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EVA 판을 0.7㎝ 간격으로 슥슥 칼로 잘라낸다. 잘려 나온 끈을 한 번 구부려 겹친다. 생수병 뚜껑에 부어놓은 접착제를 이쑤시개로 콕 한 번 찍는다. 끈의 겹치는 부분 사이에 슬쩍 묻힌 다음 손가락으로 꾹 누른다. 가위로 끈 끝부분을 뾰족하게 다듬는다. 마지막으로 구슬 줄을 동그라미에 건다. 지난 3년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유족들의 가슴팍에서 또 누군가의 가방 지퍼에서 나부끼던 노란 리본이, 또 하나 완성됐다.

매주 수요일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서울시 통인동 참여연대 사무실의 방 한 칸은 노란 리본 공작소가 된다. 1년 전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시작한 ‘서촌 노란 리본 공작소’가 1년이 흘러 참사 3주기가 다 되도록 이어지고 있다. 스스로 제 시간과 손품을 들이겠노라고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이 끊이지 않아, 일회성 추모 행사로 기획된 모임은 자연스레 정기 모임으로 발전했다. 지난 1년간 다양한 지역·나이·직업의 시민 350여 명이 이곳에 모여 노란 리본을 만들고 갔다. 만들어진 노란 리본 7만여 개는 참여연대의 ‘노란 리본 나눠주기 캠페인’을 통해 카페·식당·미용실·당구장 등 다양한 장소로 퍼졌다. 바다 건너 외국에도 전해졌다. 그렇게 노란 리본은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또한 기억을 퍼뜨렸다.
 

ⓒ윤성희


■한때는 새누리당도 노란 리본을 달았지만…

노란 리본을 타고 지난 3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 끝에는 세월호가, 세월호에 타고 있던 304명 희생자가, 가라앉는 세월호를 보며 울던 이들이 있다. 2014년 4월 말 시민들은 같은 마음으로 노란 리본을 달았다. ‘무사 귀환.’ 이 가망 없지만 간절한 바람을 담아 옷깃에, 가방에, 카카오톡 프로필 등에 노란 리본을 걸었다. 민·관도, 여·야도 모두 동참했다. 카메라 앞에 선 연예인과 운동선수는 물론 길거리 교통경찰도 가슴팍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국무총리·장관과 새누리당 의원들도 노란 리본을 달고 일정에 참가했다. 전국의 사찰과 성당과 교회 건물에도 노란 리본이 걸렸다. 모두가 슬퍼하며 추모했고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았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말이다.

노란 리본이 누군가에게 ‘조롱’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극우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가 그 처음을 열었다. 당시 SNS 등지에서 널리 퍼지던 나비 모양 리본 이미지를 슬쩍 일베의 표식인 ‘ㅇㅂ’으로 바꾸어 유포한 것이다(아래 왼쪽 그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일주일이 되지 않은 시기였다.

일베 회원이 최초로 노란 리본을 ‘조롱’했다면, 노란 리본을 처음 ‘공격’한 측은 박사모 회원들이다. 2014년 4월3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조화가 안산 세월호 분향소 밖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을 접한 박사모 회원들은 “노란 리본 달고 계신 분 있으면 떼어내라”는 글을 올렸다. “노란색만 봐도 역겹다” “친노 좌빨 색깔이라 나는 진즉에 떼어냈다”라는 댓글 따위가 횡행했다.

곧이어 노란 리본 ‘테러’가 빈발했다. 2014년 5월3일, 노란 리본 그림이 그려진 세월호 참사 추모 대자보를 두세 명의 남성이 웃으며 찢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남성들은 마지막에 ‘일베 인증’ 손 모양을 취했다. 노란 리본이 불에 타는 모습을 담은 포스터(아래 오른쪽)도 그해 5월 초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추모, 빨갱이가 하면 선동이 됩니다”라는 문구가 함께 붙었다.

 

 

ⓒ윤성희‘서촌 노란 리본 공작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세월호 희생자 추모 리본을 만들고 있다.


■욕하고 때리고 침 뱉고…노란 리본의 ‘수난’

패륜 행위로 비난받던 이런 소수의 일탈은 지난 3년간 점차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노란 리본을 보면 욕하고 때리고 침을 뱉고 떼어내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어느덧 노란 리본 테러 사건은 꽤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주부 김정미씨(40) 부부는 각자의 차에 노란 리본 스티커를 붙인 직후 차량 테러를 당했다. 자꾸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기에 정비소에 차를 끌고 갔다. 정비사는 “누가 일부러 뾰족한 걸로 타이어를 찔렀는데요”라고 말했다. 남편 차에 붙은 스티커에는 누군가 손톱으로 긁어 떼려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봄이 채 지나기 전의 일이었다. 김씨는 “가족이 타는 차이고 안전과 관련된 것인데 누군가 다쳐도 좋을 만큼 노란 리본이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나 싶어서 섬뜩하고 씁쓸했다”라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문동욱씨(29)는 노란 리본을 단 가방을 메고 지하철에 탔다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할아버지는 “어린놈의 빨갱이 XX”라는 말을 내뱉었다. 꼭 나이 든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야구 마니아로 전국의 야구장을 돌아다닌 대학생 김지헌씨(25)는 야구장에서 노란 리본이 달린 자신의 가방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일부러 가방을 치고 지나가거나 들으라는 듯이 특정 야당 정치인 욕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 번은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더니 가방의 노란 리본 쪽에 가래침이 묻어 있었다.

고등학생 신 아무개양(18)의 가방에 달려 있던 노란 리본은 어느 날 같은 반 남학생들에 의해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일베 회원’으로 알려진 남학생들이었다. 노란 리본을 달고 지하철을 탔다가 삿대질하며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등을 비하하는 욕설을 쏟아내는 할머니를 만난 적도 있다. 그는 “노란 리본을 달았다고 지나가는 시민이나 같은 학우에게도 이렇게 상처를 주는데, 유가족들은 사회로부터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사진공동취재단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기간 내내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고 다녔다.


■비극 앞에서 ‘추모 금지’하는 나라

일베와 박사모에 이어 ‘노란 리본 떼기’에 앞장선 쪽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였다. 2015년 4월16일,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이미 극심했을 때이지만 그래도 1주기이니만큼 여야 국회의원과 각 부처 장관 등이 모두 달았던 그날 박 대통령은 홀로 노란 리본을 달지 않은 채 팽목항을 20분간 둘러본 뒤 남미로 해외 순방을 떠났다.

정부는 일찌감치 노란 리본을 불온한 표식으로 간주하며 ‘세월호 추모 금지’ 작업을 시작했다. 참사가 나고 한 달이 되기 전인 2014년 5월9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향하던 날, 가슴이나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단 시민들은 청와대 근처 길을 자유로이 통행할 수 없었다. 경찰이 ‘불법 집회 참가 가능성’이 있다며 통행을 막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회사원 이장근씨(39)는 주말 낮 친구와 함께 경복궁 관람 길에 나섰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했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매표소를 지나 경복궁 근정문을 지나는 순간 “저거 잡아, 저거” 하며 황급히 달려온 경찰 두 명은 이씨 일행의 신분증과 가방을 검사했다. 이씨는 “고귀한 목숨을 잃은 희생자에 대한 순수한 추모의 마음으로 노란 리본을 달았는데 정부가 반정부주의자 혐의를 씌우니 오히려 없던 반정부 감정이 마구 생기더라”고 말했다.

2014년 9월에는 교육부가 ‘학교에서 노란 리본을 달지 말 것’을 학교 교원과 학생들에게 지시하는 내용의 공문을 전국 교육청에 보내기도 했다. “교육 활동과 무관하고 정치적 활동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6월26일에는 경찰이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월호 추모 천막에 들어가 유가족들이 만들어서 걸어놓은 노란 리본들을 압수했다. ‘신고하지 않은 불법 시위용품’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달, 유엔 인권이사회는 집회·결사의 자유에 관한 한국 보고서를 통해 “세월호 참사는 명백히 정치화됐고 희생자 가족들의 상징인 노란 리본은 반정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법치의 주요 요소인 책임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을 정부를 흠집 내려는 시도와 동일시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일베 회원들은 세월호 노란 리본(위 왼쪽)을 일베 표식으로 바꾸거나(위 오른쪽), 리본을 태우는 포스터(오른쪽)로 조롱했다.


■교황이 말했다 “고통 앞에 중립 없다”

“노란 리본을 떼라”는 지시는 2014년 8월 방한 당시 일정 내내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닌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전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한 기자가 물었다.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교황은 그렇잖아도 한국에 와서 노란 리본을 단 지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요청한 사실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포함해, 노란 리본이라는 작은 표식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 세월호 생존 학생들과 희생자들의 형제자매 이야기를 담은 책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작과비평 펴냄)에서 한 생존 학생은 말했다. “길거리 다니다가 노란 리본이나 배지를 가방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볼 때도 너무 감사해요. 잊지 않는다는 거니까. 같이 기억한다는 거니까. 그게 그냥 힘이 돼요.”

팔에는 노란 팔찌, 가방에는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직장인 이정엽씨(35)가 집 근처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머뭇거리더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유가족이었는지, 같은 마음의 일반 시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따뜻해졌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노란 리본으로 위로받는 이들은 생존 학생과 유가족만이 아니다.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노란 리본은 여전히 ‘확산 중’이다. 프리랜서 강병무씨(35)는 지난해 12월 서울시내 한 호프집에서 옆 테이블 손님한테 안주를 ‘선물’받았다. 의아해하는 강씨에게 옆자리 손님은 강씨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가리키며 “내일부터 나도 당장 노란 리본을 달고 다녀야겠다는 용기를 얻었다”라고 말했다. 회사원 홍지혜씨(35)는 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뒤 계산을 하던 중 사장이 신용카드에 붙은 노란 리본 스티커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할 수 있어요?” 갖고 있던 노란 리본 고리를 나누어드리니 “이 귀한 걸…”이라고 고마워하는 사장을 보며 홍씨는 마음이 훈훈해졌다.

노란 리본으로 시민들은 ‘기억의 연대’를 맺는다. 서울시민 신혜영씨(38)는 지난 3월 초 여섯 살짜리 아들과 지하철을 탔다. 아들이 노란 리본을 단 사람을 보고 물었다. “엄마, 저 사람 엄마 친구야? 엄마랑 같은 리본 달았네?” 신씨는 대답했다. “응, 우리는 친구야. 함께 마음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친구.” 지난 3년 동안 노란 리본은 그렇게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묶고, 연결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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