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9일, 엄지영씨(37)는 “248일째 4월16일”이라고 날짜를 셌다. 세월호 참사로 딸 예지를 잃은 후 생긴 버릇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1층 아파트 발코니 너머로 등교하는 예지 또래의 아이가 보였다. 까르르 웃음소리, 교복을 입은 모습에 자주 정신을 잃었다.

비나 눈이 내리는 날에는 홀딱 비를 맞고 하교하던 딸이 생각났다. ‘엄마는 일하니까 못 데리러 오겠지. 걱정 마, 우산 빌려 쓸게.’ 어쩌다 우산 없이 오는 날에도, 엄마가 걱정할까 봐 꼭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운동화가 몽땅 젖어서 다음 날 엄마 운동화를 신고 가야 해도 불평 한번 없었다. 예지는 수학여행 가기 이틀 전, 외할머니 생신 때 영양크림을 선물했다. 한 달에 5만원인 용돈과 세뱃돈을 모아서 샀다. 아빠 중고차와 예지 중고 피아노를 살 때도 예지는 자기가 모은 돈을 보태라며 내놓았다. 또래에 비해 속이 꽉 찬 아이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처음 거리로 나선 날은 5월8일 어버이날이었다. 한뎃잠을 잔 이들이 5월9일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처음 거리로 나선 날은 5월8일 어버이날이었다. 한뎃잠을 잔 이들이 5월9일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올라 예지는 엄마·아빠와 함께 쓰던 카카오톡에 글을 남겼다. ‘안개 때문에 앞이 안 보인대. 배가 안 떠.(4월15일 오후 5시35분)’ 아빠 박상우씨(42)는 평생 가슴을 치게 될 말을 하고 말았다. ‘기다리다가 갈 수 있으면 갔다 와.(오후 5시38분)’ 4월16일 오후 7시30분, 박씨는 다른 학부모 10명과 함께 낚싯배를 빌려 사고 해역까지 들어갔다. 세월호 전방 50m, 구조대가 없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도 뱃머리를 돌려 나왔다. “내 새끼가 저기 있는데,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내 새끼를 구해냈어야 하는데….” 아빠 박씨는 그날을 생각하면 여전히 후회가 남는다. 4월24일 밤 12시10분, 예지는 ‘157번’이라는 숫자를 달고 돌아왔다. ‘옆머리 30㎝, 앞머리 8㎝, 특이사항 없음, 검은색 유니클로 바지.’

이제 엄마·아빠는 어디든 간다

아이가 떠난 뒤 남은 식구들의 삶은 바뀌었다. ‘엄마, 아빠’로 불리던 이들에게 유가족이라는 이름이 새로 생겼다. 정부는, 국회는, 언론은, 유가족을 ‘투사’로 만들었다.  5월8일 어버이날, 부모들은 아이의 영정사진을 껴안고 KBS와 청와대 앞에서 한뎃잠을 잤다. 7월 초에는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이 국정조사에서 세월호 참사를 조류독감에 비유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엄마는 원통해서 나흘간 잠을 자지 못했다. 절절하게 깨달았다. “싸워야만 하는구나.”

수사권·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 제정을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을 위해 전국을 다녔다. 예지 아빠 박씨는 곡기를 끊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홀로 남기 전까지 광화문 농성장에서 16일간 버티다 쓰러졌다. 예지 엄마 엄씨는 서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며 버티다가, 여경이 무리하게 끌어내는 통에 목을 다쳐 병원 신세를 졌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던 프란치스코 교황만이 유일한 위로이자 동력이었다. 엄씨는 8월16일, 교황의 시복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입원 중 탈주했다. 유민 아빠와 함께 ‘우리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힐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정부를 믿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4월17일 진도 실내체육관에 내려와 “오늘 이 자리에서 지키겠다고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라고 말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특별법은 만들어져야 하고… 진상 규명에 유족 여러분의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5월16일)” “이번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5월19일)”라고 재차 강조하던 박 대통령의 약속과 눈물을 믿었다. 하지만 지난 10월29일 국회를 방문한 박 대통령은 “아이를 살려달라. 특별법 제정해달라”고 소리치는 유가족을 외면했다. 엄씨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가던 대통령을 향해 “약속을 지키세요. 약속했잖아요!”라고 외쳤다. 순간 그녀는 경호원들에게 겹겹으로 둘러싸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고 박예지양의 어머니 엄지영씨가 안산 집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보낸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고 박예지양의 어머니 엄지영씨가 안산 집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보낸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참사 이후 엄마와 아빠는 주저앉고 싶을 때도 많았다. 참사 100일을 훌쩍 넘기고, 교황이 다녀가고, 추석이 지나도 실타래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설상가상 세월호 대책회의 지도부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까지 벌어졌다. 애써 세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집 밖에서 자는 게, 경찰과 싸우는 게 덜 힘들 정도였다. 유가족 250여 명 중 200명 가까이 모이던 숫자가 100명으로 줄었다. 광화문 농성장을 찾는 시민도 3분의 1로 줄었다. 내부의 분열로 아이의 죽음이 묻힐 수 있다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전국 순회 간담회를 시작한 건 그래서다. 이제 엄마·아빠는 어디든 간다. 예지 이야기를 하며 울기만 하던 엄씨도 진상 규명의 필요성과 특별법의 역할에 대해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엄씨는 지난 8개월간 국회, 광화문, 청와대 앞을 떠돌다 요즘에야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충전하고 쉬는 시간, 예지가 더욱 선명히 떠오른다. 엄씨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사진 앨범을 펼쳐본다. 웃다가 울다가 예지가 없음을 확인한다. 엄씨는 3반 김시연양의 어머니 윤경희씨(37)와 자주 만난다. 엄씨와 윤씨는 사촌 시누이올케 사이다. 예지와 시연이는 같은 해 태어나 함께 컸다. 소풍을 가고 케이크를 먹는 등, 사진 속에서 둘은 항상 나란히 있다. 시연이의 발인 날, 예지가 뭍으로 나왔다. 둘은 평택서호추모공원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예지가 다니던 9반에서는 희생자 20명의 가족 중 다섯 가족이 이사를 했다. ‘견딜 수 없어서’ 집을 옮긴 엄마·아빠들은 그러나 이사를 해서도 아이 침대와 장롱을 마련하고 방을 꾸몄다. “아직 완전히 갔다고 생각하지 않아서”다. 예지 부모는 10년간 예지와 함께 지낸 흔적을 잊기 싫어서 이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예지 동생 박 아무개군(11)은 또래보다 부쩍 성숙해버렸다. 먼 곳으로 수련회를 가는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아들은 “엄마가 원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 데도 안 가”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엄마를 위로하며 한 말에 엄씨는 또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동생은 안방에 놓인 누나의 영정사진 앞에 누나가 좋아하던 소시지, 과자, 아이스크림 등을 올려놓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10월29일 국회 시정연설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외면한 채 자리를 떠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10월29일 국회 시정연설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외면한 채 자리를 떠나고 있다.

 


12월9일은 예지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엄마는 새벽 내내 만두, 잡채, 미역국, 조기구이, 삼겹살, 볶음김치를 만들어 납골당에 올렸다. 함께 있는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음식을 많이 차렸다. 예지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 8명이 모두 희생되었다. 하늘나라에서도 그 친구들과 먹기를 바랐다. 예지의 사진 앞에는 인형과 화분이 잔뜩 놓여 있었다. 예지의 중학교 때 선생님이 남은 친구들을 모았다. 엄마·아빠만 모여 간단히 케이크를 먹자고 한 일이, 중학교 교사와 친구를 모으고 생존 학생이 참가하면서 20여 명으로 불었다. 엄씨는 “예지는 먹는 거 좋아하니까 여기 와 있을 거야. 생일을 근사하게 축하받아 좋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여전히 팽목항에 남아 있는 실종자 가족들

엄씨가 사는 작은 아파트에는 희생자가 두 명 더 있다. 엄씨가 꺼낸 예지의 유치원 생일잔치 사진, 중학교 졸업 사진에는 죽음의 사슬이 보였다. “얘도 죽고, 얘도 죽고, 얘도 죽고….” 참사 당일,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엄씨는 일터에서만 보던 유백형씨를 만났다. 엄씨는 ‘유씨가 자원봉사자로 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단원고 양승진 교사의 아내였다. 양승진·고창석 교사, 조은화·허다윤양, 박영인·남현철군, 일반인 승객 권혁규군, 권재근·이영숙씨는 여전히 바닷속에 있다.

지난 9월 진도체육관에서 만난 기자에게 “다음엔 안산에서 보자. 우린 다 찾고 올라가서 여기 없을 거야”라고 인사하던 유백형씨는 실종자 수색이 중단된 11월11일 이후에도 여전히 팽목항에 남아 있다. 유씨는 “인양에 대한 확답을 받고 싶다. 배를 건져 안에서 유골이라도 찾고 싶다”라고 말했다. 잠수사, 소방관, 경찰, 의료진이 철수한 팽목항에는 조카 혁규군과 동생 재근씨를 기다리는 권오복씨, 딸 다윤양이 나오기 전까지는 뇌종양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엄마 박은미씨와 그의 남편 허흥환씨가 남아 있다.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43명은 12월27일 합동 영결식을 갖기로 했다. 인천시는 부평 가족공원 안에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 건립을 추진한다.

세월호 참사 206일 만인 11월7일.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제야 참사가 발생한 원인과 수습 과정, 후속 조치 등에 대한 사실관계와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한 출발선에 섰다. ‘다 밝힐 순 없어도 억울하게 보낼 수는 없어… 너무 힘들어도 예지만큼은 아닐 거야.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걱정 마, 엄마….’ 딸을 잃은 엄마가, 환갑이 다 된 자신의 어머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문자는 엄지영씨가 자신에게 보내는 다짐이기도 하다.


2014년 4월16일 이후, 무슨 일이 있었나

4월16일 세월호 침몰 (12월19일 현재, 승객 476명 중 295명 사망, 9명 실종)
4월17일 박근혜 대통령, 진도 실내체육관 방문해 구조 독려
4월26일 합수부, 세월호 선박직 승무원 15명 전원 구속
4월27일 정홍원 국무총리, 참사 책임지고 사의 표명
5월8일 세월호 유가족, KBS 항의 방문·청와대 앞 노숙
5월19일 박 대통령 세월호 참사 대국민 담화 발표, ‘해경 해체’ 선언
6월10일 광주지방법원, 이준석 선장 등 선원 15명 첫 재판
6월25일 단원고 생존 학생 73명, 71일 만에 학교 복귀
6월26일 정홍원 총리 유임 결정
7월14일 김영오씨 등 세월호 유가족 15명, 기소권·수사권 보장된 특별법 제정 요구하며 단식농성 돌입
7월15일 단원고 생존 학생 46명, 안산 단원고에서 서울 국회의사당 향해 도보 행진
7월21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변사체 확인
8월7일 이완구·박영선 원내대표, 1차 합의안 도출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 광화문광장에서 시복미사
8월28일 유민 아빠 김영오씨 46일 만에 단식 중단(문재인 의원 단식 중단)
9월17일 세월호 대책위 대리기사 폭행사건 발생
9월30일 여야, 세월호 특별법 3차 협상 타결
10월6일 검찰, 세월호 참사 수사 결과 발표
10월29일 102일 만에 295번째 희생자 수습
11월7일 국회 본회의, 세월호 특별법 통과
11월11일 수중 수색 작업 종료
11월11일 광주지법 재판부, 이준석 선장 징역 36년, 기관장 징역 30년, 나머지 13명 징역 5~20년 선고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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