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국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수들 간의 전쟁이 참으로 이채롭다. 자유한국당으로 개명한 새누리당 지도부는 우리가 ‘보수의 진짜 적통’이라고 주장하며 “보수 이념과 가치에 뜻을 같이하는 모든 사람과 세력은 자유한국당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라고 설파한다. 반면 바른정당 측도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는 계파 패권과 불통, 독선과 오만, 비선 정치로 일관하다가 결국 탄핵 소추라는 국가적 불행을 초래했다”라고 지적하며, 자신들이 ‘보수의 유일한 대안’이라 주장한다. 정작 광장의 박사모 등 ‘태극기 집회’에 나선 이들은 ‘박근혜 보수’를 구호로 내걸고 있다.

자유한국당의 정통 보수, 바른정당의 개혁 보수, 그리고 광장의 ‘박근혜 보수’. 이 때 아닌 ‘보수 전쟁’에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면모는 진짜 보수, 보수주의와는 너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말 그대로 기존 질서, 제도, 전통, 관습을 보존하려는 가치 정향을 의미한다. 유럽의 중세 교권, 19세기 왕정체제, 그리고 사회의 기존 위계질서를 유지하려던 정치사회적 움직임이 그 대표적 사례다. 19세기 이후 서구의 보수는 기존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적 요구에 부단히 적응하는 진화론적 행태를 보여왔다. 서구 보수주의가 아직까지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반동과 구분되어야 한다.

보편적 보수는 기존 질서를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법치주의, 전통과 순응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자유시장과 사유재산의 보존도 보수의 핵심 가치다. 경제·사회적 부조리를 가족주의와 따뜻한 온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도 그 특징 중 하나다. 자유시장에 대한 강조는 자연히 작은 정부와 재정 보수주의로 이어진다. 보편적 보수는 애국주의를 중요시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바로 여기서 나오는 덕목이다. 그러나 이는 관용과 통합을 전제로 한 공동체 애국주의다.

보수의 가치와 이념은 나라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어왔다. 그러면 한국의 보수는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그 평가는 정통 보수, 개혁 보수, 광장 보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광장에서 표출된 한국 보수의 공통된 민낯은 ‘진짜 보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연합뉴스 2일 서울 여의도에서 태극기행동본부 주최로 열린 대통령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삭발식을 마치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2017.3.2

 


법치를 강조해야 할 광장 보수의 함성은 ‘군이여 일어나라’ ‘계엄령만이 답이다’ ‘특검을 해체하라’로 나타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이들은 검찰과 법원까지도 인정한 법적 증거를 부인하고 그와 관련된 가짜 뉴스를 무차별 배포한다. 아예 법 절차에 의한 탄핵 과정 자체도 부인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국가의 대승적 이익을 위해서는 사유재산을 침해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도 좋다는 궤변까지 내던지고 있다.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고 약탈과 지대 추구에 익숙해진 기득권 세력들을 옹호하기에 바쁜 광장의 보수, 이건 진짜 보수가 아니다.

‘그래 봐야 보수 정권은 끝장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이승만·박정희의 옛 공적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것 역시 참된 보수의 면모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나라와 동일시하여 그를 구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걸로 착각하고 국가 안보를 정권 안보로 환치시키는 이들의 애국주의는 오히려 반애국적 행보로 보인다. 시각이 다른 이들을 종북 좌파, 빨갱이로 매도하며 대형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이들의 애국심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애국은 어느 누구의 독점물도 아니다. 애국의 지름길은 국민적 합의와 통합이다. 이 규범을 깨고 분열 선동에 앞장서는 이들은 망국의 좀비와 다를 바 없다. ‘보수가 서야 나라가 산다’고? 이런 보수가 서면 나라가 망할 것 같아 걱정된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그의 저서 〈반동의 수사학〉에서 진보에 대한 보수의 비판을 세 가지 명제로 압축한 바 있다. 첫 번째는 ‘그래 봐야 너만 더 힘들어진다’는 역효과 명제, 두 번째는 ‘백날을 해봐라,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는 무용(無用) 명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복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 빨갱이다’라는 위험 명제이다.

이를 뒤집어보면 세 개의 반동 명제를 도출해낼 수 있다. ‘그래 봐야 보수 정권은 끝장이다’라는 끝장 명제, ‘아무리 용써봐야 역사는 흐른다’는 역사 발전 명제, 마지막으로 ‘안보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 북한과 적대적 제휴를 하는 빨갱이다’라는 적대적 제휴 명제 말이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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