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기자가 1995년부터 송병준의 매국 행적과 매국 장물, 후손들의 반사회적 행태를 고발 추적한 각종 특집 기사들.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민족 반역자로 꼽히는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 송돈호씨(62)가 ‘민족정기 확립’에 도전장을 냈다. 2005년 12월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위헌이라며 법 시행 1년8개월여가 지난 5월18일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특별법에 따라 친일재산조사위원회(위원장 김창국)를 구성해 지난 2년여에 걸쳐 대표 매국노를 선별하고, 그들의 매국 장물을 국고로 환수해왔다.

송병준의 후손 송돈호씨는 이재훈 변호사를 통해 낸 헌법소원 소장에서 “특별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재판받을 권리, 재산권 등을 침해한다”라고 주장했다. 세부적으로는 특별법이 친일 행위자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헌법에서 금지한 연좌제 성격의 책임을 지게 하고, 국민을 친일파와 비친일파라는 이분법 논리로 차별대우해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과연 송병준 후손의 주장은 타당하고, 그가 헌법소원으로까지 친일 재산 환수에 맞설 수 있을 만큼 떳떳한 길을 걸어왔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송병준과 그의 후손이 걸어온 이력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한말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지낸 송병준은 1910년 일진회 총재 자격으로 한·일 병합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 공로로 송병준은 일본 왕실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고, 일제 식민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왕실 및 국유재산조사국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현재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송병준 명의로 남아 있는 토지 수천만 평은 바로 이 기간에 조성한 것이다.

일제의 보호 아래 부귀영화를 누리며 식민침탈 정책에 앞장서온 송병준은 1925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가 죽은 뒤 귀족 작위와 재산은 아들 송종헌에게 습작, 상속되었다. 그는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송종헌은 상속받은 전국 각지의 송병준 토지를 관리하며 용인군 내사면을 무대로 전국적 세도가로 행세했다.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씨는 일본에서 메이지 대학을 나온 뒤 1930년대에 홋카이도에서 땅을 불하받아 ‘조선목장’을 경영했다. 이번에 헌법소원을 낸 송돈호씨는 바로 송재구씨의 아들이다.

〈시사IN〉 기자가 1995년부터 송병준의 매국 행적과 매국 장물, 후손들의 반사회적 행태를 고발 추적한 각종 특집 기사들.
광복은 당대 최대 친일 세도가로 행세하던 송병준 일가에는 파멸을 뜻했다. 송종헌은 광복 직후 살던 용인군 내사면 추계리 99칸짜리 대저택과 전답을 급히 처분하고 서울로 피신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체포돼 조사를 받던 중 이듬해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의 손자로 해방둥이인 송돈호씨는 한때 건설회사를 운영하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송병준 토지 상속에 발벗고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송병준 후손의 땅찾기 놀음은 크고 작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가 토지 브로커들과의 알력 끝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가 하면 송병준 명의로 남은 땅문서를 매개로 각종 사기극이 판을 쳤다. 송병준 땅찾기에 조직적으로 뛰어든 토지사기단은 약 100명. 이들은 송병준 후손 송돈호씨와 짜고 사회단체에 기증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국가 등을 상대로 소유권 반환소송을 제기했지만 사실은 조직적 사기극이었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자 경찰청 특수수사과에서는 한때 특별팀을 운영해 송병준 토지사기단에 대한 전담 검거 작전을 펴기도 했다.

후손과 토지사기단이 결탁한 이권 놀음

이들은 서울 상암동 일대 60여만 평,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 30만 평, 강원도 금화군 금란면 갈현리 일대 임야 200여만 평, 경남 밀양군 초동면 임야 79만여 평 등이 송병준 땅이라며 후손과 위장 기증동의서를 써서 소송놀음을 벌여나갔다. 송돈호씨는 토지 브로커에게 위임장을 써주고 그 대가로 건마다 수천 만원에서 수억원대 착수금을 받았다. 브로커들은 별도로 변호사를 선임해 토지를 위장 기증받을 단체로 하여금 송돈호씨를 상대로 ‘위장 소송’을 제기하도록 했다. 이 과정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위장 기증 단체가 승소한 다음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내 찾아가는 수법을 쓴 것이다. 후손과 땅을 반반 나눠 가지는 조건이었다.

〈시사IN〉(당시 〈시사저널〉)이 송돈호씨와 토지사기단의 이같은 반사회적 행태를 추적해 고발하는 특집 기사를 잇따라 내보내자 송돈호씨는 한때 선조의 땅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결국은 또 다른 사기극으로 판명나고 만다. 1997년 여름, 송돈호씨의 배다른 형 송준호씨는 국회 제정구 의원(1999년 작고)을 찾아가 동생 송돈호씨와 함께 송병준 명의의 땅에 대한 국가헌납 동의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동의서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송돈호씨는 잠적한 뒤 몰래 송병준 땅찾기 소송 행각을 계속했다.

친일단체 일진회 총재 시절의 송병준(오른쪽)과 이용구(왼쪽).
2001년부터 송돈호씨는 이재훈 변호사를 만나 부평 미군기지 반환 부지에 대한 소송에 집중한다. 특별법이 통과될 무렵 기자와 만난 이 변호사는 “후손이 땅을 찾으면 기증한다는 조건을 달아 소송을 맡았는데 특별법이 생겼다. 위헌소송을 내서 특별법 위헌판결을 받아내겠다. 어차피 재판에서 지더라도 그 땅은 국가가 개발하게 돼 있으니 송병준 후손이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개발권을 따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친일파 자손은 조상 얼굴도 모른 채 저주받은 채 살아가는데 자기라도 나서서 후손의 용서와 화해를 유도하고 땅을 찾아 좋은 일에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헌법소원을 낸 송돈호씨는 지난해 4월 국유지 상대 사기 행각을 벌인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가 사기극을 벌인 땅은 부평 주한 미군기지 13만 평이었다. 그는 이곳이 증조부 송병준의 땅인데 미군기지가 이전하면 자기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속여 그 중 약 5000㎡에 대해 건설업자 두 명과 아파트 부지로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2억200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검찰 수배를 받았다. 그 뒤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반환소송을 냈다가 패소하자 송돈호씨는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지난해 체포, 구속된 것이다. 감옥에 있던 송돈호씨는 최근 이재훈 변호사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다. 이어 두 사람은 친일재산 환수관련 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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