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서울 곳곳에서 희망을 짓는다. 이 ‘농사’가 흉년일지, 풍년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헬조선에서 버티기 위해 청년과 청년이, 청년과 지자체가 손을 잡았다. 활동도 성과도 아직까지는 모호하고 막연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지금도 묵묵히 판을 깔고 있다. 이들이 만들어낸 ‘청년 성지’ 네 곳을 둘러봤다. 청년들이 일궈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의 서울혁신파크는 기괴한 동거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한쪽엔 민주노총 서울본부가 있고 다른 쪽엔 대한민국특수유공자회가 있다.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두 단체 사이에 재활용 장난감 백화점 ‘금자동이’가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년정책을 대변하는 ‘청년청’도 보인다.

서울혁신파크의 부지는 원래 국립보건원 질병관리본부가 있던 곳이다. 질병관리본부 시설들을 충북 오송의 보건의료행정타운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뒤, 부지의 용도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전임 이명박·오세훈 서울시장은 고급 호텔과 대형 컨벤션센터를 지어 ‘강북의 코엑스(COEX) 및 마이스(MICE) 산업(회의·전시·컨벤션 등 행사 관련 산업)의 성지’로 육성하겠다고 공약했다. 지금도 지역 정치인들은 선거 때가 되면 이런 주장을 편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은 이 부지를 사회 혁신 클러스터로 육성하고 있다. 서울시의 청년 지원 기관인 청년일자리허브(청년허브), 사회적경제지원센터,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등도 혁신파크에 입주해 있다.

청년단체 57개가 입주해 있는 청년청은 청년허브가 지난해 9월 조성한 공간이다. 사회 혁신을 도모하는 청년단체에 사무실과 다양한 공유 공간을 제공한다. 혁신파크 시설 중에서도 박원순 시장이 가장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곳이다. 청년들 스스로 생태계를 만들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청에 입주한 활동가들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활동은 모호하고 성과도 막연하다. 맨 먼저 드는 의문은 ‘돈이 되느냐?’이다.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성과 목표’를 제시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청년청을 이해할 수 없다.

관광 약자인 장애인의 여행을 활성화하기 위해 장애인여행문화연구소를 운영 중인 홍서윤 소장이 청년청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면 이곳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홍 소장의 사무실은 청년청 1층에 있다. 원래 2층과 3층이 사무실 공간이지만 장애인인 홍 소장을 위해 1층 공간을 내주었다. 사무실은 서울 골목투어를 기획하는 ‘밝히는고래’의 김형준 대표와 절반씩 나눠 쓴다. 한 달에 10만원 정도면 임차료와 관리비가 해결된다.

각종 단체의 집단 지성이 ‘일’을 만들다

지난 3월29일 홍 소장은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장애인 여행 토크콘서트-여행 떠나자’를 개최했다. ‘어떻게 하면 장애인들이 여행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느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막연하게 기획한 행사였는데, 일단 시작하자 걱정하던 일들이 술술 풀렸다. 청년청의 다른 활동가들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특히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공연(소셜 시어터)’을 준비 중인 ‘숨비’의 김은영 대표가 콘서트 기획을 맡아주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청년일자리허브 제공〈/font〉〈/div〉3월17일 청년청을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가운데). 청년청은 박 시장의 청년정책을 대변하는 장소다.

홍 소장의 다음 기획은 ‘장애인 캠핑’이었다. 역시 막연했다. 비장애인도 쉽지 않은 캠핑을 장애인들끼리 가려고 하니 걸림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캠핑용품을 저렴하게 대여해주는 곳을 알아낸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청년청의 ‘집단 지성’이 발휘됐다.

혁신파크 야외 공간 활성화 담당인 서울혁신센터 시민참여팀 조수빈 팀장이 장소 물색에 나섰다. 대학 조리학과에서 바비큐학을 가르치는 차영기 대한아웃도어바비큐협회 회장이 조리를 맡았다. 사회적 기업 여행문화학교산책을 운영하는 여성 산악인 이상은 대장이 캠핑을 지도했다. 소년원과 구치소에 수감된 청소년들에게 바리스타 교육을 해주는 사회적 기업 ‘자리’의 신바다 대표는 커피와 음료를 준비해주었다. 사무실을 나눠 쓰는 ‘밝히는고래’ 김형준씨는 특유의 입담을 발휘해 행사 사회를 봤다.

실제로 캠핑을 갔을 때도 청년청의 다른 활동가들이 특기를 발휘했다. 청년 문제 관련 공연을 기획하는 ‘내가 여기 잇-다’의 정임한수 대표가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혁신디스코장’을 열었다. 캠퍼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의외로 어울렸다.

‘내가 여기 잇-다’의 정임한수 대표는 청년청에 애정이 많다. 구체적 사업 계획이 아닌 가능성만 보고 자신들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 사회는 청년들에게 ‘도전하라’고 충동질한다. 그러나 정작 뭔가 하겠다고 나서면 ‘무엇을 할 수 있냐’라고 추궁한다. 우리의 아이디어는, 청년들이 가진 불안을 넓고 깊게 들여다보고 엮어내는 작업이다. 구체적이고 세세한 계획을 작성해서 내놓을 수 있는 종류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그런데도 청년청은 우리를 믿고 공간도 내주었다.”

다른 청년 지원 기관들과 차별화되는 청년청 특유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다수 청년 지원 기관들은 지원 조건으로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라고 한다. 또한 지원받은 청년 단체들이 이런 목표를 잘 달성해 ‘스타’를 배출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목표를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었지만, 청년허브가 지원한 단체 중엔 이미 큰 성과를 올린 곳도 많다. ‘피자 30분 배달제 폐지’ ‘열정 페이’ 문제를 공론화한 ‘청년유니온’, 서울시내 고시원의 평당 임대료가 강남 타워팰리스보다 더 높다는 ‘방값 역전 현상’ 문제를 고발한 ‘민달팽이유니온’ 등이다. 청년허브는 다년간의 청년 지원 사업을 통해 목표를 과도하게 제시하면서 ‘쪼아’대면 오히려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4월12일 청년청에서 캠핑 전문가들이 장애인들에게 텐트 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장애인여행문화연구소의 캠핑장에 마스크를 쓰고 갑자기 찾아든 ‘노들유령’도 그런 단체였다. 노들유령은 노들섬 텃밭에서 농사를 짓다가 만난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이 단체의 목표는 노들섬 보존이나 특정 방식의 개발을 요구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노들섬이 어떤 곳이었는데 어떤 식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관찰’을 목표로 삼고 있다.

노들유령들은 탈을 쓰고 활동한다. 성격이 소극적인 사람이 많아서 그렇게 한단다. 노들유령의 활동가 똘빈씨는 “우리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로 탈을 쓰고 활동한다. 우리는 탈 뒤에서 조금 더 대담해진다. 탈을 쓰고 노들섬 이곳저곳을 관찰하고 개발 계획을 살핀다. 우리 주장을 관철하려는 활동이 아니다. 그냥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관찰은 돈이 되지 않는다. 생계는 각자 알아서 해결한다. 노들유령 사무실에서 ‘야매타로’라는 이름으로 생계형 타로점을 봐주기도 한다. 똘빈은 청년청에서 스태프로 일한다.

공간 설계에서 묻어나는 자율성의 가치

청년허브가 운영하는 ‘청년학교’에도 특유의 철학이 스며들어 있다. 청년학교 출신인 청년청 활동가는 “청년학교는 (학생들에게)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기보다 자율성을 줬다. 그러니까 오히려 깨달음이 왔다. ‘뻘짓’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면 나도 뭔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라고 말했다. 청년허브는 청년학교 외에 사회혁신 청년활동가 양성사업인 ‘내-일 박람회’ 등을 연다. 여기서 배출된 청년들이 청년청에서 일하기도 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노들섬 텃밭에서 농사를 짓다가 만난 사람들이 모인 노들유령(위)은 노들섬 관찰을 단체의 목표로 삼았다.

청년허브는 자율성뿐 아니라 ‘어울림’에도 큰 가치를 부여한다. 서로 만나서 어울리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청년청 입주 공간의 설계에서부터 이런 철학이 드러난다.

청년청의 입주 공간은 총 4개의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 3층이 중앙계단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누어진 형태다. 각각의 블록에 있는 단체들은 자연스럽게 소그룹을 이룬다. 복도에 소파와 책장을 배치해 소통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숙박을 하는 활동가들도 많아서 자연스럽게 생활공동체가 되었다.

이 실험적 공간이 자연스럽게 사회적 경제의 실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강신호 대안에너지기술연구소 소장은 대안 에너지를 이용해 화분의 식물을 가꾸고 수조의 물고기를 기르는 시설을 청년청 외벽에 설치했다.

청년청에는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알까기 대회’라든지, 함께 아침밥을 먹는 ‘조찬 클럽’도 열심히 활동 중이다. 뜨개질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뜨개질 미팅’도 있다. ‘불광동탐험대’는 서울혁신파크 주변을 누비며 지역 조사를 하고 맛집 지도를 그린다.

청년청의 운영 규칙은 입주 활동가들이 같이 정한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 반상회를 열어서 자치 규약을 결정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운영 매뉴얼’이 하나씩 만들어진다. 고양이를 기르고 싶은 사람은 다른 입주자들의 양해를 얻어 물품보관실에 고양이집을 따로 꾸몄다. 복도마다 ‘분리수거 꿀팁’을 만들어 붙인 입주자도 있다.

청년청 생태계를 조성할 때 청년허브는 기본 플랫폼만 깔아주었다. ‘청년청을 같이 만들어나간다’는 의미로, 입주 활동가들의 공모를 받아 필요한 내부 시설을 결정하고 직접 집행하도록 한다. 가장 두각을 드러낸 단체는 폐자재를 활용해 시설을 만드는 공방인 ‘수산업’팀이었다. 이처럼 입주자들이 직접 자신들의 필요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 역시 청년청의 독특한 제도다. 다른 청년 지원 기관들의 경우, 기관 측이 입주자들의 수요를 예측하고 미리 설치해버리기 때문이다.

청년은 이곳에서 어떤 미래를 열 수 있을까? 장애인여행문화연구소 홍서윤 소장의 사례에서 앞날을 짐작할 수 있다. 장애인 여행 토크콘서트와 장애인 캠핑을 성공적으로 마친 홍 소장은 자신감을 얻었다. 앞으로 장애인들의 제주도 여행을 위해 코스를 개발하며 가이드북도 제작할 예정이다. 어떤 프로젝트든 청년청의 친구들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청년허브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청년허브 지금 모집 중이죠? 전통 사찰 공유 프로젝트에 대해 모임을 갖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1인 기업이라 함께할 청년도 필요하고 얘기를 해줄 분들도 필요해요”라는 신청 문의가 올라와 있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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