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 [반기문 키워드 10년치 외신 분석]

어디에도 없는 ‘반기문’
 

역대 유엔 수장들의 리더십 어땠나
 

영문 기사 8087건, 이렇게 분석했다

 

 

6월9일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했다. 한국 대선 출마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사무총장 임기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모든 노력과 시간을 쏟아붓겠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답이다”라고 말했다. 앞서의 한국 방문 때처럼 이날도 대권 도전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6월10일자 한국갤럽 정례조사는 처음으로 반기문 사무총장을 대선주자로 포함시켜 조사했다. 반 사무총장은 26%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다.

‘반기문 카드’가 대권 레이스의 상수로 떠오르면서, 국내 언론의 반기문 평가도 활발해졌다. 핵심은 10년 동안 유엔 사무총장직을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반 사무총장을 “역대 최악 중 하나”라고 혹평한 기사는 그의 대권 도전에 비판적인 한국 언론이 여러 번 인용 보도했다. 그런가 하면 세계 언론이 반기문 사무총장에게 찬사를 보낸다는 보도와 출판물도 끊이지 않았다.

찬사와 비난 모두 입맛에 맞는 외신 기사 한두 개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이래서는 국제사회가 반기문의 10년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시사IN〉은 국제사회가 본 ‘반기문의 10년’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그려보기로 했다. 〈시사IN〉과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기업 ‘아르스 프락시아’는 영어권 유력 매체 6곳과, 영어판을 발행하는 비영어권 유력 매체 4곳을 선정했다. 10개 매체는 미국의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영국의 〈가디언〉 〈텔레그래프〉 〈이코노미스트〉,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독일의 〈슈피겔〉, 일본의 〈아사히〉, 카타르의 〈알자지라〉다. 비영어권 매체는 영어판을 분석 대상으로 했다.

ⓒ연합뉴스5월29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가운데)이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풍산 류씨 종택을 방문했다.

이 10개 매체에서 ‘반기문’ 키워드가 포함된 기사와 칼럼을 수집했다. 10개 유력 매체가 임기 첫해인 2007년부터 올해 5월까지 발행한 기사와 칼럼 중 ‘반기문’이 포함된 글은 총 8087개였다. 국제사회가 유엔 사무총장의 리더십을 평가하는 방식을 10년 동안의 데이터 추적을 통해 그려보는 최초 시도다.

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기 전에 까다로운 문제 하나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유엔 사무총장의 리더십’이라는 건 대체 무엇을 뜻할까? 이 질문은 보기보다 간단치 않다. 다음은 20세기 미국의 외교관 프랜시스 플림턴이 했다고 알려진 농담이다. “우리 모두는 secretary(비서)가 뭔지 안다. 우리는 general(장군)이 뭔지도 안다. 그런데 도대체 ‘secretary-general’이란 뭔가?” 사무총장의 영문 표기 secretary-general을 이용한 말장난인데, 이 농담은 유엔 사무총장의 리더십 모델에 대한 뿌리 깊은 논란을 꿰뚫는다.

반기문 1기·2기로 분석 시기를 나눈 까닭

유엔 사무총장이 ‘세계 대통령’이라는 과장된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는 달리, 정작 동원할 수 있는 힘은 아주 제한되어 있다. 유엔은 세계정부가 아니며, 독자적인 재정 능력이나 제대로 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유엔의 실질적인 주인은 거부권을 가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이다. 사무총장은 상임이사국 중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사실상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구조다. 이 구도에서 사무총장은 회원국들을 위한 유엔 사무국의 관리자, 그러니까 비서(secretary)다.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에게는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도덕적 권위가 주어진다. 무력과 같은 ‘하드 파워’는 거의 없지만 글로벌 의제를 설정하고 국제 여론에 호소하며 강대국 간 갈등을 중재하는 등 ‘소프트 파워’는 행사할 수 있다. 이런 소프트 파워를 적극 활용하며 상임이사국과의 충돌도 감수했던 ‘장군(general)형 사무총장’도 유엔 역사에 몇 차례 있었다(역대 유엔 수장들의 리더십 어땠나 기사 참조).

어떤 리더십이 더 적절한지는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여전히 논란거리다. ‘비서’와 ‘장군’은 리더십의 우열이라기보다는 유형으로 보아야 한다는 논평도 많다. 비서형 총장을 두고 장군이 못 된다고 비판하거나, 장군형 총장에게 비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다.

다만 경향적으로는, 상임이사국의 뜻에 따라 재선 여부가 갈리는 첫 임기 때는 ‘비서형’이 많은 반면, 강대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는 두 번째 임기에서는 ‘장군형’이 등장한다는 분석도 있다. 영토도 군대도 사실상 없는 교황이 독특한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하듯, 재선 사무총장 역시 국제사회에서 독특한 지위를 누린다. 〈중앙일보〉 남정호 기자는 2014년에 출간한 책 〈반기문, 나는 일하는 사무총장입니다〉에서, 이런 경향을 “유엔 사무총장은 비서처럼 왔다가 장군처럼 간다”라는 말로 소개했다. 이 책은 반 사무총장이 두 번째 임기에서는 의지와 소신을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일 것으로 예측했다.

이제 데이터를 볼 준비가 됐다. 〈시사IN〉과 아르스 프락시아는 반 사무총장 임기를 초임(2007~2011)과 재임(2012~현재)으로 나눠 의미망 지도 두 장을 그렸다. 그 결과가 〈그림 1〉과 〈그림 2〉다. 지도에서 노드(점)의 크기는 의미 네트워크에서의 중요도, 색상은 의미 덩어리를 뜻한다. 즉, 같은 색 노드 무리는 의미 덩어리 대륙이다. 링크(선)의 화살표 방향은 논리적인 선후 관계를 나타낸다. 링크가 굵을수록 연결 강도가 강하다고 보면 된다.

반기문 1기 지도(〈그림 1〉)를 보자. 지도 가운데 ‘반기문’ 노드가 있다(노란색). 당연한 결과다. ‘반기문’ 키워드를 기준으로 데이터를 수집했기 때문에, 수집된 데이터는 어떤 식으로든 ‘반기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럴 경우 컴퓨터는 담론 지도에서 ‘반기문’의 영향력이 높다고 계산하게 된다. 노드가 커지고, 중앙에 가깝게 배치된다.

첫 임기 때 반 사무총장에 대해 글로벌 유력지들은 ‘리더십’(연두색)과 유엔 ‘개혁’(회색)을 기대했다. ‘개혁’은 유엔 조직의 방만함과 비효율을 개선하라는 요구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상 푸른색) 체제에 대한 개혁 요구이기도 했다. 5대 상임이사국이 각자 절대적 거부권을 쥐는 유엔 의사결정 시스템에 대해 문제의식이 높아지던 참이었다.

최대 과제로는 ‘중국’(푸른색)이 꼽혔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인권 개선 요구를 내정 간섭이라며 반박하고 있었고, 타이완과의 분쟁 가능성도 늘 잠재해 있었다. 유력지들은 동아시아 출신 사무총장이 인접 강대국인 중국을 어떻게 다룰지 관심을 보였다. 또한 리더십을 발휘할 만한 분야로는 ‘개발’(연두색)과 ‘인권’(연두색), ‘기후변화’(붉은색) 등이 꼽혔다. 실제로도 반 사무총장은 제3세계 개발 의제와 기후변화 의제를 자신의 브랜드로 만들려 노력했다. 이들 이슈는 강대국끼리의 갈등 소지가 비교적 적다. 초임의 ‘비서형 총장’에게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선택지였다.

〈그림 2〉는 재선 이후, 반기문 2기 지도다. 일반론적인 예측대로라면, 국제 분쟁에 좀 더 강하게 개입하고 때로는 상임이사국과도 날을 세우는 ‘장군형 총장’이 등장할 수 있는 시기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 권위를 이용해 국제 여론에 영향을 끼칠 경로를 확보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런데 지도에서 ‘반기문’을 찾으려면 한참을 뒤져야 한다. 왼쪽 하단, 중심과 아주 먼 곳에 겨우 등장한다. 그나마도 주요 의미망 덩어리와는 링크가 끊어져 고립된 채로다. 분석을 총괄한 아르스 프락시아 김도훈 대표는 “대단히 이례적인 결과다”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데이터 자체를 ‘반기문’ 키워드로 수집했는데도, 정작 그 키워드가 의미망 지도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반기문’ 키워드로 수집된 기사와 칼럼조차도 그를 이슈의 중심에 두지 않았다는 의미다. 글로벌 유력지들이 유엔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반 사무총장은 담론의 중심에서 말 그대로 ‘사라졌다’. 이것은 ‘장군형’과 ‘비서형’의 유형 구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변화다. 비서형 리더십의 전형을 보인 1기 지도에서도 ‘반기문’ 노드가 변방으로 밀리지는 않았다.

〈그림 1〉과 〈그림 2〉의 오른쪽에 있는 그래프는 컴퓨터가 텍스트의 의미망을 분석해 추출한 ‘보나시치 영향력 지수’다. 단순하게 설명하면, 전체 담론 구조에서 그 단어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 즉 지도 주위로 끼치는 파급력을 가지는지 보여준다. 의미망 지도에서 링크가 해당 키워드로 쏠리는 경향이 클수록 담론 내에서 그 키워드의 영향력이 높다고 계산한다. 담론에서 갖는 영향력이 높을수록 숫자가 커진다. 1기 지도에서 ‘반기문’ 키워드의 영향력지수는 11이다. ‘반기문’보다 더 영향력이 강한 키워드는 네 개다. 하지만 2기 지도에서 ‘반기문’ 키워드의 영향력지수는 4.7이다. 지도에서 더 영향력이 강한 키워드는 19개가 있다.

2기 지도에서 담론의 중심을 차지한 키워드는 ‘시리아’(노란색), ‘이스라엘’(연두색), ‘난민’ ‘위기’(이상 붉은색) 등이었다. 시리아 내전과 IS(이슬람국가)의 창궐, 유럽을 뒤덮은 난민의 물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등은 반기문 2기의 핵심적인 글로벌 이슈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회원국 간의 첨예한 갈등 이슈였고, 대체로 상임이사국 간의 갈등 이슈이기도 했다.

갈등이 등장하자, 반기문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는 국제사회의 진짜 플레이어들이 채웠다. ‘안보리’(남색) ‘대통령’ ‘오바마’ ‘영국’ ‘프랑스’ ‘러시아’(이상 푸른색) 등이 지도 중심부에 등장한다. 반 사무총장이 외교관료 출신치고도 유난한 갈등 회피 성향을 보인다는 관찰자들의 논평은 이번 분석으로 데이터의 지지를 얻었다. 미국의 국제정치 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반 사무총장에게 붙인 별명 ‘어디에도 없는 남자’는, 이렇게 해서 한 매체의 논평을 넘어 국제 공론장의 관점을 대표하는 말이 된다.

비서처럼 왔다가 투명인간처럼 가나

분석 결과를 두고 서울대 국제대학원 이근 교수(국제정치)는 이렇게 말했다. “공정하게 말하면, 반 사무총장이 시리아 내전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유엔은 그런 능력과 자원을 가진 조직이 아니다. 다만 사무총장은 하드 파워는 없더라도 특유의 소프트 파워를 활용할 수 있는 자리인데, 국제 갈등 이슈가 첨예해지는 시기에 소프트 파워를 활용해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이번 분석 결과는 관찰자들이 반 사무총장에 대해 내리던 평가를 데이터로 뒷받침했다고 본다.” 이 한국인 사무총장은 출신국 안보의 핵심 이슈인 ‘북한 핵’(연두색) 문제도 자기 의제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지도 하단에 고립시켰다. ‘개발목표’(붉은색), ‘기후변화’(회색) 등 갈등 요소가 약한 기존 의제들도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쯤 되면 한두 매체의 신랄한 논평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운신의 폭이 더 넓어진 재선 이후에, 갈등 이슈가 불거져 사무총장의 도덕적 권위와 중재력이 더 긴요해진 시기에, 정작 사무총장이 국제 공론장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이야말로 반기문 리더십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비서처럼 왔다가 장군처럼 간다”고들 하는 유엔 사무총장 자리를, 이 ‘어디에도 없는 남자’는 비서처럼 왔다가 투명인간처럼 가고 있다. 이 일관된 갈등 회피형 리더가 2017년 한국 대선의 유력 주자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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