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6일 오전 9시께 신태훈씨(56)는 경기도 고양시 고양종합터미널에서 울산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울산에서 플라스틱 제조 사업을 하는 신씨는 가족이 있는 일산 집에서 매주 주말을 보낸 뒤 월요일 오전이면 울산으로 돌아갔다. 주말부부로 지낸 지 17년째. KTX와 승용차를 이용하던 평소와 달리 이날은 버스를 타려고 했다. “차비가 3만원씩이나 더 싸다”고 말하던 신씨의 모습을 아내 황 아무개씨(52)는 또렷이 기억했다.

오전 8시50분, 아내 황씨가 그를 터미널까지 차로 바래다주었다. 화재 신고가 접수된 건 이날 오전 9시2분. 매표소가 위치한 터미널 2층 화장실 앞에서 그는 시꺼먼 재에 뒤덮인 채 발견되었다. 9시10분에 출발하는 울산행 버스표가 그의 다이어리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시사IN 신선영지난 5월26일 처음 화재가 시작된 고양터미널 지하 1층 사고 현장(위). 지하 1층에서는 CJ푸드빌이 발주한 푸드코트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아내 황씨는 오전 9시5분에 신씨에게서 온 전화를 뒤늦게 확인했다. “마지막 순간에 손을 뻗고 싶었을 텐데, 전화조차 받지 못했다…”라며 황씨는 오열했다.

신태훈씨가 터미널에 도착한 그 시각, 지하 1층에서는 CJ푸드빌이 발주한 푸드코트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5월8일 공사를 맡은 건설 업체는 수리를 시작하면서 방화구획을 변경했다. 공사를 하면서 불연성 자재를 쓰지도 않았다. 화재감지기와 비상 전원이 작동하지 않았고, 지하 1층 방화셔터와 스프링클러는 잠겨 있었다. 경찰은 공사 인부가 천연액화가스(LNG) 배관을 연결하는 용접 작업을 하다가 불똥이 튄 것으로 추정한다. 지상 1∼2층 방화셔터와 스프링클러도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 않았다. 버스터미널이 위치한 지상 1∼2층 한편에서는 롯데아울렛이 도장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날 화재로 8명이 숨졌고, 화상을 입은 중상자 5명을 포함해 부상자는 100명에 가깝다. 사고가 난 지 한 달이 다 된 6월24일까지도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 협의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업체들은 ‘선(先)수사 후(後)보상’을 고집했다. 여러 업체가 관여되어 있기 때문에 경찰 수사를 통해 먼저 책임 소재를 가린 뒤, 나중에 보상하겠다는 것이었다. 한 업체 관계자는 “7개 업체가 화재 책임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다. 섣불리 나섰다가 모든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비칠까 봐 (합의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라고 말했다.

건물 실소유자는 다국적 투자사 맥쿼리자산운용

이번 화재와 관계된 업체는 7곳. 건물의 실소유자는 다국적 투자사인 맥쿼리자산운용이고, 맥쿼리는 빌딩 운영을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에 의뢰해 3월부터 임대료 등 건물 관리를 위탁했다. 쿠시먼은 청소·경비·주차 같은 시설관리를 삼구INC에 맡겼다. 대부분의 시설관리는 쿠시먼의 허가를 받아 이루어졌다. 여기에 필요한 행정절차 업무는 수탁사인 한국증권금융에 위임했다. CJ푸드빌은 지하 1층을 통째로 임차해 동양공무에 인테리어 공사를 의뢰했다. 7∼8월 중 푸드코트와 레스토랑을 열 예정이었다. 동양은 가스시설 설치를 명인ENG에 맡겼다. 직접 책임 소재를 다투는 7개 업체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롯데아울렛(지상 1∼4층)은 6월13일 입점을 앞두고 지상 1∼2층에서 도장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지상 2층에서 사망자 7명이 발생했는데도 화재감지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공사 업체는 아직까지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고양시는 “경찰 수사에 따라 책임이 드러나면 롯데아울렛도 피해보상에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서울 한강성심병원 화상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박성린씨를 부인 송은영씨가 보살피고 있다.

6월17일 고양시의 중재로 관련 업체들은 피해보상 협의체를 구성했다. 고양시는 5월28일과 6월16일, 두 차례에 걸쳐 7개 업체에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하기 위한’ 협의체 구성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그 때까지 업체들 간에 책임 공방을 벌이느라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으로 알려졌다.

7개 업체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불똥은 피해자들에게 튀었다. 피해자들은 어떤 업체로부터도 사고 이후 상황에 대한 연락을 받지 못했다. 6월13일에야 7개 업체 대리인이라며 손해사정사가 피해자에게 접촉했다. “보상에 필요한 서류를 갖다 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머니 신복자씨를 잃은 이규윤씨(47)는 “아무런 사과 없이 대리인을 통해 돈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무성의한 태도에 분노가 솟구친다”라고 말했다.

겨우 생존한 부상자의 고통도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박성린씨(38)와 김예빈양(16)은 세 번에 걸쳐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다. 대안학교인 불이학교 교사 박씨와 4학년 김양은 사고 당일, 인천시 강화군 볼음도로 4박5일 체험 활동을 떠나기 위해 터미널에 왔다. 일찍 도착한 두 사람은 비상약을 사려고 터미널 지하상가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가, 지하에서 올라온 시커먼 연기와 맞닥뜨렸다. 이들은 소방대원에 의해 구조되었다.

박성린씨의 아내 송은영씨(39)는 “의사가 앞으로 (남편은) 인공호흡기 없이는 살기 힘들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박씨는 30시간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등 몸 전체의 35%에 화상을 입었다. 이 중 95%는 3도 화상을 입어 피부 이식수술을 받았다. 앞으로 한 차례 더 수술을 받아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정신적 충격이다. 박씨는 “내가 손을 놓쳐서 예빈이가 다쳤다”라며 죄책감에 시달린다. 김양도 만 하루가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양쪽 허벅지와 가슴에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마다 사고의 악몽 때문에 운다. 김양은 아직까지 걷지 못한다. 재활치료에 얼마나 걸릴지, 후유증은 얼마나 심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6월25일 고양시청에서 7개 업체 대표와 유가족·부상자 가족들이 유은혜·김기식 의원(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이 동석한 가운데 처음으로 만났다. 방치된 피해자들 사연이 언론에 잇달아 보도되자, 업체들이 드디어 대화 테이블에 나선 것이다. 이 자리에서 7개 업체 대표는 피해자 가족에게 사과 의사를 밝혔다. 이들은 △수사 결과와 무관하게 ‘충분하고 합당한 선’에서 보상하고 △부상자 후유장애에 대한 보상 지원은 평생 이뤄지도록 하며, △심리치료 지원 △보상 협의를 위한 단일창구 개설 등을 약속했다. 피해보상 협의체의 대표는 CJ푸드빌과 맥쿼리가 맡기로 했다. 피해자 가족은 6월29일부터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신태훈씨의 딸 수진씨는 “이렇게 만난 것으로 이제야 막 한 걸음을 뗐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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