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백승기
한의사 이유명호씨는 주말만 되면 서울을 뜬다. 오랜 지병인 ‘자연 결핍증’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자연 결핍증. 이 난치병은 붙박이 장롱처럼 생활할 때, 엉킨 실타래 같은 스케줄에 시달릴 때, 잿빛 도심에서 스트레스 팍팍 받을 때 슬쩍슬쩍 도진다. 치료법은 하나, 가급적 도시에서 멀리 도망치는 길뿐이다.

서울에서 벗어난 그의 발길이 닿는 곳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얼마 전까지는 제주도로 ‘피신’했고 요즘은 강화도나 그 주변 섬으로 탈출한다. 그가 그곳에서 하는 일은 단순하다. 무조건 두 발로 걷는 것이다. 5월 셋째 주말에도 그는 강화도 북쪽 교동도에 가서 온종일 모래와 풀밭을 밟다 돌아왔다.   

걷기를 즐기는 사람이 이씨만은 아니다. 요즘 주말에 산과 들에 나가보면 찔레꽃처럼 도보 여행자가 지천이다. 5월 중순 제주도 외돌개에서 만난 신미자씨(경기 고양시)도 그랬다. 그녀는 걷기가 좋아 제주도까지 내려왔다고 말했다. 회 맛 좋고 볼거리 풍성한 제주에서 그녀가 한 일 역시 걷기뿐이었다. 신씨는 “사흘 동안 50km쯤 걸었다. 걸으면서 영적인 생각을 많이 한 덕인지 몸도 마음도 가볍다”라며 웃었다.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여행가 한비야씨의 책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이다. 이후 배낭 메고 걷는 여행족이 급속히 늘었고,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의 저자 김남희씨가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5월15일 가수 이문세씨, 탤런트 이태란씨 등과 함께 네팔로 떠난 김씨는 출국 전 “6년째 걷고 있다. 처음 걸을 때만 해도 한국인을 보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놀랄 만큼 많다”라고 말한다.  
       
기부하려 걷는 동호회도 등장

놀라운 증가. 그 와중에 ‘걸으며 기부하는’ 동호회(길 위에서 길을 묻다·blog.daum.net/so nsungil)까지 생겨났다. 모임을 결성한 손성일씨 역시 걷기 마니아다. 2006년 9월부터 그 다음 해 3월까지 2000km를 걸은 뒤, 1km당 100원씩 계산한 금액과 후원금 등을 합쳐 처음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현재 회원은 75명. “도보 여행은 자동차 여행으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유쾌·상쾌한 즐거움을 준다. 그같은 재미를 맛보면서 기부까지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라고 손씨는 말했다.  

ⓒ시사IN 백승기제주 올레 길은 오름 위로, 돌담 옆으로, 화산암 해변 위로 80km 이상 이어진다. 그 길 왼쪽으로 끊임없이 펼쳐진 바다는 땀을 식혀준다.
기부가 아니더라도, 걷기를 통해 얻는 즐거움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들며,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어준다. 한국걷기과학회 이강옥 회장의 걷기 예찬은 좀더 구체적이다. 규칙적으로 걸으면 심장이 단련되고, 체중이 줄어들고, 체력과 면역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장암 같은 암의 발병을 억제하고, 골다공증·당뇨병·심장질환·천식 같은 질환도 완화해준다. 한의사 이유명호씨는 “분노감을 날려주고, 심리적 균형을 잡아주고, 자신감을 준다”라며, 걷기가 인간의 축복받은 권리이자 의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걸어야 즐거움과 효과가 극대화할까. 어디든 상관없다. 그렇지만 만약 멀리 떠날 수 있다면 당장 출발하라. 낯선 만남과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지난해 가을 개통한 제주 올레 길과 얼마 전 일부 구간을 개통한 지리산 도보길도 사람들을 부른다. ‘걷기꾼’마저 매료시킨 그 길을 직접 걸어보았다.         

▒바람에도 흔들리는 제주 올레 길

길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면 삶에 그늘이 진다. 특히 제주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제주 올레 길은 모두 6구간, 80km가 넘는다. 길들은 오름을 오르내리다가 돌담 옆을 지나고, 다시 오름에 올랐다가 바다로 뚝 떨어진다. 제주 올레의 5코스는 가장 최근에 개통한 길로 채 9km가 안 되는 비교적 짧은 길이다. 마른 덤불을 걷어내고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길은 고려시대 무역항이었던 대평포구에서 시작한다.

ⓒ시사IN 백승기5월 말 개통을 앞둔 6구간의 송악산 분화구 모습.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아찔한 절벽이 보인다. 5구간 길은 그 절벽 위를 지나 야트막한 산을 오르내리며 협곡을 지난다. 절벽을 바라보며 발을 내딛는데, 일순간 바람이 치마처럼 펄럭이더니 주변의 나무와 풀을 흔들어놓는다. 바람마저 풍경이라더니, 흔들리는 자연이 왠지 새로웠다. 주름진 마음이 쫙 펴지는 기분. 도시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감상이었다. 마음속에 샘이 생긴 기분이었다.

길은 곧바로 가파른 산길로 이어졌다. 일명 조슨길. ‘제주올레’ 서동철씨에 따르면, 1970년대에 한 할머니가 호미로 쪼아서 낸 길이라 그같이 기이한 이름이 붙었다. 조슨길은 풀이나 나무를 잡고 올라야 할 만큼 가팔랐다. 문명의 발톱이 전혀 닿지 않은 길을 40m쯤 오르자, 드문드문 소나무가 서 있는 너른 벌판이 펼쳐졌다. 기정밭(절벽 위의 밭)이었다. 밭은 오랫동안 묵혔는지 온통 억센 풀뿐이었다. 5월의 숲은 소란스러웠다. 어디에선가 꾀꼬리가 “호 호이호, 호 호이호” 하고 요란하게 목청을 돋웠다.

파란 화살표와 리본이 안내하는 길은 왼쪽 절벽 근처로 이어져 있었다. 넝쿨과 키 큰 아열대식물 때문에 마치 정글에 들어온 느낌. 슬쩍 옆으로 비켜나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100여m 높이. 쪽빛 바닷물이 모든 잿빛 근심을 녹여낼 듯 푸르렀다. 비스듬히 난 길을 따라 기정밭에서 내려오니, 돌담 너머로 푸른 마늘밭과 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청보리를 휘감아 불어오는 바람에 덕지덕지 때묻은 영혼이 씻기는 듯했다.

제주 올레 길이 ‘순례길’인 이유

길은 꼬불꼬불 이어져 안덕계곡을 호젓하게 오르내렸다. 무엇보다 사람의 그림자를 볼 수 없는 점이 좋았다. 뒤돌아보니 중절모 같은 산방산과 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소나무 그늘진 길을 걷는데 새소리가 들린다. 무슨 새일까. 귀 기울여봐도 도통 알 수가 없다. 새삼, 제주의 생태계를 들여다보지 않고 온 게 후회되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지 않던가. 

화순 구릉에 올라서자 엉겅퀴와 찔레꽃, 아카시아꽃 향이 감미로웠다. 그야말로 꽃사태였다. 잠깐 휴식. 따로 방석이 필요없었다. 엉덩이를 붙이면 그대로 꽃방석이 되고 풀방석이 되었다. 어디선가 “휘이쭈, 휘이쭈” 하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앞서가던 서동철씨가 잔가지에서 검은콩 같은 열매를 따먹는다. 서너 알 따서 우물거려보니 입속에 단맛이 맴돈다. 서울과 중부지방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버찌처럼 잠깐 맺혔다가 스러지는 삼동나무 열매라 했다. 걷기가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주고, 낯선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체험케 한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침침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마치 더 이상 사람을 들이지 않겠다는 듯 길이 뚝 끊겨 있다. 아래로는 60~70m 협곡. 뒤돌아서니 말 등 같은 숲길, 좌우 아래쪽으로 컴컴한 협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민감하고 세밀하게 주변을 둘러보니, 제주의 속살을 보는 듯해 기분이 묘했다. 예닐곱 번 제주에 왔지만 북적거리는 관광지만 둘러보고 갔지, 제주의 뒷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너댓 시간 만에 제주를 새롭게 발견한 느낌이고, 나만의 제주를 갖게 된 기분이었다. 땀을 닦고 나니 도시에서의 어수선한 생각도 정리가 되고, 부실했던 몸도 반듯해진 듯했다. 제주 올레 길을 단순히 도보길이 아니라 ‘순례길’이라 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누구나 간세다리(제주 말로 게으른 다리)로 걸으면 올레 길에서 새로운 자신과 제주 속살을 발견할 수 있다. 자, 출발! (‘제주 올레’:www.jejuolle.org)

▒자연미와 인간미 물씬한 지리산 도보길

2011년 지리산 도보길이 목걸이처럼 이어지면 길은 전남·전북·경남을 지나고, 구례·남원·하동·산청·함양 군과 80여 마을을 지난다. 장장 300여km에 달하는 장거리 도보길이다. 길이 열린 것은 지난 4월 말. 옛길·고갯길·숲길·강변길·논둑길·농로길·마을길 등이 뒤섞인 길은 매동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이어진다. 2구간은 의중마을에서 세동마을까지. 

제1 구간은 매동마을 초입에서 시작된다. 안내자로 나선 지리산생명연대 장승준 팀장은 “천천히 갈수록 숲이 더 잘 보인다. 시간당 2~2.5 km로 걷겠다”라고 선언했다. 성질 급한 사람에게는 한심할 정도로 느린 속도였지만, 그의 결정은 옳았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걸으니 지극히 여유롭고, 덕분에 바람개비 모양의 자그마한 탱자나무 꽃과 분홍 싸리나무 꽃을 접안렌즈처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들여다본 호두나무와 감나무의 어린잎은 만지면 병들 것처럼 여리디 여렸다. 

ⓒ시사IN 백승기사단법인 ‘숲길’에서는 매주 수요일·토요일 ‘길동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위). 매회 선착순 20명.
소슬바람이 숲으로 파고들자 “사스샤사” 소리가 났다. 몸을 펼쳐 맑은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제 걷기가 주는 모든 것을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 하나하나 체험하리라. 감자밭을 옆에 두고 뒤돌아서니 저 멀리 지리산의 반야봉(1732m)이 어린아이 엉덩이처럼 언뜻 보인다. 그 아래 뱀사골 가는 길이 뱀 꼬리처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1차 목표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나뉘는 등구재. 남은 거리는 5.3km였다.

지리산 길은 마을을 끼고 돌아서인지 고추밭, 고사리밭, 감자밭, 옥수수밭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호박벌 한 마리가 잉잉거려서 바라보니 바로 앞에 오디를 주렁주렁 매단 뽕나무다! 문득 잊었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혓바닥과 옷자락이 까매지도록 오디를 따먹던 그 시절. 걷는다는 것이 추억하고, 바라보고, 명상하고, 발견하고, 성숙하는 것이라 하더니 맞는 말이다. 

천왕봉을 보며 초록 물이 들다

한참을 무리 틈에 끼어 걷다가 슬며시 뒤로 처졌다. 그제야 사라졌던 바람소리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쏴아아, 툭툭” 하고 들려왔다. 떡갈나무 밑 길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길을 잃을 것처럼 은밀했다. 갈림길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어디선가 샘물 흐르는 소리가 “잘잘잘” 들려온다. 이파리들은 저희끼리 떠드는지 연방 바스락거렸다. 온몸에 초록물이 드는 듯하더니, 이내 행복감이 밀려왔다. 도시에서 홀로 있다는 것은 외로움이지만, 산속에서는 자유롭고 홀가분하고 당당하다는 뜻이다.

ⓒ시사IN 백승기지리산 도보길에는 논둑길(위), 옛길, 숲길, 고갯길, 마을길 등 다양한 길을 지난다. 멀리 지리산 능선이 보인다.
길은 묵정밭 사이를 뱀처럼 굽이치다가 다시 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른편으로 마을이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바람이 소슬하니 걷기에 딱 좋았다. 중황리를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길이 엎드려 있었다. 길가로 손을 내민 찔레 순을 꺾어 입 속에 넣었더니 달큼하면서 알싸했다.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가자 다랑논이다. 논두렁은 아름다웠다.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토지〉의 무대 평사리만큼 넓고 기름졌다. 몬드리안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다랑논둑을 걷는다. 멀리 은사시나무와 포플러나무 이파리들이 연방 바람에 찰랑인다.

드디어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인 등구재. 제법 가파른 언덕에 오르자 뒤따라온 바람도 고개를 넘는지 풀들이 일제히 눕는다. 나무가 휘청거릴 만큼 대차게 부는 바람. 꼿꼿한 나무 아래에 별 같은 양지꽃 무리가 한 우주를 이루었다. 장을 보러, 약을 사러 이 고개를 넘었던 옛 사람들도 이곳에서 땀을 식히며 양지꽃에 반했으리라.

등구재에서 세동마을 쪽으로 조금 내려오자 동물들의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논물을 모아두던 자그마한 연못. 크고 작은 나무에 가려 연못은 더욱 신비스러워 보였다. 수종(樹種)이 풍부한 길을 조금 더 내려오자, 우리네 인생처럼 길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문득 궁금증이 일렁인다. ‘나는 지금 내리막길에 서 있을까, 오르막길에 서 있을까.’

어디선가 “꿔어어잉” 하는 꿩소리가 들려온다. 세동마을 못 미쳐 창원마을 가까이 내려오자 옻나무 밭이 펼쳐져 있다. 나무들은 옻을 충전하는지 불그죽죽했다. 그곳에서 오른쪽 멀리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1915m)이 건너다보였다. 밭둑에 홀로 앉아 천왕봉을 보며 새소리·개구리 소리·벌 소리·물소리를 듣는다. 물소리·새소리를 베고 잠들면 회색빛 의식이 초록으로 물들지 않을까 하고,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창원마을로 내려오는 동안에 계속 천왕봉과 지리산 능선이 넘실거린다. “감이 익는 가을에 보면 더 장관이다”라고 장승준 팀장은 말했다. 자세히 보니 아침 산하고 오후의 산은 표정이 판이했다. 아침 산은 막 세수를 하고 난 듯 신선했는데, 오후의 산은 나른하니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석양이 내리쪼이면 산은 또 어떤 모습일까.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연둣빛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싱그러운 창원마을도 아름다웠다. 처음 열린 지리산 도보길 끝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을 데리고 온 고영규씨(부산)는 “큰 기대 안 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아 내내 즐거웠다”라고 말했다. 백해룡씨(대구)는 “컴퓨터와 공부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의 수학여행 코스를 삼으면 딱 좋겠다”라고 말했다.

다섯 시간 남짓 걸었는데도 무언가 허전한 느낌. 짧은 거리 때문일까, 아니면 외로움이 지나쳤던 걸까. 여러 사람과 걸어서 나만의 감동과 리듬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음에 오면 길도, 지리산도, 여행자도 다른 모습이겠지? ( ‘숲길’:www.trail.or.kr)

기자명 오윤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nom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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