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농이 녹아 흐른 자국만 남았다. 단원고 교문에 놓였던 아이돌 브로마이드도, 음료수도, 과자도, 생환을 바라는 글이 담긴 쪽지도 보전을 위해 치워졌다. 교문에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플래카드만 걸려 있었다.

지난 6월25일 세월호 참사에서 생존한 학생 73명이 71일 만에 등교했다. 학생들은 손목에 ‘리멤버(remember) 0416’이라는 노란색 팔찌를 찼다. 단원고 생존 학생 학부모대책위 대표 장동원씨(44)와 언론 담당 오지연씨(43)도 손목에 노란색 팔찌를 차고 있었다. 참사 이후 처음으로 생존 학생 학부모대책위가 〈시사IN〉과 인터뷰에 응했다. 대책위는 당초 “(생존) 학생들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고 있다. 아이들도 언론에 실망을 많이 했다”라며 인터뷰를 꺼렸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여러 차례 묻고 설득한 끝에 7월1일 단원고 근처에서 인터뷰를 했다.

사회:학생들이 등교하면서 빈 교실에 국화꽃이 놓여 있다거나, 쪽지가 붙은 것을 보았나?

장동원(장):다 봤다.

ⓒ시사IN 조남진단원고 생존 학생 학부모대책위의 장동원 대표(왼쪽)와 언론 담당 오지연씨(오른쪽).
사회:등교한 후에는 그걸 다 치웠는데, 학생들 처지에서는 ‘친구들을 또 이렇게 보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오지연(오):그것 때문에 학부모들도 고심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스스로 결정을 했다. 자기네가 이겨내겠다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따라주었다. 학생들 처지에서는 지금도 세월호가 진행형이다. 아이들이 예전 생활로 돌아가려고 노력을 하니까 우리는 뒤에서 응원 해주고 있다.

사회:등교 전 안산의 한 연수원에서 생활했는데, 어땠는가?

:수업도 듣고 심리 치료도 받았다. 오전 7시50분에 시작해서 오후 4시께 프로그램이 끝났다. 아이들끼리 어울리다 부모가 있는 연수원 숙소에는 밤 12시쯤 돌아왔다.

:연수원 심리 치료와 관련해서는 이것이 정답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치유해야겠다는 정해진 방법이 없었다.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사고를 겪은 적도, 아이들을 상대로 집단 치료를 해본 경험도 없으니, 아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부터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 치료라고 한들 솔직히 학부모 눈에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시사IN 이명익6월25일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사고 71일 만에 등교하고 있다.
사회:어떤 부분이 실망스러웠는가?

:아이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부담감을 먼저 느꼈다. 전문의와 일대일로 치료를 진행한 적도 있는데, 새로운 사람이다 보니 아이들이 거부감부터 나타냈다. 게다가 아이들이 겁에 질려 있고 심리가 불안정한데 상담하는 분들이 ‘배에서 어떻게 했니’라고 자꾸 물었다. 73명이 각기 성격도 다르고 여학생·남학생 다르고, 집안 환경 다르고, 부모도 다 다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취합해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나마 대학생들이 와서 멘토링하는 프로그램을 아이들이 좋아했다.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나면서 많이 참석했다.

:처음에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이 여러 명 왔다. 자꾸 전문가가 바뀌니까 아이들이 한 얘기를 또 해야 하고, 설문지도 한 걸 또 했다. 상담지도 몇십 문항부터 많은 건 500문항짜리도 있었다. 일반 사람도 앉아서 체크하려면 두세 시간 걸리는데 아이들이 상담의가 바뀔 때마다 일일이 체크해야 했고, 그런 부분에서 또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갈 거면, 차라리 한두 분을 모셔서 꾸준하게 받자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조금 나아졌다.

:연수원 첫날 방송인 김제동씨가 와서 아이들하고 두 시간 가까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강의를 해주었다. 아이들한테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줬다. 부모들도 만족했고 선생님들도 같이 들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제동씨가 나중에는 아이들과 함께 공도 찼다.

:교과 과목 수업을 하면서 심리 치료를 접목하자고 했는데, 아이들이 수업하다가 너무 힘들어했다. 잠깐씩 쉬거나 그룹 상담을 병행하기도 했다.

:수업은 거의 못했다.

:73명을 남학생 두 반, 여학생 두 반으로 나눴다. 문과하고 이과로 나누지는 못했다. 오전에 3시간, 오후에 3시간 멘토링 프로그램을 했고, 중간에 상담도 끼어 있었다. 선생님들도 피해자라 상담을 많이 받았다.

사회:아이들이 연수원 생활을 하면서 가장 원한 게 무엇인가? 특별히 해달라고 한 프로그램이 있었나?

:처음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더라. 일단은 (참사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학교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은 아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부모들을 믿었다. 연수원 생활이 2주 정도 지났을 때 이것도 하고 싶다, 저것도 하고 싶다,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라. 연수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음악하고 싶은 애들도 있었는데 연수원에서는 안 되었다. 부모들도 답답해했다.

ⓒ시사IN 신선영5월9일 안산 단원고 2학년 8반 교실 책상 위에 흰 국화꽃이 자리마다 올려져 있다.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 처지에서는 지금도 세월호가 진행형이다.
사회:연수원 들어가는 건 부모들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아는데?

:진도에서 올라왔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를 딴 데로 데려가려고 했다. 대안학교로 전학시켜 자연적으로 치유하려 했다. 그런데 우리 아이만 이렇게 해가지고는 또 다른 트라우마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링캠프’ 비슷한 걸 해달라고 교육청에 제안해서 연수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참사가 터지고 난 뒤 부모들은 전문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이들 앞날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가가 트라우마센터를 만들어주어도 심해지면 정신병자 취급할 텐데, 결국은 부모가 죽기 전까지 아이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아야 된다. 우리도 관련 지식을 쌓아야 하기 때문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사회:방과 후 수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공부하려고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듣고 싶어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한 대학교 학생들과 연결이 되어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해줬다.

:공부 관련해서는 거의 매일 20~30명이 자원봉사를 나와주었다.

:문제는 아이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진행했는데 정작 공부는 못했다. 공부를 안 한 게 아니라 못했다. 그때 아이들도 스스로 놀랐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마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기 정신 상태가 공부하기 위한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아이들이 부모한테 “나 공부 못하겠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사회:학교로 돌아오며 아이들이 편지를 썼는데.

:복귀를 결정하면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선생이 도움을 주었다. 정 선생이 부모들과 상담했는데 학부모들이 정 선생 이야기에 거의 동의하고 감동했다. 교사들 심리 상태도 정 선생이 가장 먼저 문제 제기를 했다. 선생님들도 고통을 많이 받았다. 팽목항 내려가서 학생들 시신 확인하고, 사진도 봤다. 충격이 컸다. 교육청은 그런 선생님들에게 계속 업무 지시만 내렸다. 안산시청에서도 선생님들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만 했다. 그러지 말라고 정혜신 선생이 정리를 해줬다. 또한 2학년을 만나게 될 1학년, 3학년 학생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도 정 선생은 빨리 파악하더라.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대해주세요’ 하는 글을 아이들과 논의를 해서 쓰게 되었다. 글은 순전히 아이들이 썼다. 자기들이 하고 싶다고 했다. 정혜신 선생이 등교하기 며칠 전 단원고에 와서 1학년과 3학년들을 데리고 전체 상담을 했다. 2학년들이 오면 이렇게 바라봐줘야 한다고 미리 알려주었다. 그 뒤 1학년, 3학년들이 자발적으로 2학년들이 쓴 글을 단원고 주변에 뿌렸다.

ⓒ시사IN 이명익세월호 참사 이틀째인 4월17일 단원고 학생들이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사회:아이들 마음이 온전히 담겼다고 보나?

:등교하기 나흘 전에 학부모 대표단과 학생들이 간담회를 가졌다. ‘너희들이 학교에 복귀할 날이 다가왔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정리해서 달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적어 왔다. 아이들에게 약속을 했다. 너희들이 정리한 것은 한 자도 고치지 않겠다. 어떤 얘기든 간에 할 얘기를 다 해라. 그래서 자기들이 직접 작성해서 가져왔고 등교하는 날 학생들이 직접 읽겠다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은 읽지 못했다(6월25일 71일 만에 등교하던 날, 단원고 한 학생이 대표로 나와 호소문을 읽었다. 이 학생은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좀 더 안전한 나라가 되게 해달라, 사람이 진짜 죽을 때는…”이라고 말한 뒤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너무나 서럽게 울어서, 장동원 대표가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한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를 잊지 말아달라”며 대신 읽어주었다).

사회:학교로 돌아온 지 약 일주일이 됐는데 학교 생활은 어떤가?

:아이들 상태를 지켜보고 있다. 학생들이 결정해서 돌아오긴 했는데 지금은 적응 기간이다. 치유를 한다거나 그러진 않고 있다.

사회: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나? 첫날에는 학교 게시판 꾸미기를 했는데.

:첫날, 학생들이 하고 싶다고 해서 교실 꾸미기를 했다. 한 교실에 상담 교사와 교과 교사가 같이 들어와 수업한다.

:지금은 책을 펴고 연필 잡는 것도 쉽지 않다. 지켜보고 있다. 처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학부모도, 교육청도, 학교도 마찬가지다. 뚜렷하게 정리되어서 돌아온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적응하고 싶다고 결정을 내려서 돌아왔다.

사회:학교가 끝나면 집에서는 어떻게 보내나?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잘 논다. 학생들이 원래 집에 오면 말이 없지만 지금은 더 말을 안 한다. 참사 이전과 이후가 확실히 다르다. 잘 놀다가 갑자기 욱하기도 한다. 연수원에 있을 때는 샤워를 못하는 애들도 많았다. 창문에 습기가 차면 무섭다고 했다. 무슨 소리만 나면 주저앉아 우는 애들도 있었다. 다른 학부모들 말을 들어보아도,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 대화가 잘 안 된다.

:방에 들어가면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

:대화를 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부모들도 아이들 상태를 알아야 하니까 말을 자꾸 시키는데, “뭐 했니” “어떤 게 좋았니” 물으면 아이들은 건성으로 대답한다. 깊이 물으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니까 더 물어보지도 못한다. 자기 아이들에게 깊이 못 물어보니까, 다른 학생들은 어떤지 아예 회사를 포기하고 학교로 나오는 부모들도 있다. 그래도 아이들 의견을 많이 존중해주려 한다. 스스로 이겨내야 하니까.

사회:전문가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치유가 효과적이라고 한다.

:쉽지 않다. 부모도 직장이 있고 당장 먹고살아야 되는데 온종일 아이들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다.

:아이들이 함께 있을 때는 괜찮은데 떨어지면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대부분 잠을 못 잔다. 우리가 제일 염려스러운 게 전문가들은 학교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집에 오는 순간 방치된다. 부모들은 직장에 가야 한다. 그러니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면 집에 바로 안 온다. 우르르 친구 집에 몰려가 있다가 저녁 때 데리러 와달라고 연락이 온다. 집에 와서는 방에 들어가 몇 시간씩 있다가 아무 얘기 안 하고 잔다. ‘오늘 뭐 했냐’고 물어보면 짜증부터 낸다. 머리 아프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병원에서 준 약을 먹으면 괜찮아진다. 일종의 우울증 약이다.

사회:학생들은 지금도 세월호 관련 뉴스에 그대로 노출되지 않나?

:다 본다. 부모한테 얘기하지는 않지만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 친구들 사진도 본다. 박예슬양 전시회 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진도 팽목항 상황도 뉴스를 보고 안다. 병원에서는 텔레비전을 보여주지 않았다. 휴대전화까지 차단하면 아이들이 예민해질 것 같아서 그건 놔두었다. 휴대전화로 서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세월호 이야기를 하더라.

:학생들이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니, 뭐든지 하지 마라 하기보다, 자기들이 겪어 나가는 게 옳다고 본다.

사회:세월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장 대표는 어쩐지 모르겠는데 나는 절대 안 되리라고 본다.

:어떻게 돌아가나? 못 돌아간다.

:이게 외상이면 깁스하고 부모가 같이 잡고 다니면 되는데, 내상이라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도 어느 순간에 무엇을 할지 모른다. 회사를 가도 걱정, 자도 걱정이다. 아이가 눈앞에 없으면 더 걱정이다. 낫는다고 해도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부모라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자책감만 쌓인다. 예전에 부일외고 수학여행 때 학생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적이 있다. 생존 학생들이 불안해하니, 부모들이 방문도 뜯고 생활했다고 하더라. 아이들이 자칫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으니 부모들도 무섭다. 잠도 못 잔다. 아이들이 자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 벌떡 일어나 뛰어간다.

사회:부모들 생활은 어떻게 바뀌었나?

:부모들도 아이들 못지않게 힘들어한다. 하지만 아이들 때문에 버틴다. 부모들이 아이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게 제일 마음이 아프다.

:부모들도 수면제를 안 먹은 사람이 없다. 몸은 피곤한데 긴장감을 놓지 못하니까 불면증에 시달린다. 우리는 그나마 아이들이 살아서 아이들에 대한 프로그램을 고민하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들 처지에서 보면, 표현이 맞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사회:지역 분위기도 달라졌을 것 같다.

:세월호 얘기를 아예 안 한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관련되어 있어서 서로 신경이 예민하다. 우리도 아버지들끼리 있다 보면 술 한잔 할 때가 있는데, 주민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안 간다. 피한다. 우리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스럽고 혹시라도 그분들이 실언을 하면 상처받으니 조심한다. 이것이 트라우마다.

:우리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한다. 피해자인데, 희생자가 있다 보니, 살아 돌아온 게…. 학생들도 같이 못 나온 친구들이 있어서 죄인 아닌 죄인이 된 거 같다. 아이들이 세월호에서 빠져나오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보고 나왔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유가족들을 보면 더 눈물을 흘린다.

:대표니까 73명을 자주 만났는데, 아이들 말을 들어보면 구조되었다기보다 혼자 힘으로 빠져나왔다. 물이 차오르는데 아이들이 빨려 들어가는 걸 본 친구도 있다. 갑자기 배가 기울어서 자판기에 눌려 나오지 못한 친구들을 보았다. 뇌진탕을 당해서 숨진 아이도 생존 학생들이 보았다. 그걸 다 보고 나온 것이다.

사회:생존 학생이나 부모 처지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희생자든 생존자든 잊히는 것이 두렵다. 많은 분들이 지금 잊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를 써주시긴 하는데, 우리도 언론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친구들도 있고, 어떠한 얘기든 잘못 전달되면 혹시 희생자 가족들이 기분 나쁘거나 오해할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오늘이 처음이다.

사회:경기도와 안산시가 단원고를 외국어고등학교로 전환하는 안을 정부에 제안했다.

:안산시청하고 경기도에서 대책이라고 그런 안을 검토했나 본데, 그것은 단원고 정상화의 길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회:생존 학생들을 위해 대학교 특례입학 같은 안도 나왔다.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공부가 될 리도 없고, 대학도 모르겠다. 보내야겠다는 부모도 있겠지만 대다수 부모는 지금 대학교 입학이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가느냐가 문제다. 공부? 나는 공부 안 시키고 싶다. 아이가 원하면 공부 안 시키고 좋은 데 가서 놀라고 하고 싶다. 대학 특례입학 한다는 말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를 많이 입었다.

:우리는 대학 특례 얘기한 적 없는데 기사화되면서 악성 댓글이 달렸다. 아이들이 상처를 받았다. 부모들이야 욕을 먹어도 상관없다. 가뜩이나 힘든 아이들이 욕을 먹었다. 심지어 아이들한테 ‘너희들 다 뒈져버리지 여기 왜 나왔냐’ 이런 댓글을 쓴 사람도 있다. 악성 댓글은 고발하려고 한다.

사회:그렇다면 정부나 교육청에 요청할 사항도 있을 것 같다.

:세월호 참사로 한국의 교육은 죽었다. 아이들을 죽여서, 상처를 입혀 보낸 교육이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이가 안 다치고 안전하게 크는 것이 교육이다. 하나만 이야기하면, 전국에 있는 학교들이 의무적으로 안전교육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실질적인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 어느 학부모가 ‘우리는 아직도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만 생각한다’고 하더라. 이제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