남자 후배 교사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남자 교사들은 선배 말을 비교적 잘 따르고 위계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동년배인 20대 남성 직장인이 보기에도 20대 여성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외국계 회사에 3년째 다니는 문 아무개씨(27·남)는 “남자가 확실히 조직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큰 것 같다”라고 전한다.
“남성 중심 사회라고 하는데, 그건 단순히 보수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업무 과정에서 자신을 얼마나 희생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얼마 전 나는 휴가 기간이었는데도 회사에서 너무 일이 많다고 해 나와서 일했다. 그러나 같이 일하는 20대 여성은 미국 여행 갔다며 안 오더라. 그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직장 내에서 평가를 가른다.”

칼퇴근 여성, 남성의 두 배

고학력 20대 여성 ‘니트족’(NEET·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이 남성과 달리 매년 꾸준히 증가(2001년 10.5%→2006년 28.5%)하는 현상도 ‘조직 적응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기본적으로 20대 여성에게 알맞은 일자리가 양적·질적으로 부족한 현실을 나타내지만, 차라리 놀지언정 조건이 안 맞는 조직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의사도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의 문제를 떠나, 직장 여성과 남성의 조직 적응도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인쿠르트가 올해 1월과 5월 각각 실시한 ‘평균 퇴근시간’과 ‘사회인맥’ 조사가 그것이다.

이 조사에서 ‘칼퇴근’하는 여성(28.0%)의 수는 남성(15.6%)의 2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고, 반대로 직장·업무를 통해 알게 된 사회인맥 수는 남성(120.7명)이 여성(66.1명)을 2배 가까이 압도했다. 해석 차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정시 퇴근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조직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될 테고 사회인맥의 경우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연줄 문화’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듯하다.

남성 역시 좌절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좌절의 강도나 표출은 조직 적응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는 각종 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8월 MBC와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절반 이상(53.5%)이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발전 가능성’에 회의적이라는 응답을 내놓았다. 20대 남성(36.1%)보다 훨씬 더 높은 수치였다. 2007년 통계청은 여성의 이직률이 남성보다 1.33배 높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여성이 느끼는 좌절은 많은 부분 ‘나의 꿈’ ‘나의 기대’ ‘나의 비전’과 조직(회사) 현실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며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둔 앞서의 20대 여성부터가 그렇다. 전문직 여성인 김 아무개씨(27)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라며 종종 친구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곤 한다.

ⓒ연합뉴스20대는 직장에서 ‘나의 꿈’이 실현되길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위는 2007년 6월 삼성그룹의 신입사원 연수 장면.
“돈은 넉넉하게 번다. 그런데 괴롭다. 하고 싶은 게 분명히 이건 아닌 것 같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데,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게 너무 속상하다. 내가 무엇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 모르면 그 자체로 불행 아닌가. 부모님은 평소에 별탈 없던 나를 보고 크게 당황한다. 참으라고만 한다. 난 답답해서 펑펑 울었다.”

대기업 홍보팀에서 근무하는 여성 김 아무개씨(24)는 자기가 직장에서 보상받을 수 있는 건 오직 돈뿐이라는 사실을 최근 깨달았다고 말했다. “꿈과 희망, 비전, 능력 발휘… 이런 건 이제 포기했다. 상사가 잘못해서 회사가 큰 손실을 입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한마디도 할 수 없는 분위기다. 저렇게 무능한 사람이 내 위에 앉아 있는 현실이 심정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어차피 회사가 이런 곳이라면, 그저 돈 많이 버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좀더 조건이 좋은 곳으로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소통하지 않느냐고. 일이 잘못되기 전에, 퇴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왜 하지 않았느냐고.

당사자의 항변은 간단하다. 전문직 여성인 김 아무개씨는 “몇 번 시도해봤으나 쉽지 않았다. 회사 안에서는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상사나 동료는 자기 이익을 먼저 따질 수밖에 없다. 나를 위한 진정한 조언을 듣기는 어렵다”라고 잘라 말한다. 대기업 홍보팀 김 아무개씨도 “나름 이상적인 소통이 이루어졌던 대학 시절과 크게 다르다. 상사들은 어떤 것이 정답인지, 효율적인지 찾기보다 자기 취향, 자기 이익에 맞는 선택을 한다”라고 꼬집었다.

‘자아 찾기’ 함정은 없을까

일각에서는 20대의 소통 능력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20대 전문가’로 잘 알려진 노정태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25·남)은 “요즘 20대는 과거와 달리 유년기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소통 능력, 문제 해결 능력, 사회 적응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한다.
“이전에는 대학만 가면 ‘독립’에 대한 압박을 받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IMF 때 혹독한 시련을 겪은 부모들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취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하려고 한다. 이제 20대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까지 됐다. 이렇게 필요하면, 혹은 징징거리고 조르면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다양하고 복잡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사회생활이 익숙할 리 있겠는가.”

20대 여성 처지에서 이런 지적은 결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닐 것이다. 20대 칼럼니스트 김현진씨(27)는 이같은 ‘캥거루족’ 논란에 대해 “우리나라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어떻게 조직 생활을 못하리라고 생각하나. 우리를 비하하려는 음모다”라고 분노한다.
하지만 조직에서 갑자기 ‘일탈’하는 20대 여성이 제시하는 주된 논리인 ‘나를 위하여’, 즉 ‘자아 찾기에 대한 열망’은 분명히 일반 성인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인 게 사실이다. 20대 여성 사이에서 ‘자아 찾기’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되어 있는지는 취업 준비 여성 김 아무개씨(25)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연합뉴스기업은 신입사원을 붙잡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한다. ‘부모 초청 행사’(위)도 한 예다.
“우리 세대는 질적인 행복을 굉장히 강하게 갈망하는 것 같다. 친구가 공기업 갔다고 그러면, 겉으로는 부러워하지만 속으로는 ‘그냥 현실을 택했구나’라며 살짝 무시한다. 어디를 다니고 얼마를 버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친구 사이에서는 그런 것보다 ‘쟨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한다더라’는 평가가 더 으쓱하게 만든다. 요새 20대 여성끼리 만나면 재테크나 취업, 시집 이야기나 한다고 생각하는데 별로 그렇지 않다. 해외여행 등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최근 갑자기 직장을 그만둬 주위 사람을 당혹스럽게 했던 진 아무개씨(24)의 고백은 더 흥미롭다. 그녀는 “20대 여성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선택해, 원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바람직한 거다’라는 인식이 내면화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나의 경우도 그렇지만, 20대 여성에게는 내 문제는 내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회사 내에서 소통을 잘 안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남한테 의지하기 싫은 것이다. 특히 20대는 ‘나약하다’ ‘무책임하다’ ‘캥거루족이다’라고 전사회적으로 욕을 먹는 세대다. 이에 대한 반발심이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 그러니 더욱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물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 일본의 교육학자인 우치다 다쓰루(고베여학원 대학 문학부 교수)가 저서 〈하류지향〉(열음사, 2007)에서 ‘자기 결정권’ 그 자체가 선이라거나, 개인 능력의 핵심 요소인 양 주입시키는 일본 사회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자기 결정권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벌거벗은 개인을 고립무원의 사회에 맞서도록 하는 것이라고 우치다 교수는 주장한다. 언뜻 보면 ‘자립한 인간’ 같지만 실제는 ‘고립된 인간’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진정으로 ‘자아 찾기’를 하고 싶다면, 아무도 자기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네트워크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나는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은행에 다니는 최 아무개씨(24)도 이런 지적에 공감을 표한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해 ‘자아 찾기’를 위한 돌출 행동은 우리 20대 여성에게 마이너리티에서 ‘더 극한 마이너리티’로 가는 길이다”라고 진단한다.

“누구나 다 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다”

〈키즈 리턴〉(1996)이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는 열아홉 청춘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영화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여기저기서 버림받은 두 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며 나눈 ‘멋진 대화’ 때문이다. 신지가 묻는다.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마사루가 답한다. “바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

 
언젠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보고 나면 누구라도 ‘아, 이건 내 이야기다’라고 소리치고 싶어지는 영화”라고 소개했다. “〈키즈 리턴〉에는 어떤 진정성 같은 것이 있다. 나 역시 감독의 진정성을 이 영화에서 느낀다. 그것은 기타노 다케시가 자기 이야기를 단지 솔직하게 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똑같은 인생을 사는 청춘을 향해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이 바보 자식아’라고 간절히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닥까지 갔다 와본 선배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마지막 반전. 여기서 그냥 끝낼 수 있었지만, 정성일씨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바로 뒤에 이런 문장을 달았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다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자명 고동우·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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