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제대로 ‘간’을 봤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을 둘러싸고 흘러나오는 ‘대망론’에 긍정도 부정도 않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1년 만의 고국 방문에서 대권 도전을 시사했다.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는 내년 1월 “한국 시민으로서 할 일을 고민하겠다”라고 말했다. 고령(73)이라는 지적을 의식한 듯 체력에 자신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반기문 총장의 센 발언이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은 시점 때문이다. 4·13 총선 참패 이후 새누리당에 뚜렷한 대선 주자가 없는 가운데 반 총장 스스로 ‘대안’이 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새누리당 친박계가 반 총장을 앞세워 정권 재창출에 나설 것이라는 정치권의 소문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잇따르면서, 파문은 더욱 커졌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반기문 총장의 지지층이 상당 부분 겹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안 대표 측도 주목하고 있다.

반기문 총장은 과연 대권 도전을 선언한 것일까.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여전히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지난해부터 반 총장의 대권 도전 가능성을 높게 봐온 정치권의 한 인사는 “반기문은 여전히 ‘꽃가마’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추대와 옹립을 바란다는 것이다. 이 인사는 “반 총장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무엇보다 기존 정치권의 ‘꼭두각시’라는 이미지를 탈피해야 한다. 반기문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아직 ‘정치권 밖’의 사람이다. 여의도에 자기 세력도 없다. 이번 고국 방문에서 ‘간’을 세게 본 뒤 정치권의 반응을 살핀 것이라 볼 수 있다.

반기문 총장은 ‘정치권 밖’의 사람이다. 여의도에 자기 세력도 없다. 지금으로서는 새누리당 친박계가 만지작거리는 카드에 불과하다. 앞서 말한 인사는 “반 총장이 이번에 수위 높은 발언을 한 것은 정치판을 한번 세게 건드려본 것이다”라고 말했다. ‘간’을 세게 본 뒤 정치권의 반응을 살필 것이라는 이야기다. 반 총장의 발언 이후 “새누리당 모든 계파가 반 총장을 추대해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반 총장 측근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반기문은 대중적으로도 아직 검증되지 않은 카드다.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후광으로 강력한 지명도를 지닌 인물이지만, 현실정치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파괴력을 보여줄지 여전히 불확실하다.

지난 1월 〈시사IN〉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당시 〈시사IN〉은 차기 대선 주자 지지도를 조사하면서 ‘국가과제별’로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는지 물었다. 그 결과 반기문 총장은 남북 평화와 통일 분야에서 압도적인 1위(33.9%)를 차지했다. 하지만 나머지 분야에서는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자리 창출에서는 6위, 복지 증대에서는 7위에 그쳤다.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이 각 분야에서 고르게 순위권을 형성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 지지층의 판단이 눈에 띄었다. 일자리 창출과 복지 증대 분야에서 새누리당 지지층은 반기문 총장에게 박한 성적을 주었다. 김무성 전 대표는 물론이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보다도 낮은 점수를 매겼다. 보수 성향의 유권자가 반기문 총장에 대해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풀이됐다.  

야권의 잠룡들도 움직이다

반기문 총장이 야권에서 성장한 외교 관료라는 점도 새누리당에게는 걸림돌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외교부 차관에 발탁됐고,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 외교보좌관을 거쳐 외교부 장관에 올랐다.

참여정부에서 인사제도비서관을 지낸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이 최근 펴낸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에 반기문 총장과 관련한 일화가 등장한다. 책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후보 선대본의 총괄본부장이었다. 8개월 동안 15개국을 순방하며 반 총장의 당선을 도왔다. 반 총장이 당선된 날 청와대 참모들이 노 대통령의 숨은 노력을 알려야 한다고 건의하자, 노 대통령은 “쓸데없는 소리, 반 총장에게 영광을 돌려라. 아, 기분 좋다”라며 술까지 한잔 마셨다고 한다.

ⓒ연합뉴스박원순 서울시장·안희정 충남지사·손학규 전 더민주 상임고문(왼쪽부터)도 대선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된 뒤 그는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서 원망을 샀다. 추모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난해 말 문재인 더민주 대표는 “반기문 총장은 우리 당이 만들어낸 유엔 사무총장이다”라고 추어올렸다.  

흥미로운 건 새누리당의 태도 변화다. 2006년 반기문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출마했을 때 야당이었던 당시 한나라당은 “세계 외교 질서도 모르고 날뛰는 철부지들이 벌이는 턱도 없는 짓”이라며 야유를 퍼부었다. 그랬던 이들 상당수가 이제 반 총장을 자신들의 대안으로 꼽고 있다.

여권에서 반 총장이 움직이고 있다면 야권에서는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손학규 전 더민주 상임고문 등이 움직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쪽은 박원순 시장이다. 그는 5·18을 앞두고 광주를 찾아 “역사의 부름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겠다”라며 대권 행보에 시동을 걸었다. 정가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이미 박 시장의 대권 행보가 본격화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측근인 천준호 전 비서실장, 임종석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 등을 총선에 내보냈지만 고배를 마시면서 대권 행보가 한풀 꺾이는 듯했다. 하지만 박 시장의 발걸음은 총선 이후 바빠졌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 옥바라지 골목 철거에 반대하는 등 ‘정치인’으로서 행보에 나섰다. 최근에는 서울에 ‘노무현 루트’를 만들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과거 인권헌장 선포를 보류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에서 발을 빼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모두 야권 지지층에게 어필하겠다는 신호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도 몸을 푸는 분위기다. “문재인 전 대표를 계속 응원해야 할지, 아니면 직접 슛을 때리기 위해 뛰어야 할지 결정하겠다” “불펜에서 몸을 만들고 있다” 등 최근 의미심장한 발언을 잇달아 내놓았다. 과거에도 “기회가 된다면 대권 도전을 피하지 않겠다”라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해왔지만, 이번에는 진전된 발언이 나왔다.

야권에서는 안희정 지사가 문재인 전 대표와 ‘한 팀’이라는 이미지를 강점으로 꼽는다. 서로 경쟁하면서 대선 판을 달구다가 어느 한쪽이 후보로 확정될 경우,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안 지사가 충청 출신이라 호남에서 거부 정서가 거의 없는 것도 강점이다. 여권에서 반기문 카드가 현실화할 경우 안 지사를 등판시켜 ‘충청 대망론’으로 맞불을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4·13 총선 이후 사실상 정계 복귀를 선언한 손학규 전 더민주 상임고문의 행보는 안갯속이다. 더민주에서 야권 경쟁에 뛰어들지, ‘제3지대’를 택할지 관측만 무성하다. 더민주는 물론 국민의당에도 지지 그룹이 상당수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선택지를 놓고 고심할 것으로 보인다. 장기간의 칩거로 인한 정치 공백을 어떤 콘텐츠로 메우느냐가 관건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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