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은 스위스에 가서 죽는다. 노인 돌보는 법에 대한 책을 두 권이나 집필한 영국의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질 패로(75)도 그랬다. 일터에서 수많은 노인들을 보면서 안락사를 계획했던 그녀는 죽기 직전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늙는 것이 끔찍하다” “앞으로 더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보행기로 길을 막는 늙은이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올해 7월 자녀들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안락사가 허용된 스위스로 향했다. 라인 강변에서 남편과 마지막 만찬을 즐긴 그녀는 스위스의 한 안락사 지원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인 M. 스콧 펙은 〈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율리시즈, 2013)에서 ‘유사 안락사’와 ‘진정한 안락사’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유사 안락사는 치료될 희망이 없는, 노령 또는 만성적 활동 불능성 질병에 처한 경우”에 행해진다. 이런 안락사가 지은이로부터 진실되지 못한 것으로 지탄받는 이유는, 유사 안락사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동기인 ‘삶의 질’이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란 각 개인이 처해 있는 환경이나 스스로 설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그런 추정을 근거로 안락사가 변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지영 그림

반면 지은이가 옹호하는 진정한 안락사는 “현재 앓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적인 죽음에 처한 경우”에 선택된다. 이 경우의 기준은 삶의 질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인공호흡기와 같은 과도한 의료 조처를 통해서만 간신히 생명이 유지되는 환자에게는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 매우 중요한 여느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주장에도 난점은 있다. 먼저 의학적 치료에서 일반적인 경우, 과도한 경우, 지나치게 과도한 경우를 둘러싸고 결정이 애매모호해지는 거대한 중간 지대가 생겨날 수 있다. 또 생명은 있으나 의식이 없는 환자를 제3자가 대신해서 안락사를 결정해야 할 때도 있다. 두 문제에 대한 지은이의 견해는 환자의 결정을 존중할 것과 생전 유서(living wills)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모호함의 중간 지대에서 나는 대체로 환자가 자기 의사를 밝힌 경우 이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 아내 릴리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생명의향서를 미리 작성했다. 우리가 만약 의식이 없거나 말을 못하게 되었을 경우 생명에 관한 자신의 권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우리 부부는 나중에 우리가 ‘식물인간’이 되더라도 지금까지 인간의 생명을 대폭 연장시킨 현대 의술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면서까지 우리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바람을 적법한 문자로 표현해왔다.”

M. 스콧 펙이 제시한 기준을 충실히 받든다면, 인터뷰와 자신의 블로그에 “늙는 것이 끔찍”하고 “쓸모”가 없어서 스위스행을 택한 질 패로는 유사 안락사를 행한 것이 된다. 지은이의 눈에 질 패로의 안락사는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져 다시는 예전의 활력을 만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결행된, 삶으로부터의 도피로 보일 것이다. “누군가 노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안락사를 선택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는 결국 영혼의 성장과 학습의 기회를 차단하는 일이다. 안락사를 선택함으로써 바로 인간 존재의 의미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습니다"

〈생명의 지배 영역: 낙태, 안락사 그리고 개인의 자유〉로널드 드워킨 지음 박경신·김지미 옮김로도스 펴냄

진정한 안락사와 유사 안락사를 구분했다면, 이제 ‘소극적 안락사’와 ‘적극적 안락사’를 고민할 차례다. 토니 호프의 〈안락사는 살인인가〉(한겨레출판, 2011)에 따르면 소극적 안락사는 식물인간이 된 환자에게 수명 연장 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환자에게 가장 이로운 결정이며, 환자의 요청과 일치할 때 영국 법률은 그것을 허용한다. 소극적 안락사의 핵심이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면,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의사가 직접 독극물을 주사하거나 의사가 환자에게 자살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질 패로가 스위스로 갔던 까닭은 ‘의사 조력 자살’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하는 이것이 영국에서는 아직 불법이기 때문이다. 현재 스위스(1942)·네덜란드(2001)·벨기에(2002)·룩셈부르크(2009)가 의사 조력에 의한 안락사를 법률로 보장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오리건·몬태나·뉴멕시코·워싱턴·버몬트 주에 이어, 이번 달에 캘리포니아 주가 여섯 번째로 적극적 안락사에 가까운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law)을 통과시켰다.

로널드 드워킨의 〈생명의 지배 영역:낙태, 안락사 그리고 개인의 자유〉(로도스, 2014)는 현재까지 나온 안락사 논의 가운데 가장 급본적(急本的·radical)인 내용을 담고 있다. 법철학자이며 변호사이기도 한 지은이는 소극적 안락사와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구분 자체를 편의적이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런 구절을 보라. “미국법상 치료를 받지 못하면 죽는 경우에도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된 후에 이들의 요구에 따라 연결을 중단시키도록 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죽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애초부터 생명 유지 장치를 거부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고, 일단 그것을 부착한 다음에는 환자나 보호자의 어떠한 거부 의사도 합법이 되지 못한다. 안락사 반대론자들은 과연 이 두 차이를 정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M. 스콧 펙과 로널드 드워킨은 유사 안락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동지이지만, 전자가 의사 조력 자살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과 달리 후자는 그것을 지지한다. 로널드 드워킨은 생명의 신성성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적극적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도리어 “생명의 신성성을 지키려는 환자를 파괴하는 혐오스러운 독재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해냄, 2009)는 현대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고 죽음이 소멸될 때 어떤 디스토피아가 도래할지에 대한 희극적인 보고서다. 작중의 가상 국가에서 갑자기 죽음이 사라지자, 비활동인구 대비 활동인구가 계속 감소하면서 국가는 파산을 맞게 된다. 결국 이 가상의 나라는 “우리가 다시 죽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라는 전 국민적 결의에 이르게 된다. 이 풍자소설은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국가가 안락사를 법제화하게 된다면, 고령화로 인한 연금 고갈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암시해준다. M. 스콧 펙은 안락사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와 법 개정이 미국 독립선언서와 같은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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