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바닥 친 대통령제, 이제 독단을 견제할 개헌이 필요하다”

최장집 교수가 쓴 ‘이명박 정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나? -민주주의하에서의 국가, 대통령(제), 정당의 문제’를 요약 게재한다. 원문은 계간지 <비평> 19호(2008년 여름호)에 실릴 예정이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 2008년 06월 09일 월요일 제39호
댓글 0
   
ⓒ시사IN 윤무영
최장집 교수.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한국민주주의의 이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민주화>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을 썼다.
현재 이명박 정부가 직면한 사태는 분명히 예사롭지 않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것처럼 보였던 한나라당의 집권이 왜 시작부터 정치적 불안정을 맞게 되었을까.

여론이나 언론은 대통령과 관련한 개인 요소들, 다시 말해 권위주의적 리더십이나 국가 운영에 대한 몰이해, 일방통행식 의사소통, 새 정부 구성원들의 사회적 배경 같은 미시적 요소를 주로 지적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개인적 요소보다 더 큰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 운영의 핵심 메커니즘이라 할 정당과 정당 체제가 제대로 제도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의 낮은 투표율에서 보듯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대선 때 이명박 후보가 2위보다 두 배나 높게 득표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대선 결과를 보수 정당의 압도적 승리로 이해하는 해석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 후보의 득표율 48.7%는 전체 선거인 수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30.5%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얻은 득표율에 비해 훨씬 낮고, 민주화 이후 최초의 선거이자 후보 4명이 표를 나눴던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당선자의 득표율보다 낮다. 심지어 1997년, 2002년 대선에서 김대중, 노무현 후보에 패배했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얻었던 득표율보다도 낮다. 사상 최저를 기록한 지난 총선의 46.1% 투표율 역시 2004년 총선의 60.6%보다 14% 포인트나 하락했다. 세계적으로 낮은 이런 투표율은 우리의 정당체제가 신뢰와 효력을 별로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다. 

보수화한 것은 유권자가 아닌 국내 정당들


지난 대선과 총선을 분석하면서 주류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은 투표자의 이념적 정향이 보수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집권은 언론에서 흔히 말하듯 압도적 승리로 보기 어렵다. 또한 열망에 기초한 정치변화도 아니다. 보수화한 것은 유권자가 아니라 한국의 정당들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 정당체제는 법의 지배와 사회정의를 실현하지도, 노동과 저소득층을 포괄하는 소외계층을 수용하지도 못했다. 투표자 처지에서 볼 때 한국의 정당들은 투표 유인을 갖지 못한 셈이다.

정치학자 후안 린츠가 지적했듯, 대통령제의 약점은 한 나라의 정치 전반이 대통령 개인의 성격에 너무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런 약점은 정당이 얼마나 잘 제도화되고, 정치 과정에서 구실을 하느냐에 따라 크게 보완될 수 있다. 한국의 정당정치는 몇몇 구조적 요인에 의해 제약된다.

첫째,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두 중심축인 민족문제와 노동문제를 들 수 있는데, 전자는 너무 과도한 관심 때문에 후자는 너무 소홀히 취급당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킨다. 민족문제는 한국에서 쉽게 이데올로기 문제로 바뀐다. 냉전반공주의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보수파의 태도는 아직까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집회를 좌파의 배후 선동이나 반미운동으로 보는 관점이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민족문제의 이데올로기화는 해당 이슈를 토론과 타협보다는 격렬한 대결로 몰고가는 경향성을 가지며, 이런 상황에서 민주적 정치 과정이 자리 잡기는 어렵다. 민족문제의 이데올로기화에는 보수파만이 아니라, 급진적 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진보파의 책임도 크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민족문제와 관련한 이슈가 정치 영역에서 탈이데올로기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노동문제는 이와는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노동이 제도화한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그 과정의 주요 행위자가 됨으로써, 노동문제가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써 정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한다. 민노당 등이 어느 정도 노동문제를 대표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정치 과정에서 주요 행위자가 아니다.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여야 두 정당은 노동문제를 다루지 않거나 배제한 채 정치 갈등에 몰입하고 있다. 노동문제가 제도 밖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항상적인 파업과 농성, 노사분규는 한국 노동운동의 일상화되고 의식화(儀式化)된 생존방식이 되었다. 사회·경제적 이슈가 경제 관료와 테크노크라트의 관장 사항으로 전락하면서 한국의 정당체제는 더 제도화되지 못하고, 정치체제는 더 불안정해졌다.

   
ⓒ뉴시스
지난해 12월14일 한나라당 의원과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이 국회에서 몸싸움을 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 정당은 냉전반공주의의 구시대 이념을 정치 자원으로 활용하는 일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노동의 사회·정치적 포섭을 허용하고, 분배의 정의와 복지의 가치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민주화운동 세력은 조직화한 정치세력으로 입지를 구축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불행히도 민주화 이후 진보세력은 민주화운동의 동력과 열정을 민주주의의 선거 경쟁에 걸맞은 정당으로 조직화·제도화하는 일에 실패했다. 보수와 구별되는 진보 이념과 가치를 대표하되, 실현 가능한 진보적 대안을 대변하는 정당이 필요하다. 

선거 경쟁에 걸맞은 진보정당 나와야

둘째, 민주화되었는데도 여전한 권위주의 요소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 문제나 영어 조기교육, 한반도 대운하 건설 등은 한국 정치의 권위주의적 측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국에서 중대한 정책이 결정되는 전형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권력이 수립된다. 그리고 최고결정자는 무엇이 국가이익이며 전체 사회를 위한 공익인지를 정의한다. 그는 극소수의 테크노크라트와 함께 이를 정책화한다. 어느 날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정부정책이 공표되며, 모든 정부기구에 의해 과격하고 급속하게 추진된다. 반대 여론은 국익에 반하는 ‘정치논리’ 또는 ‘집단이기주의’로 비판된다.
이런 권위주의적 권력 행사 방식에서 정당과 의회의 구실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노무현 정부 이래 이명박 정부에서 벌이는 한·미 FTA 추진정책에서 보듯 정부 여당은 정책의 형성자나 입안자로 기능하기보다 집행부에서 만들어진 결정을 사회와 야당에 알리는 전달 벨트의 구실에 머문다. 최고결정자가 만든 정책의 반대편에는 운동 외에는 스스로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허약한 정당과 시민사회가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경제적 효율성의 기준에서 볼 때 기술관료적 권위주의 체제보다 더 낫다는 보장이 없고, 여러 집단의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에 결정 과정이 신속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창출하는 ‘정치적 제약’의 핵심 내용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필수적인 까닭은 결정 과정에서 숱한 갈등과 요구를 내부화하고, 조정을 통해 타협 가능한 대안을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당정치를 제약하는 세 번째 구조적 요인으로 대통령제와 ‘국민적 위임’에 대한 오해를 들 수 있다. 대통령제가 갖는 중요한 단점의 하나가 승자독식 원리다. 30%대를 득표하고 선출된 대통령도 전체 국민을 대표하는 통치자가 된다. 대통령이나 국민 모두 통치에 대한 국민적 위임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통치의 권한을 부여받은 것일 뿐, 통치에 대한 국민적 위임을 받은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이는 잘 구분되지 않는데, 국민적 위임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통치 행위가 추상화되면서 제약 없는 권력 행위가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에 의한 ‘정치적 제약’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통령이 국민적 위임의 담지자라는 인식이 가져오는 또 다른 부작용은 막강한 국가 최고 수반의 권력과 권한이 개인화하는 데 있다.

프랑스식 ‘준대통령제’ 개헌 고려해볼 때


누가 새 정부에 한반도 대운하나 영어몰입 교육 같은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도록 위임했는가? 헌법에 따른 민주적 투표에 의해 다수, 그것도 ‘압도적인 지지’를 획득했기 때문에 ‘국민적 위임’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 원리의 관점에서 그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전체 국민의 정신적, 문화적, 사회·경제적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급진적 개혁정책을 사회에서의 심의와 동의를 통한 합의 형성 과정 없이 밀어붙이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나아가 그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미래 한국인의 생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정책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강력한 대통령과 허약한 정당체제가 만날 때 만들어지는 특징적 현상을 ‘구조적 파퓰리즘’이라는 말로 개념화할 수 있는데, 강력한 국가-강력한 대통령이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강한 대통령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재 한국의 대통령은 잘 제도화된 정당과 세력 기반 없이 다만 사적 이익집단과의 특수 관계에, 그리고 사적 인간관계의 네트워크에 중심 기반을 두고 있다. 대통령이 제도화된 사회적·정치적 지지 기반에 서 있지 못할 때 그의 지지 기반은 급속히 해체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으로 불거진 새 정부의 위기는 이러한 대통령제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민주주의 체제의 안정과 발전은 문제의 근원이 되는 저발전 상태의 정당체제를 어떻게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고 넓은 사회적 지지 기반을 갖도록 개혁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나타났고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심화된) 현행 대통령 제도의 문제점은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 논의되었던 4년 중임제와 대선·총선 주기의 일치와 같은 변화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중심제의 대안은 의회중심제이다. 그러나 의회중심제가 허약한 정당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을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한국의 정당체제가 빠른 속도로 사회적 기반을 가지면서 제도화해 의회중심제를 작동시킬 수 있다면, 의회중심제가 민주주의를 위한 최상의 제도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 정당체제의 취약함을 감안하면, 그보다 위험이 적은 프랑스식 준대통령제, 즉 의회중심제와 대통령제를 결합한 혼합형제도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정리·안철흥 기자
<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