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3일은 20대 총선일이었다. 97년 전 이날 역시 중요한 선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에서 치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였다. 1919년 4월13일 상하이에 독립지사 1000여 명이 모여 조선 8도와 러시아·미국·중국령을 대표하는 33명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를 선출했다. 이 때문에 뉴라이트 인사들이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이라고 우기기 전에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에 따라 수립됐다’는 헌법 전문의 정신이 상식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당시 독립운동가 포양 장병준.

당대의 사람들 생각은 어땠을까. 이를 엿볼 만한 책이 최근에 나왔다. 전남 신안군 장산도 출신 독립운동가 포양 장병준 평전이다(〈장병준 평전〉 박남일 지음, 선인 펴냄). 포양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18일 장산도 시위를 주도하고 서울에 올라와 나중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모태가 되는 대한국민대회 및 한성정부 수립에 관여한 뒤,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전라도 대표 4인 중 한 명이 된 인물이다.

그동안 포양에 대해서는 장산도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그 형제들이 우당 이회영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존경을 받은 정도로 알려졌을 뿐, 자세한 활동 내용은 알기 어려웠다. 그러다 2013년 12월 당시 목포대 이기훈 교수가 〈장병준의 생애와 민족운동〉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포양의 독립운동 동지들에 대한 일제의 심문조서 등을 교차 연구해, 그가 상하이 임시정부(상해 임정)에 의해 파견돼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단체들을 임시정부 산하로 통합해내고, 국내 독립운동 단체와 임정을 연결하고 조직화화는 작업을 비밀리에 수행한 정황이 드러났다. 박남일 작가는 약 10여 년에 걸친 조사와 이기훈 교수 논문에서 밝혀진 사실을 결합해 그의 활약상을 되살려냈다.

눈여겨볼 대목은 포양이 동지들과 국내로 잠입해 1920년 3월1일을 ‘대한독립 1주년 기념일’로 명명하고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유인물 내용이다. ‘대한독립 일주년 축하경고문’이라는 제목과 그 핵심 내용 중 1920년 3월1일을 ‘건국의 기념일’이라고 정의한 대목이 눈에 띈다. 1919년 3월1일을 기해 ‘독립과 동시에 건국’이 이뤄졌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상해 임정은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임의단체가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엄연한 정부였다는 얘기다. 상해 임정의 수립과 더불어 건국이 이뤄진 것이므로 그 수립일인 4월13일이야말로 건국절인 셈이다.

대일전까지 염두에 둔 치열한 건국 운동

국민주권에 따른 정부 수립 논의는 1917년 신규식·신채호·박은식 등의 ‘대동단결선언’에서 이미 이론과 방향이 제시된다. 박남일 작가는 3·1운동이야말로 건국과 정부 수립을 위해 그 주체인 국민의 실체를 확인하고 드러내기 위해 기획된 행사였다고 지적한다. 3·1운동 직후 13도 대표자 대회(대한국민대회)와 한성정부 선포(4월23일)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동시에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실체를 구성하기 위한 임시의정원이 선출된 후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의와 통합돼가는 과정을 보면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건국과 정부 수립에 대한 의견 일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병준의 자세한 활동 내역을 다룬 <장병준 평전>이 출간됐다.

이기훈 교수는 그 이유를 1차 대전 직후 승전국 사이의 패권 다툼 속에서 불거진 미·일 전쟁론에서 찾는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이 경우 우리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여하려면 국가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라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급부상했다는 것이다. 상해 임정 수립은 이처럼 대일전까지 염두에 둔 치열한 건국운동이었던 셈이다. 또한 상해 임정과 국내외 활동가들 사이의 연결고리였던 장병준 선생의 평전은 그 자체가 상해 임정의 살아 있는 역사 중 일부라 할 것이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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