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7일 〈뉴욕 타임스〉의 짐 루텐버그 기자는 “트럼프가 언론의 객관성에 관한 규범을 시험하고 있다. 과연 트럼프를 보도하는 언론은 얼마나, 어디까지 ‘중립적’이어야 하는가?”라는 기사를 썼다. 의견을 배제하고 철저히 사실관계에 바탕을 둔 기사가 좋은 기사라는 규범을 지켜온 미국 언론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유형의 대선 후보의 등장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트럼프 관련 보도는 대부분 트럼프가 무슨 말을 했고 이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한 단편적인 내용이었다. 기자가 가치 판단을 담아 트럼프의 발언이나 행동을 평가하는 보도는 많지 않았다. 기자들은 트럼프의 발언이 명백히 인종차별적이거나 상식에 어긋나더라도 가급적 이를 직접 비판하는 것을 삼갔다. 〈뉴욕 타임스〉의 루텐버그 기자는 바로 이 지점을 문제 삼았다. 즉, 언론은 특정 캠페인에서 정한 공정함 혹은 (기계적) 중립성의 잣대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얼마나 진실한 정보를 알리고 사실관계를 정확히 전달했느냐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텐버그 기자의 주장은 언론이 정치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실제로 언론과 언론 지형의 변화는 정치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해왔고, 미국 선거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학자들은 언론 지형의 변화가 미국인들의 정치 참여와 정치인들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해왔다. 지난 150년간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종이 매체인 신문과 잡지에서 라디오로, 라디오에서 지상파 방송으로, 지상파 방송에서 케이블로, 그 후에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로 변화하는 언론 매체를 접해왔다. 먼저 신문을 보자. 알렉시스 토크빌은 1831년에 출판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한 가장 큰 원인으로 많은 수의 신문사를 꼽았다. 1869년부터 2004년까지 새로운 신문사가 생기고 소멸하는 것이 유권자들의 정치 참여에 미친 영향을 살핀 연구는, 새로운 종이 신문이 생길 때마다 유권자들의 투표율이 0.3% 증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Matthew Gentzkow, Jesse Shapiro, Michael Sinkinson, 2011, 〈The Effect of Newspaper Entry and Exit on Electoral Politics〉). 특히 1869~1928년, 즉 신문이 정보 유통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기에 그 효과는 두드러졌다. 1890년대에 미국 신문 지면의 20~40%는 정치 관련 기사였다. 신문의 확산은 곧 정치 관련 정보의 확산을 뜻했고,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 그리고 궁극적으로 투표 참여율도 신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덩달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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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지난해 열린 한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공약을 설명하는 미국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언론은 트럼프로 인해 많은 고민에 부딪혔다.
신문·라디오와 달리 투표율 떨어뜨리는 TV

독보적인 정보 매체로서 신문의 위상은 1920년대 들어 라디오가 대중적으로 확산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이 대선 보도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24년으로, 1930년대에는 그 비중이 많이 늘어났다. 1937년 미국 가구의 70%가 뉴스를 접하는 주요 매체로 라디오를 먼저 꼽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20~1940년 라디오 보급률이 0에서 100%로 증가하자 투표율이 7% 높아졌다. 이 연구는 언론 매체의 확산이 투표율만 올린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공황 이후 미국 연방정부는 뉴딜 정책의 하나로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Federal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을 실행했는데, 소득이나 교육 수준과 같은 다른 요인을 통제한 뒤에도 라디오 보급률이 높은 지역이 정부의 실업급여 예산을 더 많이 타갔다. 라디오의 확산으로 정치인들이 내놓은 정책과 정치 관련 뉴스가 훨씬 더 많은 대중에게 전달되었고, 그 결과 정치인들이 이런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유권자들, 즉 라디오 보급률이 높은 지역에 사는 유권자들에게 더 많은 정부 예산을 배분했기 때문이다(David Stromberg, 2004, 〈Radio’s Impact on Public Spending〉).

공중파 TV 시대의 도래와 함께 라디오의 전성기도 막을 내린다. 미국에서 상업방송이 허가된 것은 1941년 7월1일로, 1960년이 되면 미국 가구의 87%가 TV를 소유하고 있으며, 2003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5시간30분 TV를 시청한다. 처음 TV가 도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정치에서의 혁명을 기대했다. 더 많은 사람이 쉽게 민주적 절차와 정치 뉴스를 더 오랫동안 접하게 되면 정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투표율도 높아질 것처럼 보였다. 몇몇 사람들은 신문과 라디오가 그랬던 것처럼 소수 엘리트가 독점하던 정치 지식과 뉴스가 TV 덕분에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퍼지리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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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1960년 10월21일 미국 제35대 대통령 후보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첫 TV 토론회 장면.
하지만 TV 보급률이 오르는 동안 오히려 투표 참여율은 매우 낮아졌다. 스탠퍼드 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매슈 젠츠코는 TV의 확산이 투표율을 낮췄다는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논문을 발표했다(2006, 〈Television and Voter Turnout〉). 젠츠코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TV의 확산으로 연예나 오락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정치 뉴스 비중이 줄어들었고, 지역 정치인들보다 중앙 무대 정치인들의 뉴스 비중이 높아져 대선이 없는 해에 치르는 중간선거 투표율이 낮아졌으며, 전반적으로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의식 수준도 낮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디어 선택의 폭은 점점 넓어졌다. ABC·CBS·NBC 이렇게 세 공중파 방송사만 존재하던 시대는 가고 1990년대 들어 케이블 뉴스의 시대가 도래했다. 현재 정파적 뉴스의 상징이 된 폭스뉴스가 탄생한 것도 1990년대다. 1996년 3월 루퍼트 머독은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돌아가는 케이블 뉴스 채널의 도입을 선언했고, 폭스뉴스의 첫 방송은 1996년 10월7일 전파를 탔다. 도입 당시부터 폭스뉴스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치 뉴스를 보도하는 방식은 기존 공중파 뉴스 채널이나 다른 케이블 채널인 CNN에 비해 보수적이었는데, 이러한 성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되었다. 2014년 기준 이른바 황금 시간대 폭스뉴스의 메인 뉴스 시청자는 200만명 수준으로, 60만명 수준의 CNN 황금 시간대 시청자 규모의 세 배 가까운 수준이다. 폭스가 거두는 수익도 12억 달러로 CNN의 3억 달러보다 네 배 높다(퓨리서치센터, 2016, 〈State of the Media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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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뉴스 갈무리대선 출마 선언을 생중계한 폭스뉴스. 폭스뉴스는 공화당 후보자들의 득표율을 0.4~0.7% 높였다.
정치인을 향하는 ‘팩트 체크’

폭스뉴스의 도입과 인기가 실제로 보수 정당인 공화당에 도움을 주었을까? ‘폭스뉴스 효과’라는 제목의 연구를 보면 실제로 폭스뉴스가 공화당 후보자들의 득표율을 0.4~ 0.7% 높였다고 주장한다(Stefano Della Vigna, Ethan Kaplan, 2007, 〈Fox News Effect:Media Bias and Voting〉). 이 효과가 미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접전이 펼쳐지는 선거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효과다. 예를 들어 2000년 미국 대선의 운명을 좌우한 플로리다 주에서 부시 후보와 고어 후보의 최종 표 차이는 537표였다. 이 논문의 예측치에 따르면 플로리다에서 폭스뉴스 효과로 고어 후보 대신 부시 후보를 찍은 사람 수가 1만757명. 537표로 당락이 뒤바뀐 판세를 흔들고도 남을 수치다.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 주에서처럼 박빙의 접전이 펼쳐지는 경우는 폭스뉴스 효과로 선거 결과가 뒤집히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최근 미디어 연구는 보수적 성향의 폭스뉴스나 진보적 성향의 MSNBC의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성향이 강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Gregory Martin, Ali Yurikoglu, 2016, 〈Bias in Cable News: Real Effects and Polarization〉). 특히 이런 경향은 2008년 오바마 대통령 당선 이후 강해졌고 소셜 미디어, 블로그, 그리고 당파성 짙은 토크 라디오의 등장은 미디어의 정파성을 강화했다. 트럼프의 등장은 언론과 정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폭스뉴스가 보수적 성향의 언론이긴 하지만 폭스뉴스의 관계자나 진행자가 공화당 선거 캠페인에 직접 관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진보 성향의 매체도 이런 불문율은 지켜왔다. 미국에서는 언론인과 정치인의 구분이 명확하다. 언론인이 정치권으로 이동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는 자신의 캠프 인사를 물갈이하면서 극우 성향 온라인 매체 〈브레이바트(Breibart)〉의 편집인 스티븐 배넌을 선거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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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트럼프 캠프의 총책임자 스티브 배넌(맨 왼쪽)은 극우 매체 편집인 출신이다.
2007년 만들어진 브레이바트 뉴스 네트워크는 여성 혐오, 외국인 혐오, 인종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기사를 주로 내보내며 확인되지 않았거나 음모론에 가까운 ‘카더라’식 정보의 진원지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힐러리 클린턴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근거 없는 뉴스를 퍼뜨리기도 했다. 브레이바트의 부상은 트럼프가 떠오른 양상과 유사한 점이 많다. 기존 공화당 지도부나 워싱턴 정치를 반대한 공화당 지지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브레이바트는 티파티 운동의 바람을 타고 인기를 얻었으며, 폭스뉴스와 트럼프의 사이가 껄끄러워진 틈을 타고 트럼프 지지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페이스북 팔로어가 100만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230만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으며 한 달 평균 방문자가 1800만명으로 정치 뉴스 전문지 〈폴리티코〉와 같은 수준이다(Michael Grynbaum, John Herrman, 2016,

〈Breibart Rises From Outlier to Potent Voice in Cam -paign〉).
근거 없는 기사를 양산하고 이를 퍼트리는 온라인 매체가 어느 날 갑자기 미국 정치무대 전면에 나선 현재 상황에서 전통적인 엘리트 미디어의 구실은 무엇일까? 저널리즘이 강조하는 가치중립적인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뉴욕 타임스〉의 루텐버그 기자가 주장했듯이 이번처럼 ‘비정상적인’ 선거에서는 사실관계를 좀 더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 적극적으로 펜을 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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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요 팩트 체크 사이트 중 하나인 폴리티팩트 구성원들(위)은 2009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여전히 많은 언론이 기계적 중립을 고수하는 상황에서 지난 몇 년간 좀 더 적극적으로 언론의 구실을 하겠다고 나선 흐름이 있다. ‘팩트 체크’ 사이트의 등장이다. 정치인이 한 말이나 내놓은 정책의 사실관계가 맞는지 틀리는지를 검증해서 보여주는 팩트 체크 사이트의 등장은 최근 언론의 흐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 중 하나다.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전통 엘리트 언론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이 연두교서 연설을 하거나 대선 후보가 주요 공약을 내놓으면 중요한 사실관계부터 확인해 독자들에게 바로바로 알린다. 최근 출판된 책에서 위스콘신 주립대학의 언론학과 교수인 루카스 그레이브스는 “정치인이 내세우는 주장의 진실 여부를 판가름하는 팩트 체크의 보편화로 인해 언론이 더 적극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라고 진단했다(2016, 〈Deciding What’s True:The Rise of Political Fact-Checking in American Journalism〉). 사실 팩트를 체크하는 전통은 언론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다만 전통적인 팩트 체크는 신문사나 방송사가 기사를 내보내기 전에 자신들이 쓴 기사가 옳은지, 즉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2003년 팩트체크(FactCheck.org) 사이트를 필두로 시작된 최근의 팩트 체크 현상은 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니라 기사가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 특히 정치인이 한 발언이 팩트 체크의 대상이 되었다. 2009년 주요 팩트 체크 사이트 중 하나인 폴리티팩트(www.PolitiFact.com)가 언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팩트 체크를 중심으로 한 언론 보도는 더욱 중요해졌고, 현재는 신문사와 방송사 모두 팩트 체크팀을 따로 두고 관련 기사를 쓰고 있다.

이번 미국 대선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 언론

언론과 정치의 새로운 역학 관계와 그 안에서 나타난 새로운 언론 지형의 흐름이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 정치에 관한 지식, 그리고 궁극적으로 투표율과 선거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과거 사례를 보면 주요 언론 지형의 변화는 선거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번 변화는 매체 자체가 아니라 언론 보도 방식의 변화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 만약 진실에 관한 더 많은 정보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팩트 체크가 미치는 영향력은 궁극적으로 제한적일 것이다. 하지만 전례가 없는 유형의 인물이 대선 후보가 되어 사실과는 동떨어진 주장을 매일 쏟아내고 있는 점, 정보는 넘쳐나지만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가 갈수록 어려운 시대라는 점을 생각할 때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자처하는 언론 보도 방식의 변화는 이번 대선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낼 가능성도 있다. 언론과 정치의 관계, 선거 보도에서 언론의 역할을 지켜보는 것도 이번 미국 대선의 흥미진진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기자명 유혜영 (밴더빌트 대학 교수·정치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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