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복원한 이로 유명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옛 직장 선배였다. 서명숙 편집국장 때만 해도 아날로그 마감 체제였다. 기사를 프린트해서 전달했다. 하얀 종이에 까만 활자가 담긴 원고는 나중에 빨간색 육필로 난도질당했다. 빨간펜을 휘두르고도 성이 안 차면 서 국장은 “씨”라고 불렀다. 평소에 쓰지 않던 호칭으로 불리면 기자들은 회의실로 끌려갔다. 서 국장 손에 쥐인 선홍색이 낭자한 원고만 쳐다보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회의실에서 어떤 기자는 ‘요령부득(要領不得)’이라는 핀잔을 듣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나오기도 했다. 그게 뭔 뜻인지 찾아보고서야 머리를 긁적였다. 그땐 회의실로 끌려가 도살당하는 느낌이었지만, 나중에 생각하면 애정이 담긴 충고를 듬뿍 받았다. 그런 서명숙 국장이 남긴 말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있다. 서 국장은 마감을 ‘악마의 빚 독촉’이라고 정의했다.

잊지도 않고 거르지도 않고 마감은 다가온다. 마감만 없으면 기자는 천하의 남부럽지 않은 직업이다. ‘마감 인생을 마감’하지 않는 한 빚을 진 채무자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나도 채무자에서 마감을 닦달하는 채권자 신분으로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마감이 다가오면 초조해진다. 지난주 금요일 아침에도 그랬다. 편집국에 전화가 걸려왔다. 김영미 편집위원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다 뒤차에 받혀 교통사고를 당해 응급실로 이동한다는 다급한 연락이었다. 마감을 끝낸 몇몇 기자가 응급실로 직행했다. 김 위원의 안위에 이어 그가 ‘갚아줘야 할’ 지면 빚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이심전심이었나. 김 위원은 응급실에서 기사를 쓰겠다며 노트북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김 위원이 말하고 옆에서 기자가 받아 치는 ‘구두 마감’을 시킬까 잠시 고민했다.

기사를 한 주 늦췄다. 김 위원은 다행히 정밀 진단 결과 육체적으로 다친 곳은 없었다. 분쟁 지역 취재를 자주 다니다 보니, 정신적인 충격이 적지 않아 안정을 취해야 했다. 이번 커버스토리는 김 위원의 병상 투혼이 빛난 기사다. 병실에서 마감을 했다. 그렇다고 허투루 취재하지 않았다. 병원 침대에 설치된 태블릿 PC로 김 위원은 방글라데시 현지 취재원과 연락을 취했다. 분쟁 지역을 오랫동안 취재하며 사귄 취재원들이, 김 위원의 처지를 이해하고 손발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건져 올린 팩트를 지면에 담았다.

IS 테러를 먼 나라의 근심거리로 여긴다. 글로벌 시대 테러는 일상이다. 곧 여름 휴가철,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들은 김 위원이 쓴 ‘해외에서 테러를 피하는 법’을 읽어보시라. 혹시 모르겠다. 브렉시트에서 ‘월남 패망’을 읽는 어떤 분은 IS 깃발에 쓰인 ‘라 일라하 일랄라(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읽어낼지도. 시절이 하 수상하다. 김영미 위원의 쾌유를 바란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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