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멋진 책이 나왔다. 제목은 짧다. 〈고래〉다.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 〈고래〉와 제목이 같다. 이번 책은 소설이 아니라 과학 도서다. 소설 〈고래〉는 2000년대 한국 문학에서 손꼽히는 작품이라 여전히 많은 독자가 찾아 읽는다. 서점에서 ‘고래’를 검색하면 당연히 이 책이 제일 위에 나온다. 그런데 고래는 애초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 아닌가. 포유류 가운데 가장 큰 몸집을 자랑하고, 수면 위아래를 오가며 길게는 두 시간까지 잠수할 수 있고, 인간 못지않게 오래 살며 바다의 제왕으로 살아온 고래. 현재 지구상에 살아 있는 고래와 돌고래 90종의 몸 크기와 색깔부터 잠수 동작과 이동 패턴까지, 그야말로 고래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책 〈고래〉(애널리사 베르타 지음, 사람의무늬 펴냄)가 드디어 서점에서 고유명사 〈고래〉를 밀어내고 일반명사 고래의 지위를 회복했다. 이제 검색창에 고래를 치면 이 책이 제일 위에 나오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부터 시작된 길고 긴 오욕의 역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고래의 역사를 열어젖힌 쾌거다.

박태환과 김연아처럼 불쑥 솟아오른 〈고래〉의 성과는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아쉽게도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어린이 책을 빼면 지금 찾아볼 수 있는 고래 관련 단행본은 이 책을 포함해 네 종에 불과하다. 시공디스커버리 총서로 나온 〈고래의 삶과 죽음〉은 포경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해양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엘린 켈지가 쓴 〈거인을 바라보다〉는 고래를 바다 문화의 창조자이자 계승자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바다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넓힌다. 마지막 책은 〈고래의 노래〉로 유일한 국내 저작이다. 저자는 〈한겨레〉의 환경기자 남종영으로, 여러 차례 북극권에 다녀오며 직접 만난 고래 이야기에다 제주도 남방큰돌고래 이야기까지, 생생한 체험담이 돋보인다. 네 종의 책 모두 훌륭하고, 나 역시 그 책을 모두 읽지도 않았지만(당연히 가지고는 있다), 고래를 말하는 책이 네 종이라는 건 왠지 슬프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울산시 남구청 제공〈/font〉〈/div〉책 〈고래〉는 고래와 돌고래 90종의 색깔부터 잠수 동작까지 담았다.

한번 슬퍼지니 자꾸 슬픈 이야기를 찾게 되는데, 예를 들어 사슴은 과학 분야에 관련 도서가 한 종도 없다. 사슴으로 검색하면 사슴벌레만 나온다. 사슴벌레 책도 두 종뿐이다. 서점에서 동물을 다루는 책은 과학 분야에만 놓이는 건 아니다. 반려동물 분야에도 벌써 500종이 넘는 책이 자리 잡았고(과학 분야의 동물·해양생물·새를 합하면 대략 800여 종), 동물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도 분류는 따로 없지만 꾸준히 책이 나오는 편이다. 분포를 보면 동물에 대한 관심이 아무래도 동물의 생태보다는 인간과 맞닿은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 관심이 그들의 생사에 미치는 영향

이게 잘못되었다거나 편향되었다고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 가장 인기가 많은 반려동물은 고양이다.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담은 책은 못해도 1쇄는 팔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집 안에는 집고양이가 있고 길가에도 길고양이가 산다. 이렇게 어디에서든 주인처럼 살아가는 고양이라면, 후쿠시마에서도 나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그 후쿠시마 말이다. 사람도 살지 않는데 고양이가 살겠냐고? 그렇다. 함께 살던 사람이 다 남겨두고 떠났으니 그들만 살아 있었고, 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사람도 살아 있다(앞 이야기는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에서, 뒤 이야기는 〈후쿠시마의 고양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처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동물 이야기를 마주하니, 동물과 함께 사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묻게 된다. 그들은 늘 알아서 잘 살아왔지만, 우리의 어떤 관심은 그들의 생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고래 책 네 종은 어떤 쪽의 관심으로도 너무 적다. 빨리 다섯 번째 고래 책을 읽고 싶고 갖고 싶다.

기자명 박태근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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