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세계는 지금 기록적인 고물가에 신음 중이다. 석유와 식량 가격의 앙등은 지구촌 곳곳에 항의 시위와 폭동을 부르고 있다. 한국의 6월 광화문, 가뜩이나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분노의 난장을 벌인 것이 아닐까.
최근 만난 미국계 투자은행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이명박 정부를 ‘불운한 정권’이라고 규정했다. 고성장 시대의 끝물에 시작하며 고성장을 외치는, 때를 잘못 만난 정권이라는 것이다. 선진국은 이미 열중쉬어 상태이고, 고성장을 누리던 중국 등 이머징 마켓도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긴축정책을 펼 때 나홀로 성장을 외치니 안타깝다고 그는 말했다.

이미 지난해부터 ‘골디록스의 종언’은 경제 전문가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골디록스란 영국의 전래동화 〈골디록스와 곰 세 마리〉(Goldilocks and the three bears)에 등장하는 소녀의 이름에서 따왔다. 동화에서 골디록스는 곰이 끓인 세 가지의 수프,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적당한 것 가운데 적당한 수프를 먹고 기뻐하는데, 이 적당한 것을 경제 상태에 비유한 것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용을 창출하는 경제성장을 하면서도 물가 압력의 우려가 없는 상태, 즉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호황을 뜻한다.

호황인데 뜨겁지 않다니, 얼마나 환상적인가. 지난 10여 년간 세계 경제는 성장률과 물가가 트레이드 오프(상충) 관계에 있다는, 상식이 되다시피 한 경제학 이론을 보기 좋게 뒤집어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세계는 정반대의 상황에 빨려 들어갔다. 경기가 둔화하는 조짐이 뚜렷한데도 인플레가 고개를 든 것이다. 이런 기막힌 상황을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지난 4월 ‘얼음(성장 둔화)과 불(인플레이션)의 결합’이라고 묘사했다. 칸 총재는 “골디록스가 이제 없다”라고도 선언했다.
 
지난해까지도 세계는 이른바 ‘R(Recession)의 공포’에 떨었으나 이제는 더 무섭다는 ‘I(Inflation)의 공포’에 떤다. 고성장·저물가 시대의 종언을 가져온 것은 석유와 식량을 비롯한 원자재 값의 앙등이다. 이미 지난 3년간 전세계 식료품 가격은 83%나 올랐고,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선 지 오래다. 농산물과 기름값 급등은 지구촌 곳곳에서 항의 시위와 폭동을 부르고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로 살포되는 산성비 같은 게 인플레이션이라지만, 저소득층일수록 인플레는 그야말로 재앙이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온다. 고유가는 이집트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식품 가격 폭등은 아이티에서 총리를 몰아내는 사태로까지 치달았다. ‘빈곤의 대륙’ 아프리카는 더욱 심각하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곡물가격 상승은 33개국에서 소요 사태를 촉발했다”라면서, 인플레이션은 지난 7년간 해온 세계의 빈곤 축소 노력을 되돌려놓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필요한 조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10억명이 더 깊은 빈곤 상태에 빠지리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굶주리는 사람은 없다지만, 고유가로 인한 위협은 선진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유럽연합(EU) 대표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유가 인상에 항의하는 어민 수천명이 몰려와 돌멩이와 벽돌을 던졌다. 경찰이 물대포와 최루가스를 쏘며 강제해산할 정도로 격렬했다. 프랑스 리옹에서도 트럭 운전사와 택시 기사, 농민이 몰려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글로벌 경쟁 소외 계층이 ‘광화문’으로?

지금 세계는 수십년 만에 찾아온 기록적인 고물가에 신음 중이다. 인플레는 이제 전지구적 현상이고 각국 정부는 인플레 퇴치에 골머리를 앓는다. 리먼브러더스에 따르면, 지난해 말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 내놓은 인플레이션 대응책은 무려 59가지에 이른다. 우울한 것은 그 처방이 대부분 효과가 적거나 대가가 혹독하리라는 점이다. 신흥 경제권 정부는 정부 보조금을 주거나 임금과 물가 통제로 대처했지만 돈은 더 많이 풀렸고 인플레 기대심리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금리를 올려 인플레와 대적해보려는 나라도 많지만 잘못된 처방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인플레이션이 고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금리 인상 같은 총수요 관리 정책은 대가도 크다. 속된 말로 경제를 반쯤 죽이는 탓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한국 정부에 비해서는 훨씬 낫지 않을까. 물가 대책을 강구하기는커녕 성장에 집착해 고환율 정책으로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는 지렛대 구실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한국 정부의 모습과 5월 내내 그리고 6월에도 사람들이 ‘광화문’에 몰려든 것에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최장집 교수의 분석처럼 쇠고기 사태는 방아쇠 구실을 했을 뿐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 맞다면 그 불만의 기저에는 구조적 요인이 깔려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 사회에는 지난 수십년간 세계화 경쟁에서 뒤져 날로 피폐해진 계층이 두껍게 형성되어 있다. 이들을 보듬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에서 새로 들어선 우파 정부는 그들을 내동댕이쳤는지도 모른다.

기자명 장영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c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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