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얼마 전에 영화 <타임 투 킬>을 봤다고 했지. 백인 남자들에게 잔인하게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소녀의 아버지가 가해자들에게 분노의 총탄을 퍼부어 법정에 서게 되고, 그를 도와 아버지의 무죄를 이끌어내는 변호사의 이야기 말이야. 20년도 더 된 영화라 아빠도 가물가물하지만 변호사가 배심원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한 다음 열변을 토하던 장면은 참 유채화처럼 기억 속에 선명하구나.

“갑자기 트럭이 서고 두 남자가 그녀를 잡습니다. 근처로 그녀를 끌고 가서 묶습니다. 그녀의 옷을 찢어냅니다. 그리고 올라탑니다. 번갈아가면서 강간합니다.” 그리고 이 끔찍한 묘사의 마지막 기억나니? “그 아이를 백인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배심원에게 해줄 말이 있었을 거다. “네 딸이라고 생각해봐! 제발!”

이렇듯 성폭행은 한 사람의 영혼, 나아가 그 가족의 평화를 부숴버리는 끔찍한 범죄야.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우리 역사 속에는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를 보호하기보다 그 피해자의 불운을 탓하고 부주의를 비난하며 심지어 되레 죄인으로 몰아 박해하는 희한한 풍경들이 도사리고 있단다. 병자호란 때 만주 병사들에게 끌려갔다가 겨우 돌아온 숱한 여인들을 두고 “오랑캐들에게 몸을 더럽혔다”라며 손가락질하고 내쳐버렸던, 지질함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조선 남정네들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야.

성범죄 피해자가 오히려 ‘과잉 방어’로 재판받아야 했던 1988년의 사건은 1990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위)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조선 정조 임금 때 각종 살인·자살 사건을 조사한 기록인 <심리록>에서 정조는 한 사건을 두고 이렇게 한탄하고 있어. “양반과 상민을 구분할 것 없이 정숙한 여자가 포악한 자들에게 욕을 당하거나 나물을 캐다가 한번 끌려가기라도 하게 되면 갑자기 바람을 피운다고 손가락질을 받아 온갖 오명을 쓰게 된다. 강간을 당하고 안 당하고를 막론하고 바람을 피웠다는 모함은 자신(피해 여성)이 죽을 때까지 씻기 어려운 것이라서 방 안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기로 맹세하게 되니, 그 일은 어둠에 묻혀 밝혀지지 않고 그 심정은 잔인하고도 비장하다(<네 죄를 고하여라>, 심재우 지음, 산처럼 펴냄).” 한 남자에게 유린당한 여성이 그 때문에 주변의 눈총과 비난을 받다가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해버린 사건에 대한 정조의 평가야.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1779년 전라도 함평에서 한 여성은 자신을 겁탈하려는 남자의 어깨를 물어뜯어가며 저항하여 위기를 모면했음에도 주변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독을 먹고 자살했다. <심리록>에 따르면, 그 여성의 “손과 발, 손톱, 발톱이 온통 붉고 검게 변했으며, 독성으로 인해 혀가 오그라들었다.” 그 처참함이 어디 독 때문이기만 했겠니. 죽어가면서 얼마나 그 빌어먹을 세상을 원망했겠어. 멧돼지 같은 남자가 덤비는데 발버둥치고 물어뜯어 내쫓았더니 “뭔가 틈을 보였으니 그랬겠지 흥”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죽이고 싶었겠어. 뭐 그런 나라가 있었나 싶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니 그랬나 싶지? 그렇지도 않단다.

‘대망의 88올림픽’이 열린 해의 어느 날 밤, 서른두 살의 주부가 으슥한 밤거리를 걷다가 뜻밖의 일을 당해. 갑자기 달려든 두 남자가 자신의 팔을 잡아 꼼짝 못하게 한 뒤 골목길로 끌고 간 뒤 쓰러뜨려 놓고 성추행을 시도한 거야. 갑자기 입 안에 뱀 같은 남자의 혀가 들이밀어지자 여자는 어금니를 악물고 그 혀를 깨물었다. 남자는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어. 혀가 뜯겨 나간 거야. 당연히 너는 가해자의 인과응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건은 묘하게 전개됐다.

혀를 잘린 가해자 가족들이 주부를 찾아 잘린 혀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한 거다. 이에 분개한 여자는 두 남자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남자들이 주부를 무고 혐의로 맞고소하면서 일이 법정으로 옮겨진 거지. 남자들의 주장은 이랬다. 술 마시고 귀가하던 도중 길바닥에 앉아 있던 주부가 매달리며 어떤 식당으로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를 부축하여 골목길로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뺨이 맞닿게 되자 ‘술김에’, ‘호기심으로’ 주부에게 키스한 것뿐이다.

강간범의 ‘혀’만도 못한 여성의 인권

남자들은 강제추행치상죄로 기소된다. 남의 입 안에 집어넣었다가 잘려 나간 혀 자체가 강력한 증거였으니까. 그런데 가해자의 변호사는 유구하고도 효율적인 억지를 동원하지. “밤에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면서 다녔고 집안 문제로 불화를 일으키는 부도덕한 여성”으로 피해자를 몰아붙이면서, 그 여성의 ‘마수’에 걸린 ‘전도양양한’ 청년들의 상처를 부각시킨 거야. 덩달아 ‘과잉 방어’로 주부를 기소한 검사는, 그 주부의 ‘폭행 피해 진술이 자꾸 바뀐다’며 몰아붙였다. 즉, 옆구리를 먼저 맞았는지 뺨을 먼저 맞았는지 등의 진술이 헛갈리고 있다는 거야.

ⓒ연합뉴스 6월10일 섬마을 교사를 강간한 피의자 3명이 호송차에 오르기 위해 목포경찰서를 나오고 있다.

1988년 9월21일 대한민국 법원은 주부에게 징역 5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해. “정당방위라 인정될 수 없는 지나친 행위”라는 게 판사의 판단이었지. ‘상가가 밀집돼 있고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니 피해자가 공포에 질려 혀를 깨물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어. 대체 정당한 방어란 무엇인가? 대관절 여성의 인권은 강간범의 혀만도 못하다는 것인가 하는 여론이 물 끓듯 일어났어. 항소심 공판장 앞에서는 100여 명의 여성이 몰려들어 피해 여성의 무죄를 부르짖었단다. 아마 그분들도 영화 <타임 투 킬>의 변호사처럼 판사에게 호소하고 싶었을 거야.

“눈을 감아보세요. 동창회에서 맥주를 마시고 귀가하는 당신의 아내를 누군가 골목길로 끌고 가서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때린 다음 그 냄새나는 입을 갖다 대고 뱀 같은 혀를 들이밀어요. 당신의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보세요.” 마침내 1989년 1월20일 역사적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그러나 의미 있는 무죄판결이 내려진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도 확정돼.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지. “당시 술을 먹었다거나 식당을 경영한다거나 밤늦게 혼자 다녔다거나 하는 등의 사정이 정당방위의 성립을 저해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사실, 너무나 당연해서 언급하기조차 귀찮았을 이야기다. 여자가 술을 먹고 밤늦게 다닌다는 것이 성폭행의 빌미가 되어서도 안 되거니와, 성폭행범에 대한 응징의 정당성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판결은 그제야 대한민국의 판례로 자리 잡게 된단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 후 30년이 지나도록 비슷한 유형의 음해는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지. 최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때에도 어떤 남자들은 “여자가 왜 새벽까지 술을 먹고 있었냐”라고 잡소리를 늘어놓았다. 흑산도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도 “공무원이 웬 술을 그리…”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있었지.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그자들에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울부짖으면서도 법정 투쟁을 벌였던 그 주부,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경찰에 신고하고 증거를 잡아내 범인들의 멱살을 거머쥔 섬마을 교사는 정말이지 우리 사회 모두가 보내는 경의와 감사를 받아야 할 거야. 그 덕분에 우리 사회는 조금이나마 개선되었고 어떻게 하면 악에 굴하지 않고 악한들을 내동댕이칠 수 있는지를 보다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그분들에게 감사한다. 더하여 아빠는 파렴치한 범인을 욕한답시고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놓은 놈들”이라고 내뱉는 사람들에게 일갈하고 싶다. “정신 차려 이 양반들아. 망치긴 뭘 망쳐. 어디서 조선 시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당신 같은 사람들이 피해자를 더 괴롭게 하는 거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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