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극장은 실버영화관과 같은 층을 나눠서 쓴다. 그래서 매일 많은 노인과 마주친다. 실버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자연스레 우리 극장에도 출입하거나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덕분에 노인을 둘러싼 담론은 근래 내게 가장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가끔 경악할 만한 일도, 종종 짜증스러운 일도, 때때로 재미있는 일도 벌어진다. 아무래도 쉽지는 않다. 실버영화관의 관객은 서울아트시네마의 관객(및 나와 동료들)과 물리적으로는 한 공간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으로 분리된 별개의 공간에 있는 듯 보인다.

종종 이 벽을 두고 ‘탐험’을 시도하는 분들이 있다. 보통은 질문 세례로 이어진다. 극장 사무실에 뚜벅뚜벅 들어와서 아무나 대답하기를 기대하며 큰 목소리로 질문하기도 하고, 영화 시작 직전 관객들을 입장시키느라 바쁜 직원을 붙잡고 “여기는 뭐 하는 데여?”로 시작하는 질문 공세를 펼친다. 때로는 고성의 반말이 동반된다. 귀가 잘 안 들리시나 보다, 생각은 하지만 계속 고함을 듣는 게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러나 이 질문 공세에서 분명하게 감지되는 것은, 다양하고 더 나은 문화를 누리고 싶다는 욕구다. 나아가 노인 전용 공간을 넘어서서 젊은 층과 어울리고 적극적으로 대화와 교류를 하고 싶다는 욕망도 느껴진다. 여전히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중받고, 사회 안쪽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이분들은 실버영화관에서 행복하신가? 그곳 한쪽에 ‘요즘 것들’이 어슬렁대고 있는 것을 과연 어떻게들 보고 계실까? 이분들의 욕구가 실버 공간의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 충족될 수 있는가? 실버 공간은 자칫, 노인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다른 곳에서 보이지 않게 하는, 또 다른 분리와 ‘게토’의 기능을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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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젊은이 간 교류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이 가진 가치들은 지혜와 경험으로 존중받기보다 청산해야 할 것들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시대가 바뀌면서 함께 변화해온 사회적 규범과 에티켓들이 노인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것일 터이다. 그들 역시 이유 없는 적대와 혐오를 종종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격차가 굳이 ‘해소’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적어도 서로 직시하는 것은 필요해 보인다. 다만 여기서 필요 이상으로 갈등이 불거지거나 과장되는 부분은 없는 걸까, 궁금하다. 이 갈등이 언제까지 ‘싸가지 없는’ 젊은이들을 향해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당연 규범을 강제하는 것으로 봉합될 수 있을까. 노인들 스스로 에티켓을 업데이트하기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노인 문제 환기한 영화 〈수상한 그녀〉도 어정쩡한 봉합

우리는 사회 규범을 다시 배우는 일련의 과정들을 ‘재사회화’라 부르며 그것은 내가 사회에 속해 있는 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노인들이 어느 순간 재사회화의 기회를 놓친 거라면,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공손함을 가장하기보다 재사회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오히려 나이도 계층도 다양한 노인들을 배제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함께 가는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를 위한 기회와 환경이 충분히 주어지고 있는지, 아니 필요성이 공유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노인 문제를 완곡하게 보여주고 치부도 굳이 가리지 않았던 영화 〈수상한 그녀〉도 위대한 할머니의 희생을 강조하며 어정쩡한 봉합으로 끝을 냈다.

매일 다수의 노인 관객을 접하며 느끼는 혼란과 갈등은, 매체에서 흔히 접하는 노인 담론의 범주를 훌쩍 벗어나 있다. 빈곤과 소외에 시달리는 ‘불쌍한’ 노인 아니면 부동산과 재산을 무기로 자식들을 통제하려는 노인, 혹은 어버이연합 노인들의 이야기들에 그친다. 반면 노인들에게 가장 흔히 듣는 소리는 “요즘 것들은…”이다(심지어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된 나도 들었다!).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미 도래한 고령화 사회에 과연 걸맞은 대비인가.

기자명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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