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믿습니다.’ 빛바랜 노란 종이에 담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도 실내체육관 현관을 가득 채운 노란 쪽지들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자원봉사자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취재용 카메라가 빼곡했던 2층에는 카메라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한때 ‘기자의 출입을 금지한다’고 통제하던 체육관 1층은 아무런 제재 없이 드나들 수 있다. 세월호 참사로 아직 뭍으로 나오지 못한 11명(단원고 학생 5명, 교사 2명, 승무원 1명, 일반인 3명)의 가족만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7월18일, 승무원 이묘희씨(56)가 뭍으로 올라왔다. 이로서 남은 실종자는 7월21일 현재 10명이다).

사람이 떠나도 담요는 치워지지 않았다. 남은 가족이 쓸쓸하지 않게끔 일부러 치우지 않았다. 연대와 위로의 이불인 셈이다. 기자가 자리한 2번 출입구 구석에서 ‘2014년 6월5일 상황 브리핑 자료’가 나왔다. 6월5일 이전에 나온 자료와 신문 따위가 가득했다. 6월5일께 실종자를 찾은 가족이 지킨 자리였다. 종이 뒤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심재철 위원장님… 전국 잠수사 동원령을 내리는 것도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87일째인 7월11일 현재, 국정조사 기관보고가 진행되고, 유가족은 서명을 받기 위해 전국을 돌고 있다. 하지만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을 지키는 실종자 가족에게, 시간은 4월16일에 딱 멈춰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7월9일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 11명의 귀환을 바라며 수녀들이 기도했다.
ⓒ시사IN 신선영 7월9일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 11명의 귀환을 바라며 수녀들이 기도했다.

다윤양 아버지 허 아무개씨(50)는 날짜 대신 사고가 난 지 며칠째인지를 센다. 요일이나 시간 따위도 잊은 지 오래다. 다윤이가 없어진 지 85일째, 86일째, 87일째…. ‘100일이 오기 전에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지난 6월24일 다윤이와 2학년2반 단짝이었던 민지가 70일 만에 뭍으로 올라왔다. 민지가 왔으니 다윤이도 곧 오겠지 하는 희망은, ‘딸 바보’ 허씨에게 욕심이었다. 2주가 넘도록 어떤 소식도 없다. 태풍 너구리가 북상하면서 수색은 전면 중단됐다. 바지선과 함정은 모두 대피했다. 아무것도 없는 팽목항 앞바다에는 칼바람만 불었다. 수색 일정이 없으니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5시에 진행되던 브리핑도 중단됐다.

태풍에 대비한 움직임은 재빨랐다. 7월7∼8일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 남아 있던 천막을 모두 철거했다. 진도체육관 주변을 꽉 채운 천막 40개가 없어졌다. 허씨는 슬픔을 꾹꾹 누르는 듯 나직이 말했다. “천막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자원봉사자조차 안 보이니, 텅 빈 것 같네요.”

다윤양 아버지 허씨는 태풍에도 한 가닥 ‘기대’를 건다. 혹시 다윤이가 어딘가에 깔려 있어 지금껏 나오지 못한 거라면, 태풍이 배를 흔들어 다윤이가 떠오를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다윤이 어머니 박 아무개씨는 지병인 신경섬유종 증상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7월7~11일 혼자 남은 허씨를 위해 2학년2반 다윤이 친구 민지·솔·지나·지아 부모들이 진도로 내려왔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2학년2반 다윤이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다윤이 아버지는 진도 실내체육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2학년2반 다윤이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다윤이 아버지는 진도 실내체육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가장 늦게까지 남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
가장 늦게 찾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깊이를 민지 아버지 윤 아무개씨(52)는 안다. 민지는 실종자 11명이 남기 직전 수습됐다. 7월7일 다시 진도를 찾은 윤씨는 한 여경과 손을 맞잡았다. 아이가 죽어 돌아왔는데도, 공손하고 절절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민지가 나왔어요.” 그의 주변에 모인 자원봉사자, 간호사가 그의 손을 오래도록 잡았다. 모순이라는 걸 그도 안다. “내 딸이 죽었는데, 좋다고 표현하는 게 이상한데, 안 나오다가 나왔잖아요. 죽었다고 생각하면 속이 매일매일 썩는 것 같은데, 그래도 나와줬잖아요.” 그는 ‘팽목항 지킴이’였다. 70일 내내 팽목항에서 맹골수도 바다만 바라보았다. 쭈그려 앉아 미동 없이, 하루 세 갑씩 담배를 피웠다. 두 숟가락만 먹으면 얹히는 바람에 밥도 잘 먹지 못했다. 밤이면 소주 몇 잔에 기대 자는 둥 마는 둥했다. 몸무게 8㎏이 빠졌고, 하도 쭈그려 앉아 있어서 허리 통증이 생겼다. 누군가 웃는 것만 봐도 부아가 치밀던 나날이었다. 그가 다시 웃은 건 민지를 찾고서부터다. 293번째로, 민지가 나왔다. 하지만 직접 보지 못했다. 마지막 가는 길, 손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다. 아이의 살결이 흐른다고 했다. 수의조차 입히지 못했다. 비닐에 담아 관에 넣어, 아이를 보냈다.

7월8일, 팽목항은 한산했다. 모든 텐트가 철거된 그곳에는 실종자 세 가족의 임시주택만 남았다. 실종자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던 등대 길에 묶인 노란 리본마저 없었다면, 세월호 참사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엄마·아빠가 매일 차려주던 밥, 운동화, 통기타 따위는 태풍에 쓸려갈까 봐 치워졌다. 경찰은 ‘안전’을 위해 팽목항 입구에 ‘폴리스라인’을 쳤다. 다른 세계임을 알리는 듯 기이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7월8일 2학년2반 유가족들이 다윤이 가족을 응원하러 진도를 찾았다.
ⓒ시사IN 신선영 7월8일 2학년2반 유가족들이 다윤이 가족을 응원하러 진도를 찾았다.

 

자원봉사자 장길환씨(50)가 팽목항에 남은 세 가족에게 필요한 속옷, 먹을거리 등을 챙겨 왔다. 한 가족이 장씨에게 소리쳤다. “제발, 여기로 오라고! 아주 와! 오라고!”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대꾸했지만, 진심이기도 하다. 그는 진도체육관으로 돌아오는 동안 입원 중인 실종자 가족 현철이 아버지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대통령 만난 그 여자아이 부친과 오빠도 아직

장씨는 실종자 가족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사고가 난 4월16일부터 줄곧 이곳을 지켰다. 진도 의신면에 사는 그는, 차로 5분 거리에 불과한 집에 단 한 차례도 가지 못했다. 그가 가꾸는 와송 농장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자식이, 가족이 바다 속에 있는데. 몸이 아픈들 부모가 제 입으로 아프다고 말할 수 있겠나.” 장씨는 눈만 봐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 만큼 실종자 가족들과 가깝다. 그는 진도체육관 물품 창고 소파에서 한뎃잠을 자면서도 버티고 있다.

태풍 너구리의 북상과 세월호 국정조사 때문에 한동안 뜸했던 세월호 참사가 다시 방송을 탔다. 실종자 가족은 진도 실내체육관 앞에 설치된 텔레비전을 말없이 응시했다. ‘서해해양경찰청이, 구조를 위해 떠난 헬기를 서해해양경찰청장을 태워야 한다면서 돌아오라고 했다.’ ‘감사원은 세월호 인가 서류에 승객 수와 화물량이 조작돼 있다고 밝혔다.’ 실종자 가족들이 이런 뉴스를 보며 분노하고 탄식할 것이라는 기자의 예상은 빗나갔다. 눈을 화면에 고정하면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분노도 사라지고, 아이가 돌아오는 것 딱 하나만….” 다윤이 아버지 허씨가 말했다.

실종자 가족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권오복씨(60)는 검은 하늘을 타박하듯 말했다. “물 흐름을 봤을 때 분명히 아직 배 안에 있어. 태풍이 오려면 배를 흔들어서 시신이 뜨도록 하든지, 아니면 방향을 틀든지. 하늘은, 그래야 한다고.” 권씨의 남동생 권재근씨 식구들은 제주로 이사를 가는 길에 변을 당했다. 재근씨(50)와 그의 아들 혁규군(6)이 여전히 물속에 있다. 재근씨의 베트남 출신 아내 한윤지씨는 두 달 넘게 팽목항 시신안치소 냉동고에서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홀로 구조된 권 아무개양은 가족의 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 없이 지내고 있다고 한다.

권오복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가족을 찾은 후 떠났다. 그의 발밑에는 배 안에서 건진 혁규군의 남색 가방이 놓여 있다. 속옷, 운동복, 수건, 과자, 딸기우유 따위가 들어 있다. 가방이 나왔는데도 혁규군 소식은 없다. “아이가 너무 작아서 못 건지는 걸까….” 권씨의 속 타는 마음을 아는지, 진도체육관에서 함께 지내는 하륜 스님은 그에게 염주 두 개와 편지를 전했다. ‘권재근님, 권혁규 어린이 지켜주시고 가정의 품으로 꼭 돌아오게 해 주세요.’

세월호 참사가 난 지 석 달, 실종자 가족은 몸만은 편할 수도 있었다. 정부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가족을 위해 임시주택을 설치했다. 진도체육관에 6동, 팽목항에 10동(범대책본부 사무실·의료지원실 등 포함)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체육관에 남아 있는 실종자 일곱 가족 중 임시주택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원고 2학년6반 박영인군의 외삼촌은 “집에 갇혀 있을수록 아이 생각이 더 많이 나서, 차라리 체육관에 있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체육관이 비는 일도 두렵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사람이 떠나도 체육관의 담요는 치워지지 않았다. 남은 가족이 쓸쓸하지 않게끔 일부러 치우지 않는다.
ⓒ시사IN 신선영 사람이 떠나도 체육관의 담요는 치워지지 않았다. 남은 가족이 쓸쓸하지 않게끔 일부러 치우지 않는다.

 

말이 없던 실종자 가족은 ‘아이들이 어디에 있을지’ 추적하는 일에만 목소리를 냈다. 7월9일, 체육관 입구 간이의자에 앉은 실종자 가족은 머리를 맞댔다. 5월8일 올라온 윤솔양의 아버지 윤 아무개씨(49)는 도면을 샅샅이 훑어봤던 기억을 더듬어, 같은 방에 묵은 다윤양과 지현양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썼다. 지현양 아버지 황 아무개씨도 이미 수백 가지 예상을 한 터였다. 294번째 희생자가 내 아이, 내 가족이 되기를, 아이러니하게도 바라고 있었다.

기자가 조만간 다시 오겠다고 인사를 했을 때 가족들은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그때 여기 없을 거야.” 서울에서, 안산에서, 국회에서 만나자고 인사한 뒤에야 ‘그러자’며 슬며시 웃었다. 탈 없이 태풍이 지나가고 수색이 재개된 7월11일 오전 9시, 다윤양 아버지에게서 이렇게 문자가 왔다. “수색이 재개되어서 기쁘고 또 슬프다.^^ ㅠ.ㅠ 배 타고 현장 나가요. 오늘도 파이팅.”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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