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파괴하고 죽여버리는 데 열중하는 조커(위)는 완벽한 광기와 혼돈의 상징이다.

지난 7월18일 북미에서 개봉한 〈다크 나이트〉는 사흘 동안 무려 1억8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신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한다. 단지 흥행기록만이 아니다. 각종 매체의 비평에서도 찬사 일색이고, 세계 최대 영화 정보 사이트인 IMDB에서도 역대 1위였던 〈대부〉를 누르고 최고 평점을 기록했다. 〈배트맨〉의 팀 버턴을 시작으로 〈엑스맨〉의 브라이언 싱어와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가 슈퍼히어로 영화, 코믹스 영화의 수준을 한 계단 높여놓기는 했지만 〈다크 나이트〉의 엄청난 성공은 어리둥절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코믹스 영화라는 장르가 갱스터, 필름 누아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슈퍼히어로, 그 중에서도 배트맨은 팀 버턴과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명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왜 사람들은 ‘배트맨’에 열광하는 것일까? 1930년대에 시작된 〈배트맨〉은 가장 현실적인 슈퍼히어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슈퍼맨이나 엑스맨 등은 초월적 능력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배트맨은 다르다. 그는 악당에게 부모를 잃었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의 악을 없애는 슈퍼히어로가 되었다. 수많은 무술을 익히고 강력한 무기를 장착한 배트맨은, 국가권력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악을 스스로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자경단’이다. 경찰이 세상의 모든 악을 없애지는 않는다. 권력이 정해놓은 법질서의 바깥에서 암약하거나 슬쩍 빠져나가 버리는 악이 너무나도 많다. 경찰이나 검찰이 부패한 경우도 있고, 법의 한계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우리는 배트맨을 원하게 된다. 나에게 힘만 있다면, 당장 거리에 나서 악당을 처단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영화 제목에서 ‘배트맨’을 뺀 까닭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의를 위한 것인지, 그런 행동으로 과연 완전한 정의가 도래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박쥐 가면을 뒤집어쓰고 거리에 나선 순간부터, 배트맨은 고뇌할 수밖에 없다. 왜 경찰이나 검찰에게 맡기지 않고, 배트맨은 스스로 정의의 수호자가 된 것일까? 만약 그가 정당하다면, 왜 그는 가면을 쓰는 것일까? 어쩌면 배트맨은 단지 사적인 복수를 위해, 아니 부모를 죽인 악당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해소하기 위해 악당을 물리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아닐까?

〈다크 나이트〉의 배경인 고담 시에서도 유사한 의문이 제기된다. 배트맨이 악당을 잡기는 하지만, 똑같이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점은 어떻게 볼 것인가? 단지 정의를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위법을 용납할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크 나이트’라는 제목이다. 〈배트맨〉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과 로빈〉 〈배트맨 비긴즈〉로 대중에게 이미 익숙해진 ‘배트맨’을 버리고 왜 〈다크 나이트〉라고 했을까? 그 이유는 1986년에 발간된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 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배트맨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우는 어둠의 전사가 된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하며, 철학과 정치 논쟁을 일으킨 기념비적 작품이다. 최근 국내에도 출간된 앨런 무어의 〈왓치맨〉과 함께, 코믹스라고 불리던 미국 만화를 성인의 ‘그래픽 노블’로 끌어올린 걸작이다.

‘다크 나이트’는 어둠의 기사, 밤의 기사라는 뜻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은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를 ‘화이트 나이트’라고 부른다. 하비 덴트는 고담 시의 악당 절반을 감옥에 집어넣고, 조커를 잡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건다. 배트맨은, 자기가 아니라 하비 덴트가 시민의 영웅, 고담 시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비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배트맨은 무엇이든 한다. 하지만 ‘화이트 나이트’는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혼돈과 악의 화신인 조커에 의해, 그의 내면에 있던 광기가 분출하며 새로운 악당 ‘투 페이스’가 되어버린다.

투 페이스는 어쩌면, 배트맨과 조커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커는 완벽한 광기와 혼돈의 상징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돈에도 욕심이 없고, 권력에도 욕심이 없다. 단지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죽여버리는 데만 열중한다. 그런 조커가 배트맨에게 말한다. 절대로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너와 노는 것이 가장 신나기 때문에. 네가 있어야만 내가 완성된다고. 그 말의 의미는, 조커의 극단에 배트맨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 조커와 달리, 배트맨은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자경단’이지만, 배트맨은 결코 선을 넘지 못한다. 누구도 죽이지 않고, 무엇도 파괴할 수 없다. 배트맨은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한다. 다만 법 테두리 안에서만 활동하면 제대로 악을 처단할 수 없기에, 스스로 세간의 비난을 받으며 묵묵하게 정의를 수호하는 ‘다크 나이트’를 자임하는 것이다.
 

〈배트맨:허쉬〉(위)는 심오한 캐릭터로 다듬어진 배트맨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슈퍼히어로 영화가 뭔지 보여주다

〈배트맨 비긴즈〉에 이어 〈다크 나이트〉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액션이나 스펙터클은 물론 최고다. 그리고 슈퍼히어로라는 비현실적인 존재가 사실은 대중의 이상이며 현대의 신화에 비견될 존재임을 탁월하게 증명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단지 크리스토퍼 놀란의 재능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물론 최근 출간된 제프 로브와 짐 리의 〈배트맨:허쉬〉와 조지 프랫의 〈배트맨:악마의 십자가〉를 보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수십 년 세월 동안 엄청난 세공과 실험적인 변주를 거치며 다듬어져온 과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배트맨:허쉬〉는 배트맨의 모든 조연과 악당 캐릭터는 물론 슈퍼맨까지 등장해 심오한 캐릭터로 다듬어진 배트맨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런 ‘그래픽 노블’의 성과가 있었기에, 팀 버턴의 〈배트맨〉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가 존재할 수 있었다.

기자명 김봉석 (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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