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결국 구속됐다. 이런 불행이 더 이상은 없도록 대통령 잘 뽑아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박근혜 탄핵을 외치는 촛불 민심을 보다 더럭 겁이 났다. 내 나이 일흔둘인데 그사이 국민에 의해 나라가 뒤집어지는 걸 본 게 네 번째다. 열다섯 살에 겪은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 그런데 4·19는 박정희 쿠데타로, 1980년 서울의 봄은 전두환 군부에 의해, 1987년 6·10 항쟁은 양김 분열과 노태우 당선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환장할 노릇이지. 이번 촛불의 결과도 또다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갈까 봐 걱정이 되어 급히 책을 써내려갔다. 대통령, 제발 잘 좀 뽑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의원 시절부터 봤는데 문제를 못 느꼈나?외교통상위를 같이할 때는 나름 똑똑했다. 어학도 능란하고 품위도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18년간 로열패밀리로 크면서 배운 통치술이 몸에 밴 것 같다. 인수위원회 시절 야당 대표 자격으로 박근혜 당선자를 만났는데 그때부터는 불통인 게 서서히 느껴졌다. 그래서 취임하고 첫 번째 여야 대표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내가 계속 강조한 게 “소통하십시오, 소통 안 하면 망합니다”였다. 첫 번째 비서하고 소통하세요, 두 번째 여당하고 소통하세요, 세 번째 야당하고 소통하세요, 마지막으로 언론·국민과 자주 만나세요. 허준의 〈동의보감〉을 인용해 “통즉불통(通卽不痛)이요, 불통즉통(不通卽痛)”이라는 말까지 했다. 인간은 유기체라 통하면 병이 안 나지만, 막히면 아프고 죽는다고 했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은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한 거다. 그래서 소통은커녕 밥도 혼자 먹고. 좋게 보면 자존심인데 나쁘게 보면 열등감이다. 지금도 이 시련기를 극복하면 반정을 거쳐 다시 왕위에 복귀하리라 착각하는 것 같다.
왕이라고 생각하니 비선에 더 의지했을 수도 있겠다. 책에 노무현 정부 때도 유시민, 문성근씨 등이 대통령에게 따로 문자나 보고서 등을 보냈다고 써 있던데.어느 대통령이든 비선은 있다. 공식 라인 밖에서 의견을 듣는 지인들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대통령은 그런 의견들을 공적 라인 안으로 가져와 검토하게 만든다. 노무현 대통령도 외부에서 접한 의견 중에서 경청할 만한 내용이 있으면 가끔 나에게 건넸는데, 논리며 문장이 그렇게 깔끔하고 똑 소리 날 수가 없다.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되면 서슴없이 둘 다 장관시킬 거다(웃음).
이번 대통령은 당선 이후가 더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인수위 기간도 없고.아이가 태어나면 100일 안에 사람이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100일 잔치를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갖춰졌다는 걸 축하하는 건데, 정권도 마찬가지다. 임기 시작하고 100일 안에 국정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춰놓아야 하고, 핵심적인 개혁정책은 지지율이 높고 권력의 구심력이 가장 강한 임기 1년 안에 실행에 옮겨야 한다. 이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김영삼 대통령이다.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 하나회 숙청 등 굵직한 개혁 과제를 취임 첫해에 추진했고 당시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이렇게 임기 첫 1년 안에 주요 개혁 과제를 추진하려면 무엇보다 인수위 역할이 중요하다. 인수위 기간에 우선 추진할 공약을 추리고 정부 조직 개편과 청와대 참모진 구성을 마무리해야 한다. 장·차관급 100여 명을 포함해 고위직 인사 500명가량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통령 당선과 함께 임기가 시작되는 거라 인수위 구실을 정당이 50% 이상 해줘야 한다. 대통령 후보를 낸 정당들이 미리 정부 조직도 짜고 개혁 과제들도 정리해서 그 당의 후보가 당선되면 바로 가져다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도 자기 캠프 사람만이 아니라 정당 인맥을 가져다 쓸 수 있게 만들고. 어찌 보면 이번이 제대로 된 정당정치를 실험하는 계기일 수도 있다.자칫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한테 새 정부 장관들의 제청을 받아야 할 상황인 것도 아이러니다.그래서 이번처럼 바로 임기를 시작하는 대통령도 인수위를 설치할 수 있게 하는 법 개정안이 발의된 것이다. 지금대로라면 새 대통령이 지명하는 총리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 장관 제청권을 행사할 때까지 새 정부의 내각은 공석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수위 기간에는 예외적으로 총리 ‘후보자’가 장관을 제청할 수 있기 때문에, 전임 대통령의 궐위로 바로 임기를 시작하는 대통령도 짧으나마 인수위를 운영하도록 해 그 기간에 조각을 할 수 있게끔 만들자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정부조직 개편안을 엉망으로 내놓는 바람에 관련법 통과에 52일이나 걸렸고 결국 임기 초 100일을 까먹었는데, 새 정부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차기 정부가 1년 안에 추진해야 할 개혁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첫째가 개헌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데는 이제 여야가 없다. 그 전에도 많이들 느꼈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서 지긋지긋해진 것이다. 제왕적 권력을 대통령과 총리로 분산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국회에서 뽑은 총리에게 내치를 맡기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게는 외교·국방 같은 것만 맡기자는 얘긴데, 국회에 대한 불신이 높은 상황에서 국민이 동의하겠나?
뭐 무서워서 뭐 못하는 격이면 안 된다. 무엇보다 국회도 국민의 대표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입법 기능에 국한되어 있고 예산권과 인사권을 가진 대통령이 워낙 세서 제대로 된 삼권분립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국회를 파트너가 아닌 통치의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국회혐오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아예 견제가 불가능하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까지도 파트너가 아닌 시녀처럼 취급할 정도였다. 여당에서 조금만 다른 소리가 나오면 참지 못하고 ‘배신자’다 뭐다 콕 집어서 내치고 국회의장한테도 친박들 앞세워 별별 욕을 해대고…. 국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건 결국 한 가지 의도에서다. 여야가 계속 물고 뜯고 싸우는 모습을 보일수록 청와대 지지율은 반사적으로 올라간다는 정치적 셈법 때문이다. 이런 걸 경험해서인지 김형오·정의화 등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국회의장을 지낸 분들이 더 분권형 개헌에 적극적이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국회가 보낸 총리가 끊임없이 갈등하면 어떡하나?
대통령에게 국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줘도 되고 견제안을 건건이 문서화할 수 있도록 해도 되고, 분권을 강화하면서 협치할 수 있는 방안은 많다. 총리 권한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것도 절실하다. 미국 연방제 수준으로 경찰·교육·재정 등의 자치권을 지방정부에 대폭 이양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개헌에 대해 대선 주자들의 생각은 조금씩 다른 듯하다.
그건 의회에 맡겨야 한다. 국회에 여야 합의로 개헌 특위가 만들어져 있고, 개헌안이 국회의원 3분의 2만 넘으면 바로 국민투표로 넘어간다.개헌 다음은 뭔가?
검찰 개혁과 사회적 대통합이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하고, 경찰에 독립적인 수사권을 주고, 검찰은 기소권만 가지는 식으로 검찰권을 축소시켜 적폐의 상징인 검찰 개혁을 이뤄야 한다. 또한 사회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데, 가진 자가 세금을 더 내고 노조는 노동유연성을 양보하는 식의 사회적 대타협을 차근차근 이뤄나가야 근본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비슷한 취지로 노사정 위원회를 가동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한 일자리 감소나 양극화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창구로 노사정위가 만들어졌다. 사회적 대타협이 쉽지 않은 문제라 삐걱거려도 계속 끌고 가며 발전시켰어야 하는데, 지난 10년간 완전히 역주행했고 대한민국은 헬조선이 됐다. 10년 전으로 원상회복하는 것만으로도 반은 개혁이다.
노무현 정부 때 검찰·국정원 등 권력기관에 자율 개혁을 맡겼다가 실패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과감한 인적 청산을 주문하기도 한다.검찰·경찰·국정원·국세청 등 이른바 4대 권력기관은 과거 ‘권력을 지키는 개’라는 비난을 들었고, 노무현 대통령이 “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마라”고 했다가 되물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적 청산에 나서면 시원하긴 하겠지만 보복의 악순환만 초래한다. 시간이 걸려도 결국 시스템으로 견제하게 만드는 것, 그게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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