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7일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 특별법)’이 마련됐다. 연내 출범을 예정하고 있는 특별조사위원회는 위원 구성 등 준비에 한창이다(40쪽 상자 기사 참조). 위원회 임기가 끝나는 18개월 후, 한국은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혀 재해·재난 예방, 대응 방안을 수립해 안전한 나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가 있다.

13년 전인 2001년 9월11일, 미국 워싱턴과 뉴욕에서 3000여 명이 희생되는 최악의 국가 재난이 발생했다. 9·11 유가족 대책위원회는 사건의 진상과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기 위한 독립적인 진상규명위원회 설립을 미국 의회에 촉구했다. 하지만 부시 당시 대통령은 14개월이 지나서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에 관한 국가위원회(일명 9·11 위원회)’ 설립을 승인했다.

여야 국회의원 10명으로 구성된 9·11 위원회는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전·현직 고위 공무원을 청문회에 불러냈다. 20개월 동안 10개국에서 1200명을 인터뷰하고 12회에 걸친 청문회를 연 후, 585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발행했다. 보고서는 홈페이지(www.9-11commission.gov/report/911Report.pdf)를 통해 열람할 수 있다.

ⓒEPA오바마 대통령 부부와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이 9·11 테러 13주년을 맞아 백악관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10월29일 국회 시정연설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외면한 채 지나가고 있다.
9·11 위원회가 펴낸 최종 보고서에는 미국 정부가 텔레비전을 통해서야 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알았다고 적혀 있다. 사건 발생 직후에는 상황에 대한 정보나 인명 구조 등 컨트롤타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진상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데에도 정치적 진통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의 모습과 닮았다.

이재근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은 “9·11 위원회의 절차와 원칙, 이들의 역할과 한계를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 관계자를 한국에 초청했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와 국민대책회의는 12월9일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해외 사례에서 본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주제로 워크숍을 연다.

〈시사IN〉은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12월8일 방한한 필립 셰넌 전 〈뉴욕 타임스〉 기자를 인터뷰했다. 그는 ‘위원회:검열받지 않은 9·11 조사 내역’이라는 글을 통해 9·11 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낸 필립 젤리코 버지니아 대학 교수가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와 긴밀한 관계였고, 국가위원회가 국가안보국(NSA)에 있는 9·11 관련 자료를 모두 보지 않아서 결정적 단서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9·11 위원회가 출범하는 데까지 어떤 진통이 있었나?
여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상황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가동하는 건 자칫 내분을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뉴욕 타임스〉가 ‘백악관은 테러를 막지 못한 정부의 실수를 조사할 의지가 전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공화당 의원은 상·하원 합동 정보특위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유가족은 독립적인 위원회 설치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미온적인 정부를 압박해 9·11 위원회를 설립하고 출범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유가족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개월이나 지난 2002년 11월, 부시 대통령은 ‘위원장은 대통령이 정한다’는 조건하에 마지못해 9·11 위원회 설립에 동의했다.

9·11 유가족은 진상 규명을 위해 정부에 어떻게 압력을 행사했나?
유가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에게는 정부에게 행동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가 있다. 이들은 반강제로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을 청문회에 출석하게끔 했다. 라이스 보좌관은 청문회에 출석하고도 증언에 따른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선서 없는 증언’을 고집했는데, 이때 저항의 의미로 유가족이 청문회장에서 퇴장했다. 결국 라이스 보좌관은 선서를 했고, 그의 발언을 통해 다수의 진실을 밝혀냈다. 세월호 유가족은 이미 그들의 도덕적 권위를 보여주었다고 알고 있다. 유가족은 조사위가 활동하는 데 필요한 재정과 시간을 충분히 요구해야 한다. 또한 조사위원회가 진상 규명을 위해 조사하고 있는지 꾸준히 감시해야 한다.

ⓒ필립 셰넌 제공필립 셰넌 전 <뉴욕 타임스> 기자.
세월호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수사권을 두고 첨예한 논란이 일었다. 9·11 위원회는 수사권을 가졌나?
전면적인 수사권은 없었다. 미국 헌법과 삼권분립에 기초한 대통령의 고유한 권한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극비 사례가 공개되는 선례를 남기면 향후 대통령직 수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데 동의해, 민주당과 위원회에서 이를 감안했다. 대신 소환권과 강제 자료수집 권한이 있었는데, 이는 매우 중요했다. 연방항공청은 테러 당시 상황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일지 등의 일부만 제출했다가 자료를 압수조치 당했다. 여론이 나빠져 9·11 위원회에서 소환할 수 있다고 판단한 부시 정부는 미국 역사상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던 대통령 일일보고(PDB)까지 위원회에 제출했다. 소환권이 위원회의 목적 달성에 기여한 바가 크다.

위원회 권한만큼 위원 구성이 중요할 것 같다.
필립 젤리코 9·11 위원회 사무국장은 끊임없이 ‘방해 공작’을 폈다. 그는 조사 기간 내내 친구이자 핵심 조사 대상인 라이스 보좌관과 수차례 전화 통화를 했다. 조사단이 아닌 백악관 입장을 반영해, 재선을 노리는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보좌관에게 불리한 자료를 수집하지 않도록 조사위를 압박했다. 9·11 위원회 활동을 마치고 나서는 라이스 보좌관을 위해 활동했다.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토머스 킨 전 뉴저지 주지사를 위원장으로 선택했다. 수사권뿐 아니라 위원회 구성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9·11 위원회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내용은?
‘2001년 8월6일 빈라덴, 미국 내부 공격 계획’이라는 대통령 일일보고에는 알카에다의 항공기 납치 가능성, 미국 내 조직원 모집 등 자료가 있었다. 라이스 보좌관이 테러리스트의 동향을 알고 있으면서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은 것이다. 대통령 전용기에 대한 위협이 없었는데도 부시 대통령을 지하 벙커로 대피시키기 위해 전용기가 미군 지휘소로 진로를 바꾼 사실, 테러범에게 납치된 여객기가 워싱턴 국방부 건물을 공격했을 때 인근 기지에 이를 저지할 전투기가 배치돼 있었지만 50분이나 늦게 출동한 사실 등이 드러났다.

유가족은 성역 없는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안타깝게도 9·11 위원회의 조사에는 많은 맹점이 있었다. 청문회 과정에서 의문점이 언급됐고 진실 규명에 대한 결정적 단서가 있었는데도 위원회는 최종 보고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최종 보고서에는 미국이 9·11 테러 이전에 받은 경고와 관련한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 CIA 당국자가 청문회에서 ‘라이스 보좌관에게 구체적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고 진술한 내용도 포함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의 증언을 비공개로 한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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