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

“난 잘 모르지만, 다우존스가 방금 팔렸다는 말을 들었네. 50억 달러에 팔렸다네. 하지만 그 계약은 정말 꽝이네(really sucks).”

 

9월10일 미국 뉴욕 맨해튼. 오사마 빈 라덴의 항공기 테러로 국제무역센터가 무너진 그라운드 제로 현장은 9·11테러 6주년을 하루 앞두고 부쩍 늘어난 방문객과 경찰로 분주했다. 그라운드 제로 바로 서쪽에는 월드파이낸셜 센터 빌딩이 우뚝 서 폐허가 된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월드파이낸셜 센터 빌딩 1관은 다우존스 빌딩으로도 불린다. 다우존스가 발행하는 월스트리트 저널 편집국이 이곳에 있다.

이날 오전 11시, 다우존스 빌딩 정문에 노란색 피켓을 몸에 두른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들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기사를 쓰느라 여념이 없을 기자들이 이날은 시위대가 되어 한자리에 모였다. 회사측과 단체협상을 앞두고 가두 집회를 하기 위해서였다.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들이 주축인 다우존스 노조원 70여 명은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정문 앞에서 구호 제창과 행진을 벌였다.

기자들이 목에 건 피켓에는 ‘뱅크로프트 변호사는 30억 달러, 우리는 임금 삭감’ 등을 적은 슬로건이 보였다. 얼핏 임금 인상과 구조조정 반대를 주장하는 여느 노동자 시위와 흡사했다. 하지만 집회가 무르익을 무렵 기자들은 새로 다우존스의 주인이 된, 호주 출신 사업가를 조롱하는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부자, 부자라네, 난 당신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안 드네~, 루퍼트는 캥거루를 사랑하지. 하지만 기사를 쓰는 것은 바로 우리들인데. 우리를 천대하면 결과는 뻔하지, 저널리즘의 질은 하수구로 떨어지지.”

‘캥거루를 사랑하는 루퍼트’란 굴지의 언론 재벌이자 세계 각지에서 미디어를 99개나 거느린 뉴스코퍼레이션(뉴스코프)의 회장인 루퍼트 머독을 뜻한다.

지난 7월31일, 다우존스 소유주 뱅크로프트 가문은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프에 다우존스 주식을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다우존스 주식 64%를 보유한 뱅크로프트 가문 일가 가운데 절반(32%)이 루퍼트 머독에게 회사를 넘기는 데 동의했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총 56억 달러에 달하는 초대형 계약이었다.

루퍼트 머독이 다우존스를 인수한다는 소식은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세계적으로 ‘미디어의 황제’라는 명성을 얻은 루퍼트 머독이지만 뒤로는 그가 거느린 언론사들이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자존심 강한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들은 그가 편집에 개입해 신문의 논조와 편집 방향이 흔들릴 것을 걱정했다. 다우존스 노조 사무장 팀 마텔 씨는 “뱅크로프트 가문이 회사를 매각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노조원들은 ‘루퍼트 머독만 아니면 된다’는 입장이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호철‘우리를 천대하면 저널리즘의 질은 하수구로 떨어진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회사측과 단체협상을 앞두고 시위를 벌이고 있는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들.

지난 6월28일 다우존스 노조원들은 루퍼트 머독의 다우존스 인수 움직임에 항의하며 오전 출근을 집단 거부한 적이 있다. 9월10일 맨해튼 시위 현장에서 〈시사IN〉 취재진과 만난 노조위원장 스티브 얀은 “그날 전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기자직 노조원 대부분이 항의에 동참했다. 비노조원 간부들도 출근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만방에 독립적인(independent) 언론, 퀄리티 페이퍼를 지향하는 우리의 뜻을 알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스티브 얀 위원장이 6월27일 노조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는 출근 거부 이유가 두 가지로 제시되어 있었다. 첫 번째가 편집권 보호 의지를 밝히는 내용이었다. “오늘날 월스트리트의 오랜 전통이었고 우리 기사의 품질을 보증하는 각인이었던, 편집권 독립이 지금 위협받고 있다”라고 그는 썼다. 두 번째 이유는 다우존스 회사측이 노사 단체협상에 성실히 응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기자와 만난 스티브 얀 위원장은 “뱅크로프트 가문은 그동안 편집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1902년 이래 다우존스 소유주였던 뱅크로프트 가문은 미국의 초기 언론사 사주들이 그랬듯 신문의 명예를 존중하는 편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뱅크로프트 가문 후손이 언론 비전문가들이라 편집에 관여할 능력이 없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머독이 다우존스 사를 인수한다고 발표한 지 두 달이 지난 요즘도 월스트리트 저널 편집국 분위기는 여전히 뒤숭숭하다.

머독, 사회적 권력자로 떠올라

취재진은 9월5일 뉴저지 페인스 보로에 위치한 월스트리트 저널 노조 사무실을 방문했다. 노조 전임 팀 마텔 씨는 흥미로운 그림 하나를 보여줬다. ‘월스트리트풍 인물화’(사진 대신 점으로 인물을 묘사하는 월스트리트 특유의 그림)로 그려진 루퍼트 머독 얼굴 위에 ‘쇼 어스 더 머니’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는 포스터였다. 이 포스터는 월스트리트 저널 미술팀에서 직접 제작한 것인데 얼마 전까지 전국 월스트리트 지국 사무실과 본사 편집국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9월4일 아침 머독이 본사 편집국을 방문한다고 통보하자 회사측 누군가가 포스터를 다 떼 버렸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지난 8월24일자 기사에서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3명이 루퍼트 머독의 인수 발표 이후 이직을 고려 중이라고 썼다. 파커 포프 기자와 케이트 켈리 기자는 뉴욕 타임스로 옮기고 싶어하며 헨리 센더 기자는 파이낸셜 타임스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 월스트리트 저널의 경쟁지들이다. 이 기사에 대해 다우존스 노조 팀 마텔 씨는 “비단 3명뿐이겠느냐”라고 말했다.

노조 사무실에서 발견한 다우존스 노조 소식지 〈미디어 매터스〉 2007년 6월호에는 흥미로운 글이 보였다.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지국 바비 블록 기자가 기고한 칼럼이었다. 블록 기자는 루퍼트 머독이 운영하는 영국 신문 선데이 타임스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루퍼트 머독이 싫어 월스트리트 저널로 옮겼는데 또 루퍼트 머독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소연했다. 글이 다소 길지만 루퍼트 머독을 보는 기자들의 일반적 인식을 이해하는 좋은 글이라 노조의 허락을 받아 요약해 인용한다.

 

ⓒ시사IN 신호철9·11 테러 현장 바로 곁에 자리 잡고 있는 월스트리트 저널 사옥. 가운데 우뚝 솟은 건물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선데이 타임스는 ‘한때’ 탐사 기사로 명성이 자자한 신문이었다. 머독이 1981년 이 신문을 인수했을 때 선데이 타임스는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머독이 인수한 이후 편집장이 바뀌더니 1면 기사가 왕실 뒷이야기, 거품 스타들, 복권, 여행지 소개, 불확실한 사실 등으로 채워졌다. 위대한 저널리즘의 전통은 선정주의로 바뀌었다. 필립 라이틀리 같은 훌륭한 기자는 쫓겨났다. 내가 선데이 타임스에서 일했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을 잘 안다. 물론 상사로부터 거짓 기사를 쓰라고 명백히 강요받은 적은 없지만, 허풍을 섞어서 사실을 과장한다거나,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내용을 기사로 쓴다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제재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했다. 충분히 취재하고, 균형이 잡힌 사실 기사보다는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선정적인 이야기가 더 우대를 받곤 했다. 이따금 내가 이른바 ‘특종’이라는 기사를 편집장에게 들이밀면서 이 기사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을 때, 그는 “걱정 마, 자네가 그걸 입증할 필요는 없어”라고 말했다. 이게 1997년 내가 명예를 존중하는 신문사를 찾아가기 위해 사표를 쓴 이유다. 그 신문사가 월스트리트 저널이다.”

물론 모든 다우존스 직원들이 머독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한 다우존스 노조원은 “루퍼트 머독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영자의 처지에서 보면 그는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노조원도 만약 자신의 기사를 상사가 삭제하거나 부당한 영향을 받아 왜곡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회사를 그만둘 것이다. 기자에게 자긍심은 중요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루퍼트 머독을 반대하는 사람이든 지지하는 사람이든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머독이 단순히 기업 경영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자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최근 발매된 미국 월간지 〈배니티페어〉 10월호에 따르면 루퍼트 머독 회장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올랐다. 지난해 1위도 머독 회장이었다. 물론 미국 대통령과 같은 정치인은 빠졌고 과학적 근거가 있는 순위는 아니지만 머독의 대중적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배니티페어〉는 머독의 영향력이 확대된 근거로 월스트리트 저널 인수를 꼽았다. 머독은 한국에서도 이미 유명한 인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8월31일 PD연합회 창립 기념식에서 “오늘날 머독이라는 언론재벌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사회의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 언론, 5대 거대 자본이 쥐락펴락

머독의 월스트리트 저널 인수는 한 사기업의 내부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시대 지구촌 언론 구조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다. 9월10일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영국 신문 더 타임스는 “러시아 재벌 가즈프롬(Gazprom)이 다우존스 인수전에 가세했다”라고 보도했다. 가즈프롬은 러시아의 가스 재벌로 2001년 러시아의 유일한 전국 방송 채널이던 NTV를 인수했고, 2005년에는 러시아 유력 전국지인 이즈베스티야를 인수했다. 가즈프롬 미디어그룹은 그 밖에 TNT 등 방송사 8개, 이즈베스티야 등 신문 잡지 8종을 가진 러시아판 ‘뉴스코프’다. 가즈프롬 미디어그룹 역시 언론의 본분을 넘어 러시아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과거에 양심적인 기자들을 힘들게 했던 쪽은 독재자와 정치 권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돈을 가진 쪽의 힘이 더 세다.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탐사보도 기자로 유명한 존 필저는 지난 6월 ‘소셜리즘2007’ 대회 연설에서 “1983년 글로벌 미디어그룹은 50개였는데 2002년에는 9개가 되었고 지금은 5개 정도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루퍼트 머독 자신은 미래에 글로벌 미디어그룹이 3개로 재편되리라고 전망한 바 있다. 앞으로 아시아 언론시장 진출에 역점을 두겠다는 포부를 밝힌 루퍼트 머독 회장은 내년 6월 서울에서 열리는 OECD 장관회의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다.

기자명 뉴욕·신호철 기자 / 취재 협조·강수지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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