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우리도 다윤이 찾아서 안산으로 갈 거예요.” 단원고등학교 2학년2반 다윤이의 어머니 박은미씨(44)는 작별 인사를 꼭 이렇게 했다. 박씨와 다윤이 아버지 허흥환씨(50)는 8월1일 현재 108일째 진도에 머물고 있다.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 10명의 가족이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에 흩어져 지낸다.

다윤이 어머니 박씨의 몸은 더 가냘파졌다. 150㎝ 조금 넘는 키에 몸무게 40㎏ 정도인 박씨는 연약해 보였다. 그녀는 오른쪽 귀에 작은 주황색 귀마개를 꽂고 있었다. 박씨는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다. 2년 전부터 머릿속에 자라는 일곱 개의 혹이 청신경을 눌렀다. 이미 오른쪽 청력은 거의 잃었다. 여럿이 대화하는 소리는 머릿속에서 웅성웅성 하는 것으로 느껴질 뿐이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머리가 아프다. 진도체육관에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에도 귀가 아파 귀마개로 ‘처방’했다.

병 때문에 바다를 향해 ‘다윤아, 돌아와’라고 울부짖어 보지도 못했다. 해경에게, 정치인에게 큰소리치며 손가락질도 해보지 못했다. 그녀는 사고 발생 당시, 진도체육관에 와서 누워만 지냈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병원에 열흘 동안 입원했다. 허약한 몸은 점점 더 나빠졌다. 7월 초에도 일주일간 다시 입원해 약물치료를 받았다. 그러고도 퇴원하자마자 진도체육관을 지켰다.

모든 건 다윤이를 찾은 다음으로 미뤘다. 의사는 수술이 필요하지만, 워낙 어려운 수술인 데다 회복하는 데 수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수술이라서 혹시라도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다윤이가 나올까 봐, 박씨는 아예 수술을 미뤘다.

ⓒ시사IN 신선영아직 수습되지 못한 10명의 실종자 중 한 명인 허다윤양의 어머니 박희경씨(왼쪽)가 팽목항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박씨는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다.
그녀는 사고 당일인 4월16일 오전 9시30분께 병원에 있었다. 검진 결과를 듣고 나오면서 사고 소식을 접했다. 회사에 있던 남편 허씨가 먼저 진도체육관으로 향했다. ‘전원 구조’ 문자와 달리 생존 학생의 명단에 다윤이 이름은 없었다. 진도체육관에도 다윤이는 없었다. 팽목항으로 이동한 뒤 그때부터 기다림이 시작됐다. 마지막 10명 안에 다윤이가 있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았던 아버지 허씨는 사고 수습을 지켜보다가 사흘째 숨이 턱 막혔다. 17년 전, 다윤이를 낳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지금은 하루 한 갑가량 피운다.

허씨는 자주 진도체육관 뒷산에 오른다. 남들 보는 눈이 싫어서 진도체육관 내부에 갖춰진 체력단련실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뙤약볕에도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며 굳이 땀을 낸다. 분노와 울분을 풀어내는 그만의 방법이다. 또 다른 실종자인 영인군 삼촌 김 아무개씨(39)도 “눈물이 날 것 같으면 운동하러 간다”라고 말했다. 7월26일 태풍 때문에 수색이 중단된 날, 김씨는 실종자 가족을 모아 산에 올랐다. 하지만 다윤이 엄마 박씨는 뙤약볕 아래에서 무리를 한 탓인지 20분 만에 내려와야 했다.

그런 그녀가 세월호 참사 99일째인 7월23일, 처음으로 바지선에 올랐다. ‘엄마가 가까이 가면 아이가 나오지 않을까.’ 주변에서 말렸지만 아이를 만나러 가겠다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기다림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바지선을 타기 위해 배를 타고 1시간30분간 들어갔다. 물살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멀미약을 들이켜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참으면서 버텼다. 그녀는 바지선에 올라,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잠수사들에게 연방 고개를 숙였다. 사고 지점은 작은 부표로만 남겨져 있었다. 진도체육관으로 돌아온 박씨는 “힘들지 않았다” “괜찮았다”라고 웃으며 인사했다. 아이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다른 실종자 가족들은 더 묻지 않았다.

ⓒ시사IN 송지혜허다윤양은 유치원 교사를 꿈꾸던 살가운 아이였다.
이렇게 버티는 데는 주변 사람의 도움이 컸다. 다윤이네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교회 지인은 허씨를 위해 안산에서 진도까지 채소와 과일을 가지고 왔다. 먼저 아이를 찾은 같은 반 솔·민지·지나 아버지들은 장례를 치른 뒤에도 자주 진도체육관에 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민지 아버지 윤상두씨(52)는 잘 안다. 그는 “누군가는 마지막이 될 텐데 ‘그게 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오면 숨이 안 쉬어진다”라고 말했다. 민지는 12번째 희생자로 수습되었다. 같은 반 서우 아버지 조혁문씨(43)는 다윤이 사진을 크게 인쇄해 가지고 왔다. 종이에는 손가락으로 브이(V)를 한 다윤이의 활짝 웃는 모습에 ‘우리 다윤이의 꿈은 유치원 교사!’라고 적혀 있었다.

단원고 2학년2반 다윤이는 유치원 교사를 꿈꾸는 살가운 아이였다. 허씨가 퇴근할 시간에는 늘 전화나 문자를 했다. “아빠, 어디야? 출발할 때 문자해.” 그러고는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다윤이는 학원이 끝나면 “아빠, 지금 끝났어. 데리러 와”라는 문자를 보내곤 했다. 아버지와 딸은 20분씩 걸어서 집으로 오는 동안 아이스크림과 과자 같은 간식을 먹으며 그들만의 데이트를 즐겼다. 일주일에 네 번쯤은 꼭 그렇게 붙어 다녔다. 팔짱을 끼고 등과 어깨를 만지고, 손을 잡는 등 애정 표현을 잘하는 아이였다. 다윤이는 그렇게 평생 줄 정을 한꺼번에 아빠에게 주고 떠났다.

다윤이는 떠났지만 가족들에게 남겨놓은 게 많다. 다윤이는 강아지 깜비를 아꼈다. 깜비는 지난해 여름 부산에 사는 이모가 선물한 귀와 눈이 큰 강아지다. 다윤이는 외식하러 나갈 때나 교회에서 예배를 본 뒤에도 깜비가 혼자 있는 게 걱정돼 후다닥 집에 온 적이 많았다. 수학여행을 가기 직전까지 깜비를 잘 보살펴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했다. 배가 출발하던 날 언니에게 ‘깜비를 잘 보살펴줘’라는 문자를 남겼다. 허씨는 팽목항에 깜비를 데려가면 다윤이가 나올까 싶었지만, 깜비가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포기했다. 이 말을 듣고 진도 주민 정성주씨(39)가 자신의 집에서 깜비가 지낼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박씨와 허씨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이 번졌다. 깜비는 8월1일 진도에 왔다.

유품으로 돌아온 민트색 새 운동화

다윤이는 무엇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 아이가 수학여행을 가기 전 허씨에게 운동화를 사달라고 했다. 다윤이는 민트색을 좋아했다. 양말, 학용품 등 90%가 민트색이었다. 신발 역시 청색과 민트색이 있는 운동화를 골랐다. 한 번도 신지 않은 운동화가, 다윤이가 들고 간 여행 가방 안에 담긴 채 그대로 돌아왔다. 잠수사들이 수거한 가방에는 언니에게 빌린 검은색 모자와 학생증,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엄마가 선물한 알록달록한 지갑 안에 5만7000원이 들어 있었다. 이모가 용돈으로 준 5만원과 아빠가 준 1만원 가운데 다윤이가 빵(3000원)을 사먹고 남은 돈이었다. 유품은 돌아왔지만 다윤이는 나오지 않았다.

허씨의 휴대전화에는 지난해 여름 부산 이모네로 가족여행 간 사진이 저장되어 있다.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다윤이가 활짝 웃고 있다. 휴대전화 단축번호 3번은 여전히 다윤이의 것으로 연결된다. 3번을 꾹 누르자, 다윤이의 사진이 화면에 떴다. 이어서 안내 음성이 들렸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음에 다시….’ 데리러 오라고 먼저 애교를 부리던 아이를, 아빠와 엄마는 100일 넘게 기다리고 있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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