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1980년대 초는 아직 미국에서 1960년대의 급진적 사회운동의 전통이 남아 있을 때였다. 그 무렵 잠시 미국에 살고 있을 때, 우리 가족이 자주 이용한 식품점이 있었다. 그곳 대학의 몇몇 교수와 학생들이 자주적으로 만든 생협 소속 가게였는데, 조합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근무하는 자원봉사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작고 소박한 가게였지만, 일상의 식생활에 필요한 것은 거의 다 있었다. 아직 한국에서는 유기농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때였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인근 농장에서 기른 유기농 곡물과 신선한 채소, 과일, 달걀을 안심하고 구해 먹을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그 가게에 처음 들렀을 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간판 대신에 크게 씌어진 경구였다. “Food for people, not for profit”(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먹을거리)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게 분명해졌다. 길고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었다.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학생과 교수들이 왜 시내로 나와서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지 금방 이해되었다. 요컨대, 그들은 돈벌이가 된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그리하여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자본의 잔혹한 논리에 대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본래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에게는 누구든 먹을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어떤 경우에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모든 전통적 공동체의 암묵적인 규범이었다. 때때로 영악한 인간들에 의해 먹을거리가 상업적 투기수단이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테두리 안의 일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의 확대 과정에서 먹을거리는 이윤추구 수단 중에서도 핵심적인 품목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록펠러를 위시한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2차 대전 직후부터 식량과 석유에 대한 독점적 통제를 통한 세계지배 전략을 면밀히 계획하고 있었다(윌리엄 엥달 〈파괴의 씨앗〉(2007)). 그러한 의도 밑에서 추진된 두 가지 주요 프로젝트가 세계 전역에서 소농의 전면적인 퇴출을 강요하는 이른바 ‘녹색혁명’과 ‘자유무역’ 논리였던 것이다.

소농이란 전통적으로 자립적 자급농사를 영위하면서, 자치와 민주주의의 토대인 공동체를 보존해왔던 존재이다. 일찍이 루소나 제퍼슨 같은 초창기 민주주의 사상가들이 생각했던 것은 독립적인 소농들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자치적인 공동체와 자립적인 삶의 토대가 사라진 상황에서 세계의 약자들이 자본과 국가의 전횡에 대항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사실상 없다. 오늘날 노동운동이 갈수록 힘을 잃고 있는 것은 소농과 농촌공동체의 전면적인 몰락이라는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삶을 ‘지금, 여기서’ 누리는 법

최근 나는 어떤 외국 신문에서 지금 혹심한 기아사태로 시달리고 있는 나라, 아이티의 아이들이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진흙으로 만든 ‘케이크’를 먹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진흙으로 연명이 가능하지 않겠지만, 당장에 허기를 면할 수는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참혹한 기사를 읽은 다음 날, 지난 20년간 한국의 농촌인구가 전인구의 27%에서 7.8%로 줄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현재 한국의 곡물자급도는 25%로 산업국가 중에서 최하위이다. 북한이 엄청난 굶주림의 비극을 겪고 있지만, 자급도가 남한보다는 훨씬 높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 석유위기, 세계적 경제공황이라는 임박한 위기상황에서, 이 나라의 지배층은 아직도 농사를 단순한 산업 논리로 보는 사고방식을 고집한다. 나아가 그들은 이제 한·미 FTA를 통해서 우리의 인간다운 삶의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자립적 농사를 결정적으로 패퇴시키려 하고 있다.

지금 국가와 자본이 ‘경제 살리기’를 운위하며 우리더러 가자고 하는 방향은 명백히 지옥행이다. 여기에 맞설 수 있는 길은 이 체제에 대한 계속적인 순응을 거부하면서, 풀뿌리 차원의 자립 및 자치의 소규모 협동체를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조직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호부조의 호혜적 공동체들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만 우리 각자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삶을, 지금 당장 여기서, 누리는 게 가능할 것이다.

기자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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