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이 출판업자이니 살짝 홍보 삼아 말하자면, 출판사를 차리고서 첫 책으로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의 필자인 서경식은 첫 글에서 ‘서재’라는 단어에 대한 망설임을 밝힌다. 이 말에서 집에 서재를 둘 만한 이들의 부르주아적인 감각을 느낀 것이다.

사실 내 서재 혹은 범주를 좁혀서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대부분 나만이 향유할 수 있다. 이런 책들을 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서경식의 지적처럼 분명히 어떤 여유 혹은 부유함의 표식일 수 있다.

그렇다면 도서관은 어떤 곳일까? 도서관은 내 서재가 아니라 이용자들의 서재다. 그리고 그곳의 책들 역시 내 책이 아니라 우리의 책이다. 내 책이라면 그걸 냄비 받침으로 써서 책 표지에 누런 자국이 남든 빨간펜·파란펜으로 책에 온갖 메모를 하든 내 자유지만, 우리의 책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책에 몇 페이지가 사라져 있어요!” “책이 너무 더러워요!” 사서들이 종종 시달리는 이용자들의 항의다. 도서관 책이 낡았거나 이용자들이 남긴 ‘생활 자국’이 있는 정도는 용인되지만, 어떤 한계를 넘어선 책들을 보게 되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함께 쓰는 물건이니 다른 사람 생각해서 깨끗하게 쓰자, 이것은 뻔한 말이지만 진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도덕 교과서 같을 테니, 좀 더 세심하게 상황을 들여다보자. 내 주변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용자로서 참을 수 없는 한계치에도 각자의 편차가 있다.

ⓒ임윤희 제공언젠가 빌린 도서관의 책 면지에 위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면

까다로운 성격의 깔끔쟁이 내 친구는 희망 도서를 신청한 후 그 책의 첫 대출자가 되는 방식으로만 주로 도서관을 이용한다. 그렇게 빌린 새 책은 많은 서점에서 독자들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책들과 똑같은 새 물건이니, 책을 읽는 사람 처지에서는 반납의 유무에만 차이가 날 뿐 마치 새 옷을 입은 기분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보다 낮은 수위에서의 한계치는 주로 책에 그어진 밑줄 논쟁으로 나타난다. 너무 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밑줄을 통해 생각의 흔적을 볼 수 있어서 나름 재미있다는 너그러운 이용자도 있지만, 반면 밑줄 때문에 도서관 책을 못 빌려 보겠다는 열혈 밑줄 반대주의자도 있는 법이다.

내 친구의 깔끔함은 극도로 심한 편이고 밑줄 역시 특정 이용자가 벌인 적극적인 행태이니, 좀 더 수위를 낮춰보자. 누구나 가끔 책을 읽다가 커피도 흘리고 종이에 손을 베어 책에 피를 묻히기도 한다. 그 책이 내 책이라면 내 마음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도서관 책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새가슴 이용자라면 이걸 어째야 하나 하는 고민으로도 이어진다.

언젠가 빌린 도서관의 책 면지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 있었다. “39페이지에 피가 조금 묻었습니다. 화이트로 응급처치했는데 더 흉해져서 걱정되는 마음에 쪽지 남깁니다. 혹시 보시는 데 불편하거나 이건 좀 아니다 싶으시면, 카운터에 가서 말씀해주시고 070-XXXX-XXXX로 연락주세요. 다시 구매해서 가져다 놓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메모를 보고서, 하마터면 그 번호로 문자를 보낼 뻔했다. “메모 잘 봤습니다. 오히려 이 메모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었어요. 언제 저랑 도서관에서 자판기 커피나 한잔 하실래요?”

나는 이분 덕에 좀 배웠다. 도서관 책을 깨끗하게 이용해야 한다는 교육도 필요하겠지만, 내가 실수했을 때 어떻게 미안함을 표현하고 대처해야 하는지 익히는 것 역시 필요하니까. 우리의 서재, 즉 도서관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잘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한 이용자가 책에 흘린 피와 그 때문에 남긴 메모에서 내가 얻은, 피가 되고 살이 된 교훈이다.

기자명 임윤희 (도서출판 나무연필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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