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실용과학대학 학생 유디트 샬란스키(동독 출신)가 그린 통일을 상징하는 포스터.

독일은 상대적으로 금융이 약한 나라라고 알려졌지만 프랑크푸르트는 다르다. 이 도시 중심가에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유로화의 본산지 유럽중앙은행(ECB)이 있다. 유럽중앙은행 앞 빌리 브란트 광장에는 유로화 마크를 본뜬 거대한 유로화 탑이 서 있다. 유럽 경제의 상징이자 독일 경제의 상징이다.

이 유로화 탑 아래에서 딸 생일 기념사진을 찍던 위글리프 푸에르셸(52) 가족을 만난 것은 8월25일 저녁이었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베를린 장벽 붕괴 19년이 지난 뒤 통일 독일의 모습을 취재하러 왔다”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 요즘 통일이라는 화두가 약해져가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푸에르셸 씨는 이내 “통일(unification)이라니, 재통일(re-unification)이라는 말을 써야 하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서로 다른 나라가 합쳐진 게 아니다. 원래 하나였던 나라가 다시 하나가 되는 거다. 한국인은 왜 재통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통일이라고 부르나?”라고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독일에서는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라는 말이 통용된다.

“통일이라니? 재통일이라 해야 옳다”

푸에르셸 씨는 동서로 갈라진 분단 도시 베를린에서 태어나고 자란 ‘베를리너’다. 그의 삶에 통일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듯했다. “1989년 11월9일 장벽이 무너질 때, 나는 장벽에서 5km 떨어진 슐레비히 홀스타인 주에 있었다. 그날 밤새 뚫어져라 뉴스를 보고 또 봤다. 다음 날 아침 동독 번호를 단 차들이 거리를 쏘다니는 모습을 봤다. 난생처음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푸에르셸 씨는 그 나이 세대 독일인의 평균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초대를 받아 다음 날 그의 집에 가보았다. 벽에는 1987년 직접 찍었다는, 베를린 장벽에 난 구멍을 통해 본 반대편 모습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통일의 감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동독(east Germany)’이라는 말 대신 ‘동부 독일(eastern part of Germany)’이 옳은 말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는 20세 아들과 18세 된 딸이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당시에 태어난 신세대다. 어쩌면 ‘통일둥이’ 세대라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들은 독일 통일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통일 덕에 독일인의 자존심·주권 찾았다”

이튿날 아침 푸에르셸 가족의 도움을 받아 딸이 다니는 학교인 프랑크푸르트 ‘상트리오바 스쿨’에 가봤다. 이 학교에는 5학년에서 13학년까지 다니는데, 13학년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태어난 19세 또래이다. 교장의 협조 아래 역사 수업 한 시간을 빌려 13학년 학생 20여 명과 통일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 : 통일로 경제가 어려워지지 않았나? 곧 졸업할 텐데 통일 후유증으로 일자리를 얻거나 대학에 입학하기 어려워진 것 아닌가?
카타리나 : 그건 우리보다 동쪽에서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예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쪽으로 떠나고 있다.

기자 : 동독 지방에 가본 적이 있나? 어떤 느낌인가?
마리오 : 지난해에 가보았다. 동쪽에 가면 여전히 도시 모양새가 여기와 다르더라. 요즘 공사를 많이 해서 동독 시절보다 좋아졌다고 하는데도, 확연히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카타리나 : 동쪽의 어느 도시는 젊은이가 더 이상 살지 않는 곳도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서독 지역에서 유학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벌써 빈집이 많아졌다.

기자 : 동독 사람이 통일로 인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나?
 마리오 : 난 동독 사람이 정말 통일을 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국경을 넘고 속박 없이 여행도 하며 다니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 조국의 개혁을 원했을 것이다.
카타리나 : 하지만 난 우리가 한 나라가 됐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다.
펠릭스 :  통일한 덕분에 비로소 독일 사람이 자존심과 주권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독일 땅은 외국 점령군(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이 차지했다.

이렇게 몇몇 학생과 대화를 나누던 중 자기 할아버지가 과거 동프러시아 지방 사람이었다는 베리 양에게, “만약 독일이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자기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해봤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대답해달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난 과거에 어땠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베를린 장벽 해체 이후에 태어난 세대다. 나에게 오늘날 독일은 단지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베리에 이어 몇몇 학생도 비슷한 답변을 내놓았다. 통일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기보다는 통일 자체가 너무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워서 굳이 의미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시사IN 신호철베를린 장벽은 이제 독일의 관광 명소가 됐다.

학생들과의 집단 인터뷰가 끝난 뒤 푸에르셸 씨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난 자식이 태어나면 먼저 통일 독일에 대해 가르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곧 애들에게 정말로 가르쳐야 할 것은 통일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신세대는 통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통일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날 만난 통일둥이 세대 가운데 푸에르셸 씨처럼 ‘재통일’이라는 말에 가슴 벅차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독과 달리 동독 지역 학생들은 또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8월31일 드레스덴으로 가보았다. 드레스덴은 독일 동쪽 끝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동독 도시다. 서독 통일둥이에 비해 이곳 19세들은 이미 대학교 1학년이었다.

통일 직후 서독 사람인이 동독인을 ‘오시(Ossis)’라 부르며 놀리던 때가 있었다. 말씨나 행동이 촌스러워서 비아냥거리는 표현이었다. 드레스덴에 사는 조그 리베헤에게 서독 친구와 잘 어울릴 수 있는지 물어봤다. “당연하다. 서독 대학 친구가 서너 명 있다. 차별받거나 벽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투리가 다르지 않나?” “같은 서독끼리도 남북이 말씨가 다르다.”

중앙역에서 관광객에게 티켓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야나 게바우스에게 통일에 관해 물었다. “통일이 좋으냐고? 당연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여행할 수 있지 않은가. 예전에는 이 좁은 동독 밖으로 못 나갔다니 얼마나 불편했을까. 종종 서독 쪽으로 3박4일 정도 놀러 갔다 오는 것이 취미다”라고 말했다.

통일둥이 세대와 전 세대, 의식 차 커

헬라 우블레는 통일이 좋은 까닭을 아주 간단히 설명했다. “교회에 쉽게 갈 수 있다. 과거 동독 시절에는 정부가 교회를 싫어했다고 하더라.” “동독 지방에 젊은이가 다 빠져나간다는데?” “큰 도시로 젊은 사람이 가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현상이다. 딱히 독일만 그런 건 아니다.”
스테프 레만에게 “통일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져서 힘들지 않은가? 예전에는 당에서 직업을 정해주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레만은 “오히려 직업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진 것 같다. 다만 과거 경제제도 중에서 좋은 것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모든 걸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동독과 서독의 차이점을 느껴본 적 없나?” “글쎄, 동독 사람들이 좀더 이웃을 챙기고 공동체 중심인 것 같다. 같이 웃고, 같이 즐기고, 서로 돕고. 서독 사람들은 그에 비하면 다소 물질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것 같다.” “통일이 안 됐으면 동독이 어땠을 것 같나? 통일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고, 통일을 반대하는 조직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자 이내 어디선가 들은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잘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 통일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상황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튿날 베를린에서 만난 송두율 뮌스터 대학 교수는 ‘통일둥이’ 세대는 그전 세대와 다르다고 말했다. 비장함이나 역사에 대한 엄숙함 같은 감정은 없다. 동독 출신과 서독 출신을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다.

푸에르셸 씨처럼 베를린 장벽 붕괴를 보며 펑펑 눈물을 흘린 통일 1세대는 고통분담 세대이기도 했다. 서독 주민은 무거운 세금을, 동독 주민은 실업과 차별을 감내했다. 동독의 경우 ‘잃어버린 세대’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통일둥이 세대는 앞날이 밝다. 자신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쯤, 마침 독일 경제는 오랜 침체를 극복하고 도약하려 한다.
8월31일 베를린 메세에서 열린 국제영상가전박람회(IFA)에 가보았다.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로 꼽히는 이 행사에 메르켈 총리를 비롯해 전세계에서 20만명이 몰려왔다. 삼성전자와 LG는 출입구에 대형 깃발을 휘날리며 위용을 과시했다. 

“박람회 그 자체가 독일 경제 수입원이다”라고 프랑크푸르트 소재 무역진흥공사(KOT RA) 김기중 부관장은 말했다. 독일은 IFA 외에도 하노버의 CeBit, 프랑크푸르트 오토쇼, 쾰른의 카메라쇼 등 거의 모든 도시가 박람회를 연다. 독일 4대 산업이 자동차·기계·화학, 그리고 박람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전시회가 열리면 숙박비는 두 배로 뛰고 지역 경기는 살아난다.
 

ⓒ시사IN 신호철독일은 유럽 경제 성장을 이끄는 엔진이 되고 있다. 위는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 IFA.

독일병·통일병 찾아보기 힘들어

IFA 삼성전자 부스에서 만난 한 간부는 올해 독일 경제의 성장률이 1.5%에 못 미칠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어휴. 1.5%면 상당한 거 아닙니까? 올해는 세계 경제 침체로 1%도 성장 못하는 나라가 많아요”라고 말했다. 독일 대표 기업 지멘스 부스에서 물건을 살피는 딜러 니콜라우스 쉬네처 씨에게 “통일 후유증으로 독일 경제가 힘들지 않나?”라고 물었다. 그는 “지멘스 같은 기업은 해외 시장을 목표로 하니까 국내 경기에 별 상관 없다”라고 답했다. 독일은 연간 수출액이 1조2000억원에 이르는 세계 최대 수출 국가다.

 

 

‘독일병’이라거나 ‘통일병’과 같은 모습은 요즘 독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한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던 독일 경제는 2006년 이래 유럽 경제성장의 엔진이 되고 있다.
8월30일 베를린에서 만난 독일 통일문제 전문가 만프레드 윌케 박사는 자기가 속한 세대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까 독일 시장에 가서 자두를 샀는데 어디 종자인지 물으니 40세 정도 돼 보이는 장사꾼이 ‘저쪽(drueben)’이라고 말했다. ‘저쪽’은 분단 시절 동독을 칭하는 표현이다. 19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의 머릿속 경계선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독일인의 잠재의식에 남은 분단 자국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롭게 성장하는 ‘통일둥이’들이 분단의 기억을 자연스레 없앨 것이다. 한국 신세대는 통일을 잊고 독일 신세대는 분단을 잊는다.

 

 

기자명 베를린·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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