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순에는 청도의 특산품인 씨 없는 감 반시를 딴다. 거두는 날이 하루 이틀만 차이가 나도 과실 맛의 깊이는 달라진다. 하지만 제때에 모든 수확을 마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8월 초 청도 주민 빈기수씨(50)는 셋이 하던 일을 혼자 하면서 수확 시기를 놓친 복숭아를 고스란히 바닥에 버려야 했다. 평소 손을 보태던 빈씨의 어머니 최남이씨(78·동촌댁·청도로 시집온 할머니들은 이름 대신 택호를 부른다)와 아내 이은주씨(47·쌍둥이 엄마)는 송전탑 공사가 재개되자, 공사 현장으로 ‘출근’했다.

대구 시내에서도 하루 세 대 오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덜컹이며 들어와야 하는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1리. 5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에 34만5000V 초고압 송전탑 3기(22·23·24호)가 들어섰다. 신고리 핵발전소에서 시작하는 송전선로는 밀양을 거쳐 청도로 이어진다. 풍각과 각북 두 개 면에만 40기가 설치됐다.

ⓒ시사IN 이명익9월17일 경북 청도 삼평1리 송전탑 공사장 정문 앞에서 마을 주민들이 식사하고 있다.
22호와 23호 송전탑은 삼평1리 마을과 농토 720m를 가로지른다. 23호는 땅에 가깝게 세워져 다른 송전탑과 높이를 맞추기 위해 100m가량 더 높게 지어졌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23호 송전탑을 땅으로 묻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 23호 송전탑은 크레인으로 송전선을 끌어올릴 준비를 하고 있다. 공사장은 2m가 훌쩍 넘는 검은색 차광막으로 가려져 있다. 2012년 7월, 한국전력공사(한전)는 23호가 들어설 부지를 포클레인으로 밀었다. “(당시) 논 주인인 아랫마을 주민은 한전에 세를 주고 부산으로 이사를 가버렸다”라고 이어댁 이억조씨(75)는 말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7월21일 새벽 5시, 한전이 마지막 남은 23호 공사를 재개하면서 할머니들이 김밥처럼 이불에 돌돌 말려 들려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공사장에는 울타리가 쳐졌고, 철탑은 순식간에 들어섰다.

9월16일 오후 2시, 할머니 7명이 공사장 정문 앞에 목욕탕에서 쓰는 플라스틱 간이 의자를 깔고 앉았다. 내리쬐는 가을볕 아래 이들은 한전 직원의 출입을 막느라 애썼다. 그래 봤자 평균 나이 75.4세인 할머니들이 할 수 있는 건 꾸중뿐이다. 가촌댁 조봉연씨(79)는 “공사하는데 이리 숭카서(숨겨서) 공사하는 거는 내 살믄서 처음 본다. 떳떳한 기 없으니까 숭쿠지”라고 다그쳤다. ‘한국전력’이라 적힌 노란색 조끼를 입은, 공사 현장 입구를 지키는 사내 5명은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공사장 안에서 크레인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변홍철 청도 345㎸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대책위) 집행위원장은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돈으로 주민을 매수하려는 한전의 공사에 연루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크레인 시동 끄세요”라고 말했다. 이어댁이 이어 말했다. “차 움직이지 마. 말 안 듣나. 돈 달라고 한 적 없이도 돈 주고. 말 참 안 듣제.”

같은 시간, 청도경찰서 정보보안과의 한 형사가 스타렉스 차를 몰고 농성장을 찾았다. ‘돈 봉투’를 받은 할머니에게 소유권 포기 각서를 쓰게 하려고 파출소로 데려가기 위해서다. 이어댁은 “누가 돈 달라캤나. 왜 우리를 이리 오라 저리 가라 하노”라고 말하며 차에 올랐다. 파출소에 도착한 이어댁은 ‘다음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5만원권 지폐 매’라고 쓰인 소유권 포기 확인서에 오른쪽 엄지로 지장을 찍었다.

“경찰 공사도 아닌디 왜 경찰이 나서서 돈 주노”

청도경찰서 정보보안과 전 아무개 계장이 이어댁을 찾아간 건 9월7일, 명절을 앞두고 고향을 찾은 큰아들에게 인사하러 왔다던 전 계장은 큰아들과 단둘이 두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돌아간 직후, 큰아들은 이어댁에게 “송전탑은 나라 사업이라 진행해야 한단다. 돈도 엄청 들어갔단다”라고 말했다. 이틀 뒤 전 계장은 5만원권 60장이 든, ‘청도경찰서장 이현희’라고 적힌 봉투를 집에 두고 갔다. 부부가 함께 반대 활동을 하는 가족에게, 이연희 서장은 추석 선물이라며 500만원을 넣은 한과 세트를 건네기도 했다.

이 서장이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 7명에게 1700만원을 돌린 사실이 밝혀지자, 9월12일 그는 직위 해제되었다. 이 서장은 “치료비 명목으로 한전의 위로금을 대신 전달했다”라고 해명했다. 경찰은 이 중 1100만원이 이 아무개 전 한전 대구경북건설지사장과 그의 부인의 은행 계좌에서 나온 사실을 밝혔다. 이 전 지사장은 경찰에서 “시공사가 나중에 보전해주기로 했었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나머지 600만원 역시 시공사가 직·간접적으로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청도경찰서 정보보안과 한 형사는 “경찰이 주민에게 돈을 돌린다는 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우리들도 이 서장에게 배포하면 안 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서장의 뜻이 완고했다”라고 말했다. 대책위는 이 전 서장과 이 아무개 한전 대구경북건설지사 전 지사장 등 5명을 뇌물 공여와 업무상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시사IN 이명익‘돈 봉투’ 사건이 불거진 후에도 한전 직원과 마을 주민 사이의 승강이는 그치지 않는다.

‘할매’들은 저마다 돈 봉투 사건에 대한 품평을 했다. “경찰 공사도 아닌디 왜 경찰이 나서서 돈 주노. 한전이 시킨 기제” “이 서장은 화약을 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들어간 기다” “이 서장이 잘해볼라고… 우리한텐 몬때게 하드니 한전한테는 착해빠졌다카이”….

‘돈 봉투’ 사건이 불거진 후에도 공사장 앞에서 벌어진 한전 직원과 할머니들 사이의 ‘정문 출입 전쟁’은 그치지 않았다.

9월16일 오후 4시, 한전 직원과 하청업체 직원 40명은 교대하기 위해 정문을 열었다. 할머니들은 바깥으로 향하는 공사장 뒤쪽 논길을 두고 마을로 난 정문으로만 출입하려는 한전 직원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법적으로 한전 직원이 정문으로 출입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다만 “할매들 마음을 고려해 안 보이게끔 다녀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여느 때와 똑같이 ‘제압’은 10분 만에 완료됐다.

오후 6시, 공사장에서 또다시 밖으로 나오려는 한전 직원 20명을 할머니는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러자 한 직원이 ‘할머니가 출입을 막는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는 경찰에 “위에서 정문으로만 통과하라고 방침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이날 밤 9시 새로 부임한 송준섭 청도경찰서장은 단정하게 제복을 입고 찾아와 “교통사고 나지 않게 조심히 시위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10분 만에 돌아갔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