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 물건과 서비스 과잉의 시대에 필요한 건 뭘까. 일본의 라이프스타일 산업을 주도하는 CCC(컬처 컨비니언스 클럽)의 마스다 무네아키는 <지적 자본론>(2015, 민음사)에서 “고객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어떤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제안’”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전후 부족한 물자를 요구하는 단계를 통해 폭발적 성장을 했고(1st stage), 다종다양한 상품을 원하는 시기(2nd stage)를 지나, 현재(3rd stage)에 이르렀다. 이 서드 스테이지에서 비즈니스는 물건 안에 담긴 철학과 스타일을 팔아야 한다.

한국에도 취향과 제안을 판매하는 플랫폼이 있다. 2011년 만들어진 창작자를 위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은 영화·음악·미술·출판·건축·디자인·게임 등 창조적인 분야를 총망라한다. 크리에이터들은 텀블벅을 통해 자신의 프로젝트를 알리고, 후원을 받아 프로젝트를 완성한다. 2015년 한 해 동안 텀블벅에서는 프로젝트 980가지가 진행됐고, 4만2709명이 후원에 참여해 29억563만원을 크리에이터에게 모아줬다. 1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후원한 사람도 1000명에 이르고, 100만원 이상을 후원한 사람도 650명이 넘었다. 1인 평균 후원 금액은 6만8000원에 달한다. 후원자들은 끝난 줄 알았던 추억 속 비디오 게임을 살려내고, 197종의 독립출판물이 세상에 빛을 보게 만들었다. 91세 할머니의 레시피를 기록한 요리책과 어머니의 일기에 손 그림을 더한 그림책, 성 소수자를 위한 잡지 창간호가 텀블벅을 통해 독자를 만났다.

ⓒ시사IN 조남진

텀블벅의 수익원은 펀딩이 성공할 경우에 한해 받는 플랫폼 이용 수수료 5%가 거의 전부다. 그럼에도 안정적이다. 소셜 펀딩이니 크라우드 펀딩을 다루는 스타트업이 여럿 있지만, 텀블벅만큼 인상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곳은 드물다. 올해 초 <포브스>는 30세 이하 영향력 있는 젊은 리더 중 한 사람으로 텀블벅의 염재승 대표(29)를 선정했다. 5월10일 서울 서교동 텀블벅 사무실에서 염 대표를 만났다. 약속시간인 오전 10시30분, 자율출근제를 시행하는 사무실은 다소 썰렁했다.


매년 3~4배씩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텀블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2011년에 창업할 때는 펀딩액이 한 달에 100만원만 모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웃음), 현재는 한 달에 6억원씩 모인다. 2009년 군대에 있으면서 ‘다시 사회에 나갔을 때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영화를 찍고 싶어서 한예종 영상원에 진학했는데, 결국은 충무로 입봉이라는 좁은 기회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른바 예술 한다는 친구들의 처지가 대개 비슷했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2006년에 입학했을 때 유튜브가 나왔는데, 내가 만든 걸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엄청난 채널이 생긴 거다. 또 그때 영화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몇 년 안에 필름이 사라지고 모두 디지털로 바뀔 거라고 하면 엄청 급진적인 주장이었는데, 내가 그 ‘급진파’였다(웃음). 그런데 제아무리 제작 환경과 기술이 변한다고 해도 결국 문제는 돈이더라. 단편영화 하나 찍는데도 최소 300만원에서 보통 1000만원까지 든다. 인터넷을 잘 활용하면 나 같은 아마추어나 학생도 자신의 작업을 미리 공개하고 후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미국의 킥스타터가 ‘한국화’된 건가?
비슷한 시기에 론칭되긴 했지만, 애초에 많은 게 차단돼 있는 군대에서 발전시킨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웃음). 물론 인디고고나 킥스타터 외에도 펀더블 같은 크라우드 펀딩 모델이 미국에서 작동한다는 것에는 분명 힌트를 얻었다. 미국에서도 크라우드 펀딩은 사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등 많은 물음표 속에서 시작됐다. 물론 당시 한국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텀블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누가 학생이나 모르는 사람의 창작물에 선뜻 돈을 내겠느냐는 의미였다. 게다가 2011년만 해도 한국에 ‘스타트업’이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활발히 쓰이지 않았고, 돈(투자)도 보수적으로 돌았다.

ⓒ시사IN 조남진 서울 서교동에 있는 텀블벅 사무실 모습. 텀블벅에서는 자유롭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위해 구성원들이 서로 반말을 한다.

창업 비용은 어느 정도 들었나?
1000만원. 사실 1000만원으로 회사 세우면 안 되긴 하는데(웃음). 영상원 재학 시절에 찍으라는 영화는 안 찍고 친구들을 상대로 카메라 장비 대여를 했다. 아버지가 준 등록금으로 그 당시 학교에서 쓰는 HD 카메라를 샀다. 그걸로 혼자 촬영 공부하다가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집에서는 난리가 나고. 학교 특성상 촬영을 많이 하는데 장비가 항상 부족했다. 학생들이다 보니 정규 촬영 때 못 찍는 분량이 생길 수밖에 없어서 보충 촬영이 필요한데, 카메라가 부족한 거다. 그래서 내 장비를 친구들에게 시중보다 싼 가격으로 렌트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또 다른 장비를 사고 나중에는 아예 카탈로그도 만들었다. ‘나한테 이런 장비가 있다’ ‘만져보게 해줄게’ 이러면서(웃음). 군대 안에서도 계속 렌털은 돌렸다. 제대한 뒤에 장비를 처분하고 이래저래 빼고 남은 돈이 창업 자금이 됐다.

텀블벅의 첫 프로젝트를 기억하나?
다 친구들 프로젝트였다. 애초 나와 내 친구들의 문제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명확한 고객이 있었다. 텀블벅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생 업체처럼 고객 확보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초창기에 서버를 날린 적이 있다고 들었다.
한국의 기성 IT 인프라를 믿지 않는 계기가 됐다. 우리 잘못이라기보다 업체 잘못이었는데, 3일치 데이터가 날아갔는데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더라. 디도스 공격을 당한 적도 있는데 무조건 서버를 내려버리는 식이다. 한국의 스타트업 인프라가 기술뿐 아니라 관행이나 태도에도 문제가 많다. 지금은 아마존 서버를 쓰는데 절대 그런 일이 안 생긴다(웃음).

2013년 소풍(sopoong:다음 창업자 이재웅씨가 만든 회사로, 벤처기업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의 투자를 받았다.
텀블벅을 계속 유지해야 하나, 해체해야 하나 고심했던 시점이기도 하다. 2011년 창업하고 2년 동안 텀블벅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 학생이었다. 나 역시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일하다 또 제적됐지만(웃음). 속된 말로 동아리 마인드로 회사를 굴렸는데, 애초에 사업으로 발전시킬 목적이 없었던 게 나중에 화근이 됐다. 그냥 우리는 이게 잘 되면 친구들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 거 같고, 용돈 정도 버는 걸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길지 몰랐다. 사용자들의 요구가 어떻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며, 어떻게 지속적으로 키워나갈 건지. 그렇게 갈피를 못 잡는 와중에도 텀블벅은 첫해 후원금 총액이 1억3000만원, 이듬해 4억8000만원, 그다음 해 15억원… 이런 식으로 매년 3~4배씩 성장하고 있고, 투자하겠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초기에 도와준 친구들은 유학을 가거나 본업으로 돌아갔고, 나는 점점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텀블벅의 본질은 크라우드 펀딩이 아니다. ‘창작’이다. 크리에이터를 위한 사회적 태도를 어떻게 만들 건가, 이들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열어줄 수 있는 유틸리티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텀블벅이 하는 일이 펀딩이 주된 것처럼 보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크리에이터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좀 더 쉽고 빠르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을 제공하는 일을 하려 한다.

ⓒ텀블벅 제공 텀블벅에서 펀딩에 성공한 창작물들. 작은 소녀상, ‘룩 앳 램프’, 일러스트 북 <맥주도감>(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

펀딩이 아닌 ‘창작’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에 인상적인 결과물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돈 안 되는 일이 때로는 삶을 구원하니까(웃음).
그게 텀블벅의 핵심이다. 창작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기회는 한정돼 있고, 불평등하다. 자본 조달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부 혜택받은 사람들만 예술이나 창작을 하는 건 아니잖나. 텀블벅 안에서는 돈 안 될 거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모르는’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내면서 기회를 주고 있다. 거창하지만, 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게 텀블벅이 하고 싶은 일이다.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은 접었나?
계속 생각은 하고 있는데 지금은 서비스를 만드는 일이 좀 더 좋은 것 같다. 영화랑 기업 운영이 유사한 부분이 많다. 재학 당시 이창동 감독에게 연출 수업을 들었는데, 두 가지가 기억난다. 첫 번째는 “캐스팅이 반이다”라는 말이다. 당연하고 진부한 말로 들리겠지만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채용하고 어떻게 같이 일할지 결정하는 게 절반 이상이다. 두 번째는 “연출의 최선은 망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잘하는 게 아니라 망치지 않는 것. 이런 서비스를 프로듀싱하는 것도 영화를 만드는 거랑 비슷한, 그 이상의 만족을 주는 것 같다.

지난해 네이버·DCM 등으로부터 17억원의 큰 투자를 받았다.
네이버 쪽과는 안면도 없었는데 텀블벅을 사랑스럽게 봐주셨던 것 같다. 당시 우리는 DCM과도 투자 관련 미팅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담당했던 파트너가 DCM 일본 사무소의 오스케 혼다 씨인데, 이분이 카카오톡 초기 투자로 홈런을 친 분이다. 5개월 정도 도쿄를 왔다 갔다 하며 피칭했고, 투자 결정이 났다. 카카오 수준으로 텀블벅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걱정은 되는데, 엄청 좋게 봐주셨다. 시기가 잘 맞물렸고 두 곳에서 함께 투자받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투자를 받고 나면 퍼포먼스에 대한 압박도 있을 텐데.
그만큼 투자에 대해서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20억원이든, 200억원이든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하면 크든 작든 압박을 받는다. 간접적으로 그런 사례를 많이 접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면 조직 문화에 끼치는 악영향도 있을 수밖에 없다. 네이버도 DCM도 텀블벅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텀블벅의 인적 구성은 어떻게 되나?
팀제로 구분돼 있지는 않은데, 디자인을 포함해서 개발팀으로 묶을 수 있는 사람이 반이 넘는다. 예술을 전공한 분도 있고, 사회학을 전공한 분도 있고 다양하다. 외국인도 있고. 근데 사실 엔지니어 쪽은 거의 외국에서 공부했던 분들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이나 MIT 등. 투자받을 때 그게 의외의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쟤네 뭔데 저런 인재들이 모여 있어?’ 물론 우리가 학력을 보고 사람을 뽑는 건 아니다.

조직 안에서 모두가 반말을 한다던데….
건강한 조직 문화가 뭘까,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같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모두가 반말을 하는 것도 일종의 실험이다. 서로 존댓말을 쓰는 기업도 있는데, 그걸로는 기본적인 수직 문화를 깰 수 없는 듯하다. 아무리 서로 존댓말을 써도 상사는 상사이고 직원은 직원이니까. 상사 입장에서 아랫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건 연장자의 아량 아닌가. 근데 반말로 말하기 시작하면 이런 부분이 재미있게 깨진다. ‘야자타임’ 같은 거다. 직원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상사는 문제가 생긴다. 이런 균열이 훨씬 역동적이고 예상치 못한 생기를 주는 것 같다. 반말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별개라는 건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경력자들, 다른 기업의 수직적인 구조에서 인정받았던 분들은 이 문화를 못 견뎌하는 게 있더라. 예를 들면 자기보다 11살 어린 사람이 자기가 쓴 글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을 때 못 견디는 식이다. 우리 문화에서는 그 사람이 겉돌기 쉽다.

투자를 받은 가장 큰 이유가 인력 때문이라고 들었다.
투자자들한테 한 소리씩 듣는 게, 왜 돈이 생겼는데 ‘채용을 소극적으로 하느냐’다. 하지만 채용을 소극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지난해 8월부터 인터뷰한 사람만 250명이 넘는다. 개발팀으로 좁혀보면 140명을 봤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더 신중해지는 거 같다.

업무가 과중하지는 않은가?
답은 자동화에 있다. 우리가 엔지니어를 많이 뽑고 테크놀로지 쪽을 강화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다. 결제 같은 건 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구축한 자동화 시스템 아래서 굴러간다. 경쟁사가 정산이나 펀딩 컨트롤 등을 상당 부분 사람에게 의존하는데, 텀블벅에는 그런 담당자가 따로 없다.

후원(결제)이 편리했는데, 텀블벅만의 시스템인 줄은 몰랐다.
우리가 전략적 선택을 잘했던 게 이 부분이다. 초창기 텀블벅이 가장 큰 도전 과제로 여겼던 게 결제 시스템이었다. 무조건 쉬워야 했다. 오히려 내가 신기했던 건 ‘경쟁사들이 왜 이 점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가’였다. 그냥 기존의 시스템을 받아들여서 구축하는 식이다. 내가 인터넷에서 바지나 신발을 산다고 하면 액티브엑스가 뜨고 귀찮아도 욕하면서 산다. 근데 누구를 후원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 되면 중단한다.

요즘 나오는 간편 결제를 최초로 시도했다고 보면 되나?
그것보다 훨씬 쉽다. 온갖 관련 조항을 뒤져서 법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위험하다 싶을 만큼 대담한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논쟁도 심했는데 어디서 무슨 결제 관련 사고가 터지면 우리랑 상관없는데도 금융감독원이 압박해오기도 한다(웃음). 다 버텨냈다.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의 젊은 리더답다.
후보에 선정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청 바쁠 때여서 사진을 대충 보낸 게 후회된다. 독립운동하다가 수감된 사람처럼 까칠하게 나온 사진이다(웃음). 별다른 감흥은 없다. 외부 PR 에 도움이 되려나? 아, 한 가지 좋았던 게 있다. 1988년생이라 스물아홉 살인데, <포브스> 홈페이지 소개될 때는 외국 나이로 치니까 스물여덟 살로 나오더라(웃음).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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