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던 아들(남윤철 전 단원고 교사·35)은 소식이 없다. 매년 명절이면 고향인 충북 청주에 와서 어머니 송경옥씨(61)를 도와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날라주던 그다. 송씨는 아들이 없는 추석, 차례 지내기를 포기했다. 다니던 성당 신자들이 보내준 음식으로 명절 분위기를 낸 게 전부다. 그녀는 충북 청원군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된 아들의 산소와 성당에서 명절을 조용히 보냈다.

단원고 2학년6반 담임이자 영어 선생님인 윤철씨는 세월호 승객이었다. 송씨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학생이 전원 구조되면 윤철이도 나오겠지만 못 나오는 학생이 있으면 윤철이가 안 나올 텐데…’라고 생각했다. 제자를 두고 살아서 돌아오라고만 바랄 수 없는 게 교사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이었다. 4월16일, 진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송씨는 남편(남수현씨·62)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안 나오겠지?” “…안 나오지.” 이튿날, 윤철씨는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송씨는 사고 초기만 해도 ‘전에 없던 큰 사고가 일어났으니 정부와 국회에서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믿었다. 참사 이후 5개월이 지났지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아직까지 답보 상태다. 정치권에서는 ‘교통사고일 뿐’이라거나 ‘그만 떼쓰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자식 잃은 마음을 다독이기에도 힘든 시간에, 상처가 되는 일들이 늘었다. 인터넷 카페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 회원들은 거리에 나와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의 동조 단식을 조롱하는 먹을거리 집회를 열었다. “(특별법이 제정된다고 하더라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금전적인 보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아들의 죽음이 빛바래지 않고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데 영광스러운 밑받침으로 쓰이게 하고 싶다. 그게 유가족에게는 가장 큰 보상이다.”

ⓒ시사IN 신선영고 남윤철 교사 어머니 송경옥씨가 휴대전화 속 아들 사진을 보여줬다.
송씨는 세월호 유가족이 한뎃잠을 자는 국회와 광화문, 청와대 앞에 가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 10명이 남아 있는 진도에 가보지 못해 큰 빚을 진 기분이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함께 돌보고 있는 까닭에 농성장에도 가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친정어머니는 급성 심부전증으로 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도 송씨는 지난 6월26일, 아들이 담임을 맡았던 2학년6반 학부모들과 함께 대구에서 진행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하며 짧게나마 마음을 보탰다.

진도에 남겨진 실종자 가족과 국회, 광화문, 청운동 거리에서 생활하는 가족을 위해 그녀는 매일 기도한다. 특히 윤철씨 반의 제자 영인군과 현철군은 지금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두 제자를 생각하면서 얼른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빈다. 송씨 대신 그의 딸이자 윤철씨의 누나 남 아무개씨(37)가 두 차례 진도에 들러 봉사를 했다. 누나 남씨는 동생의 사고로 16년간 살던 오스트레일리아 생활을 정리하고 한 달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실한 천주교 신자인 송씨 가족은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만남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 8월14일 프란치스코 교황 영접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윤철씨가 머물던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가 쓰던 옷가지와 책은 그대로였다. 아들 윤철씨(세례명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었다면 교황을 만나리라 상상도 못했을 일이었다. 이튿날 오전, 비행기에서 내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며 송씨(세례명 모니카)와 아버지 남씨(세례명 가브리엘)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서럽게 우는 송씨 앞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걸음을 멈췄다.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왼손을 가슴에 얹어 오랫동안 기도했다. 교황은 “가슴이 아픕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송씨는 “감사합니다. 함께해 주세요”라고 답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녀간 지 한 달이 지났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교황의 메시지를 지혜롭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라고 송씨는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 가운데 ‘회개’ ‘용서’ ‘화해’를 떠올려 세월호 참사에 적용했다.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진실을 규명하는 데 노력한다면, 유가족은 사랑과 관용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화해를 통해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사진공동취재단8월14일 서울공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인 송경옥씨의 손을 잡고 기도해주었다.
바다 때문에 보지 못했던 영화가 준 깨달음

송씨는 장례식장에서 사고 직후 윤철씨의 마지막 모습을 본 생존 학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깨까지 물이 찼는데도 난간에 매달려 학생에게 구명조끼를 던지고, 갑판까지 올라갔다가 학생을 구하기 위해 다시 선내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의 희생 덕분인지 2학년6반 생존자는 갑판에서 가까운 방을 배정받은 1반 다음으로 많은 13명이었다. “역시,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다. 의로운 모습으로, 교사의 본분을 다하며 자기 길을 갔다. 고맙고 대견하다….” 4월20일 발인 직후 아버지 남씨는 윤철씨가 남긴 울림을 기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구하는 〈시사IN〉 기자에게 “교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다. 발견되지 못한 교사들도 윤철이처럼 학생들을 구조하다 사망했을 것이다. 여전히 실종자가 많다. 먼저 시신을 찾은 게 미안할 따름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했었다.

윤철씨는 ‘100% 교사’가 되고자 했다. 그는 간혹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나는 귀한 아들이지요? 학생 때문에 힘들거나 속상할 때 ‘저 학생도 부모에게는 귀한 아들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마음으로 학생을 보니 ‘함부로 대하면 안 되겠다’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례식장에서 만난 윤철씨의 제자들은 기자의 인터뷰를 피하면서도 그가 어떤 스승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2008년 그가 부임했던 안산시 대부중학교 제자는 “1학년 때 가출한 나를 찾으러 다니셨다. 한번 잡은 손을 놓지 않는, 차별 없이 학생을 대하는 선생님이셨다”라고 말했다. 윤철씨는 다문화 가정이 많은 안산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지난해 7월, 한 대학에 편입해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딸 준비를 하기도 했다.

송씨는 참사 이후 바다가 나오는 영상이나 그림을 보지 못해 영화 〈명량〉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가 화제에 오르면서 문득 주인공 이순신 장군의 명언 ‘사즉생 생즉사(死卽生生卽死)’를 떠올렸다. 송씨는 슬프게도 아들의 죽음을 통해 그 의미를 완벽하게 깨달았다. 아들 윤철씨는 죽었지만, 그는 가족과 시민들 가슴에 남았다. 남편은 송씨에게 “윤철이가 죽은 이후, 아들 생각을 안 하고 지내는 날이 없으니 오히려 더 우리 가까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추석에 찾은 아들의 산소에는 누군가 가져다놓은 꽃과 편지가 가득했다. 아크릴판을 세워 비에 젖지 않도록 엽서와 사진을 담아놓고, 초상화를 그려두었다. 두 사람은 국가가 하지 않는 애도와 위로를 이방인인 프란치스코 교황과 여러 시민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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