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대학 내 학생 기자들에게 일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진 한 해였다. 대학 공동체는 선진화·효율화라는 이름 아래 거대한 취업준비소가 되었다. 청년들은 비정규 노동의 늪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두가 묵묵히 땅을 보고 걷는 캠퍼스 안에서 가까스로 서로에게 ‘안녕’을 묻고 답하는 이들이 있다.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대학생 당사자이자 대학 사회를 제3자의 눈으로 보고 기록하는 저널리스트로서, 제6회 〈시사IN〉 대학기자상에 응모한 학생 기자들의 이야기는 진하고 깊었다. 그 가운데 선정된 5팀의 수상작은 대학의 현실과 우리 사회에 돌직구 질문을 날린다.

 

 대상  단국대학교 〈단대신문〉 김상천·신수용·최형균 기자 ‘대자보, 그 후’

2013년 끝자락, 대학가에서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불던 때 단국대에도 게시판 벽면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안녕을 묻는 대자보가 많이 붙었다. 〈단대신문〉 기자들은 적잖이 놀랐다. 매주 한 번씩 학내외에 일어나는 일들을 신문으로 알려도 반응이 없던 학우들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자보들을 읽어보니 이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학점 따기와 취업 준비에 바빠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 부당한 일에 분노를, 그것에 침묵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대신문〉은 당시 방학 중이라 신문을 내지 않던 시기. 신수용(법학과·27), 김상천(영문학과·29·현 슬로그업 공동대표), 최형균(정치외교학과·25) 기자는 개강 이후 이런 대자보 열풍에 관해 꼭 한번 다뤄보자고 뜻을 모았다.

개강 이후 ‘안녕들’ 대자보 열기는 확 식었다. ‘미성숙한 대학생들의 치기 어린 징징거림’ 혹은 ‘거대한 변혁을 위해 일어선 대학생들의 궐기’로, 각자 자기 프레임에 따라 대자보 열풍을 분석하며 흥분하던 기성 언론의 관심도 일찌감치 꺼졌다. 세 학생 기자가 완성한 기획 기사 제목은 그래서 ‘대자보, 그 후’이다. 한때 빽빽이 대자보가 붙었던 수도권 대학 내 게시판들을 일일이 찾아 상황을 확인하고, 그 앞을 지나는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여러 ‘안녕들’ 네트워크를 찾아 인터뷰하고 대자보 열풍이 문화계, 학계, 마케팅 시장 등에 끼친 영향을 분석했다. 비슷한 시기 해외에서 벌어진 청년 운동도 조사했다. 다각도로 들여다본 대자보 열풍을 6주에 걸쳐 연재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대상을 받은 〈단대신문〉 최형균, 신수용, 김상천 기자(왼쪽부터)는 ‘안녕들’ 대자보 열풍을 6주에 걸쳐 다각도로 다뤘다.

이들은 무엇보다 ‘안녕들’ 열기가 갑자기 식은 원인에 주목했다. 그것이 대자보 열풍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대신문〉 세 기자는 ‘안녕들’ 페이스북 페이지에 날짜별로 누적된 ‘좋아요’ ‘댓글’ ‘공유’ 통계를 분석해 여론이 반전되는 순간을 찾아냈다. 바로 2013년 12월17~18일, ‘안녕들’ 대자보의 최초 필자 주현우씨의 노동당 당적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였다. 대학생들의 진솔한 감정이 오가던 소통과 공감의 장이 이념 논쟁 프레임 속으로 들어간 순간 서로에게 ‘안녕’을 묻던 학생들은 입을 닫아버렸다. ‘무엇도 되지 않길 바라는’ 쪽과 ‘무엇이 되어주길 바라는’ 쪽의 기대 어느 것에도 부응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세 기자는 분석했다.

몇 주 전에도 학교 버스 정류장에 한 성소수자 학생이 쓴 대자보가 붙었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누군가 그것을 찢어놓았지만 다른 한 학생이 그것을 테이프로 붙인 다음 “힘내세요”라는 쪽지를 붙여놓았단다. 기사를 마감한 지 9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 ‘대자보, 그 후’를 되짚어볼 때 세 기자는 그것이 ‘미완’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 기자는 “가까이에서 같이 공부하지만 서로 분절돼 있던 학생들이 대자보 열풍을 겪으면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비슷한 걸 느끼는구나’ ‘내가 이야기하는 걸 분명히 누군가 듣고 있구나’ 같은 확신을 얻게 됐다. 미미하지만 아주 큰 변화이고 힘이다”라고 말했다.

 학내 취재 보도상  중앙대학교 교지 〈중앙문화〉 이찬민·표석 기자 ‘화려한 캠퍼스의 어두운 단면’

기획의 출발은 단순했다. 〈중앙문화〉 이찬민 기자(사회학과·21)가 보기에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는 비좁았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항상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 계단에도 학생들이 북적여 서로 몸을 부딪치며 오르내리는 지경이다.

입학할 때 즈음 언뜻 들었던 ‘신(新)캠퍼스 건립’ 얘기가 떠올랐다. 학교가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권 도시 어딘가에 새 캠퍼스를 짓겠다고 한 내용이었다. 신캠퍼스가 완공된다면 공간 부족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자료 수집에 나섰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비좁은 캠퍼스에 대한 문제의식이 학내 구조조정을 다루는 기획기사가 됐다. 〈중앙문화〉의 표석, 이찬민 기자(왼쪽부터).

거슬러 짚어본 신캠퍼스 건립 계획의 역사는 꽤 깊었다. 2005년 새 총장이 취임하면서 처음 밝힌 신캠퍼스 청사진은 2007년 하남 캠퍼스, 2010년 검단 캠퍼스 계획 등으로 구체화됐다.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기본 협약(MOU)을 맺고 건립비 조성에도 나섰다. 하지만 기존 안성 캠퍼스 주변 상인들의 반발, 그린벨트 규정, 신캠퍼스 부지가 있는 지자체의 재정 문제 등으로 그 계획은 10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지금은 마지막 후보지였던 인천시와 맺었던 검단 지역 신캠퍼스 MOU조차 만료된 상황이었다. 캠퍼스가 쾌적해질 날은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띄었다. 신캠퍼스 추진 역사를 취재하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 학교 안에서 벌어진 큰 사건들, 즉 학내 ‘구조조정’에 따른 갖가지 갈등이 바로 신캠퍼스 건립 계획과 연결돼 있었다. 학교가 안성과 서울 캠퍼스의 학과들을 쪼개고 합치고 옮기면서 애초 내세웠던 명분이 바로 ‘신캠퍼스 건립’이었다.

학교는 새로 지은 쾌적한 캠퍼스로 옮겨가기 전에 학과들을 구조조정하며 준비해야 한다고 설명해왔다. 하지만 지금 그 명분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 신캠퍼스는 첫 삽조차 뜨지 못한 상태에서 학교는 구조조정만 열심히 진행하고 있다.

〈중앙문화〉 기자들은 신캠퍼스 건립 계획이 결국 학내 구조조정을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들을 모아 이찬민·표석 기자(국문학과·25)가 긴 호흡의 기사를 써냈다.

컴퓨터 바탕화면 파일 정리하듯 단행된 학내 구조조정은 학내 구성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겉에서 보기엔 그럴싸한 이름으로 여러 학과들이 ‘융합’됐고, 입학 성적이 낮은 학과들이 사라지면서 수능점수 배치표상 학교의 평균 커트라인은 높아졌다. 하지만 내부 학생 공동체는 철저히 파괴됐다. 군대 갔다 와 복학하니 자기 학과가 사라져버려 낙동강 오리알이 된 학생은 물론, 한 해만 모집하고 폐과되어 선배도 후배도 없는 ‘단명’ 학과 학생들도 발생했다.

안성과 서울 캠퍼스의 중복 학과를 폐지하면서 갑자기 상경하게 된 지방 캠퍼스 학생들은 수능 점수 커트라인으로 ‘진짜 동기’와 ‘가짜 동기’를 가르는 서울 학생들의 냉대 속에서 울음을 삼켰다. 안성 캠퍼스에 남은 학생들은 그 학생들대로 재개발 지역으로 묶인 철거 예정지 같은 강의실 안에서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이런 문제들과 그것을 촉발한 학교의 구조조정 정책에 관해, 중앙대 교지 〈중앙문화〉는 몇 해 동안 “스스로도 지긋지긋하게” 보도해왔다. 이번 〈시사IN〉 대학기자상 학내 취재 보도상으로 선정된 ‘화려한 캠퍼스의 어두운 단면’ 기획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기사이다.

〈중앙문화〉 기자들이 이제는 일상처럼 굳어진 학교의 구조조정에 관해 계속 핏대를 세우고 문제를 제기해도, 정작 구조조정의 직격탄을 맞는 학생들의 관심은 저조하다. 하지만 기자들은 “기록을 남기는 심정으로” 계속 보도를 이어갈 생각이다. ‘지금 현재’ 반향이 없다는 자조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가끔 편집실에 찾아와 옛 발행호들을 뒤적이는 학생들을 보면서 ‘기록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낀다.

 사회 취재 보도상  중앙대학교 〈중대신문〉 김경림·김영화·심우삼 기자 ‘내 속이 울고 있다’

감정은 개인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게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자존감이 낮은 요즘의 대학생. 그들의 감정을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감정 역시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일 수 있다. 〈중대신문〉의 ‘내 속이 울고 있다(모멸감 주는 사회)’ 기획은 그렇게 탄생했다. 추상적인 키워드인 모멸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는 데 좋은 평가를 받아 사회 부문 수상작으로 꼽혔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 ‘모멸감’을 다룬 〈중대신문〉의 김영화, 심우삼, 김경림 기자(왼쪽부터).
김영화(신문방송학과·22), 심우삼(경제학과·25), 김경림(피아노 전공·22) 기자가 지난 학기 함께 꾸렸던 〈중대신문〉 심층기획부는 ‘오늘의 재구성’에 관심이 많다. 주변의 현상이나 이슈를 다른 시각으로 되짚어본다. 모멸감도 마찬가지였다. 외모, 학벌 등에서 비롯된 모멸감이 대학 내에도 만연했다. ‘성괴’ ‘지균충’ ‘지잡대’ 따위 단어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노동시장에서도 인턴이나 아르바이트생 등 주로 비정규직, ‘을’의 위치인 대학생들의 감정 소모가 컸다. ‘모멸감 품은 대학 사회’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을이었다’ ‘모멸 사회를 똑바로 바라보는 방법’ 등 3주에 걸쳐 기사를 실었다.

마침 사회적으로도 갑을 관계의 논의가 활발했다. 감정사회학을 다룬 김찬호 ‘마음의 씨앗’ 부센터장의 책 〈모멸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간 대학생들이 느끼는 감정은 한 번도 이야기되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든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든지, 젊은 시절을 하나의 경험담으로 추억하는 데서 그쳤는데 속을 살피니 그게 아니었다. 특히 ‘모멸 사회’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대학생들이 스펙 개발에 힘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김영화 기자는 “자기계발이 불편하게 여겨졌는데 원인을 몰랐다. 다른 학생들도 비슷하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얘기해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기자들끼리 논쟁도 많았다. 심우삼 기자는 아르바이트생을 갑을 관계로 접근하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감정노동이라는 개념 역시 명확한 정의가 없어서 모호했다. 책을 참고했지만 명확한 사례가 없었다. 모멸감을 형상화해야 하는데 막막했다. 설문 표본도 적어서 아쉬웠다. 심 기자는 “모멸감이라는 단어 자체가 수용자 중심의 말이다. ‘나는 모멸한다’라는 말이 없다. 잘못됐고 부조리한데 말하지 못하는 게 모멸인 것 같다. 이걸 말하게 하는 거니까 자칫하면 각본 맞추듯 작위적인 느낌이 들 수 있겠다 싶어서 지양하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기사에는 모멸감을 느낀 대학생들의 사례가 다수 등장한다. 개인적 이야기, 그중에서도 불편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라 꺼리는 취재원이 많았다. 친구들끼리도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감정이입이 되어 기자 본인이 우울감을 느끼기도 했다. 스스로 모멸감을 준 사람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기도 했다. 이래저래 기억에 남는 기사라 수상 소식이 감격스러웠다. 심층기획부에는 이제 세 명 중 한 명이 남아 있다. 앞으로 대학 사회라는 틀에서 벗어나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이나,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친절 강박 사회 등 좀 더 넓은 주제를 다뤄보고 싶다.

 방송 부문상  동국대학교 교육방송국(DUBS) 김가은·문환석·이상근·이윤상·조민아 기자 ‘뉴욕에서 언론의 미래를 보다’

“지상파 못지않다.” 제6회 대학기자상 영상보도 부문 수상작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일치된 평가다. 그만큼 만듦새가 뛰어났다. 주로 편집 기술에 대한 칭찬이었다. 만나보니 이유가 있었다. 현장 취재는 9박10일이지만 편집에는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주말에도 나와서 일했다. 기술 담당인 이상근 기자가 당시를 회상했다. “3D 자막을 만들 때 프레임을 한 땀 한 땀 따야 했는데 그게 힘들었다. 나오는 시간에 비해 들이는 시간이 길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동국대 교육방송국 이윤상, 조민아, 이상근 기자(왼쪽부터)는 세월호 이후 제기된 기자 윤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들고 뉴욕으로 갔다.
동국대학교 교육방송국(DUBS)은 지난해 7월 미국 뉴욕에 다녀왔다. 〈뉴욕 타임스〉 본사를 방문해 인터랙티브 뉴스 ‘스노폴(snowfall)’의 성공 요인을 조명했다. 탐사보도 전문 매체 〈프로퍼블리카〉를 찾아가 기자 정신에 대해 물었다. 컬럼비아 대학과 뉴욕 대학의 저널리즘 스쿨 커리큘럼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각각의 현장이 3부작 영상 ‘뉴욕에서 언론의 미래를 보다’로 탄생했다.

교육방송국을 비롯해 영자신문, 학보사 등 동국대 미디어센터 기자들이 함께했다. 학교의 지원 아래 임기가 끝난 학생들의 신청을 받았다. 기획은 달랐지만 섭외 등은 같이했다. 이 가운데 방송국 기자는 5명이다. 조민아(신문방송학과·22)·이윤상(지리교육학과·22)·이상근(정보통신공학과·22) 기자가 인터뷰에 참석했다. 김가은(일어일문학과·24)·문환석(멀티미디어공학과·21) 기자는 각각 교환학생과 군 입대로 자리를 비웠다.

기획을 시작한 건 세월호 참사가 난 지난해 4월이다. 오보가 많았고 기자 윤리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언론의 본질을 짚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계적인 언론사가 모여 있는 뉴욕을 선택했다. ‘언론’이라는 큰 범주의 주제를 다루면서 어떤 부분에 집중하고 어떤 매체를 찾아가야 할지 논의를 많이 했다.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개인 이메일, 트위터 등을 공략했다.

뉴욕 현지에서 만난 세계 유수의 언론인들은 독자의 힘을 강조했다. 콘텐츠를 그냥 내보내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독자의 생각과 반응을 받아들여야 그들이 원하고 듣고 싶은 뉴스가 나온다고 말했다.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기본 소양이라고 했다. 특히 글쓰기를 많이 강조했다. 기본의 중요성을 새삼 알게 되었다.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대학을 둘러보면서 한국 대학의 커리큘럼이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졌다.

저널리즘 스쿨은 촬영에 비협조적이어서 학생들의 모습을 많이 담지 못했다. 평소 DSLR 카메라로 촬영하는데 이번 취재에서는 스마트폰을 많이 이용했다. 촬영이 쉽지 않은 현장에서 유용했다. 원하는 장면을 다 담지 못했고 흔들린 컷이 많아서 좌절도 했다.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가장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 다섯 기자가 대학 방송국에서 내놓은 마지막 작품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 특별상  한성대학교 〈한성대신문〉

제6회 대학기자상 특별상 수상자를 선정하면서 〈시사IN〉 편집국의 고민이 깊었다. ‘대학 언론 발전에 크게 기여한 매체 또는 인물’에게 주는 특별상은 이제껏 편집권 투쟁을 벌이는 학내 언론사에 많이 돌아갔다. 민감한 사안을 보도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학교와 편집권 갈등을 겪다가 백지 보도, 무제호 발행, 발행 중단 등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대학 언론의 독립성을 지키는 대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들을 수상자로 선정해왔지만, 막상 이 추세가 계속되니 한편으로 우려스럽기도 했다. 〈시사IN〉 대학기자상 특별상이 자칫 ‘싸우는 대학언론사 상’으로 굳어져, 학내 언론과 학교의 갈등을 부추기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기 때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한성대신문〉은 학내 언론의 발전적 비판 기능을 보여줬다. 노유진, 한지선, 임태미, 최혜정, 한재원 기자(왼쪽부터).

한성대학교 〈한성대신문〉도 2014년 학교 측과 날을 세운 학보사 가운데 한 곳이었다. 학생 기자들이 써온 기사를 주간 교수 등이 보도하는 데 반대했고, 설전을 벌이다 2014년 9월1일자 〈한성대신문〉 개강호(제492호) 1면 머리기사 자리는 하얗게 빈 채 발행됐다. 원래 그 자리에 들어갔어야 할 기사의 제목은 ‘본교 정원 감축으로 재정지원 제한대학 지정 유예’. 교육부의 대학 구조개혁 과정에서 한성대가 재정지원 제한대학, 즉 부실 대학으로 지정되었지만 자율 정원 감축을 통해 그 결정을 유예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대학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재정지원 제한대학의 실제 명단 정보를 학외 기성 언론보다 먼저 입수한 〈한성대신문〉의 ‘단독’ 특종 기사였지만, 학교 측은 “왜 이 민감한 시기에 자랑거리도 아닌 사실을 까발리려 하느냐”라며 보도를 막았다.

1976년 〈한성대신문〉 창간 이후 유례없는 백지 보도였다. 이제까지 학교와 특별한 갈등을 겪지 않으며 조용히 신문을 발행해온 편집국 구성원들로서는 이후 닥쳐올 후폭풍이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싸움’에 머무르지 않았다. “왜 우리 편집권을 침해했느냐”라고 학교에 따지기만 하는 대신 〈한성대신문〉은 애초 공론화하려던 문제, 정부의 대학 구조조정 정책이 한성대와 한성대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 대응 방향에 관해 지속적으로 캐묻는 전략을 택했다.

백지 보도 발행 이후, 아무리 큰 학내 행사가 있어도 한 학기 내내 〈한성대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무조건 대학 구조조정과 관련된 보도였다. 그것이 결국 성적 세칙, 장학금 제도 등 학생들의 모든 대학 생활을 판가름하게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수의 대학 평가 분야에서 한성대가 하위권을 기록했다는, 교직원은 물론 학생들조차 굳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불편한 사실들을 끈질기게 까발리며 신문에 싣기도 했다. “모두 공유해서 알아야 고쳐 나갈 수 있다”라는 깊은 애교심의 발로였다.

감추려고만 들던 학교도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한성대신문〉 백지 발행 이후 학교 측은 총학생회와 학내 언론사 구성원들을 불러 간담회를 열고 총장 인터뷰에도 응하는 등 학생들에게 현재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향후 대책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한성대신문〉의 보도로 모교의 위기 상황을 접한 졸업 동문들은 “이렇게 심각한 줄 몰랐다”라며 뭐라도 해서 돕겠다는 뜻을 보이기도 했다. 〈한성대신문〉 한재원 편집국장(행정학과·24)은 “단순히 학교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서 나아가 함께 약을 바르며 치유하는 데 동참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학내 언론의 ‘발전적 비판’ 기능을 충분히 보여준 〈한성대신문〉은 그래서 제6회 〈시사IN〉 대학기자상 특별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기자명 변진경·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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