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

산티아고 길에서 품은 소망은 네팔의 설산을 오르면서 더 절실하고 단단해졌다. 산티아고 길과 네팔은 각기 다른 아름다움과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두 곳에는 한결같이 바다가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어느 곳을 가든지 늘 푸른 바다를 멀리서라도 볼 수 있지 않은가.
언젠가, 반드시 살아생전에 만들고 말리라는 생각은 더 늦기 전에, 자동차 길이 더 생기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쪽으로 수정되었다. 하지만 나 혼자 다닐 길이 아니기에,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길의 효용성을 검증받고 공감의 폭을 넓혀야만 했다. 틈만 나면 제주에 걷는 길을 만들겠노라고 떠들고 다녔더니, 주위의 여자 선후배들이 맨 먼저 반응을 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가서 걸어보자!”

일종의 ‘테스팅 마켓’(제품 출시를 앞두고 소비자의 반응을 시험해보는 시장)인 셈인데, 어디로 이들을 데려간담? 망설이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단연 서귀포 칠십리였으니까.
서귀포! 그곳은 내게 영혼의 자양분을 공급하고 뼈와 근육을 키우고 단련시켜준 곳이었다. 어머니가 단체 기합용 매를 들라치면 가파른 기정(절벽을 뜻하는 제주어) 길을 타고 쏜살같이 천지연으로 도망치곤 했다. 그곳 내팡돌에 앉아 하릴없이 뺑이를 따먹으면서 얼른 어른이 돼서 먼 곳으로 떠나기를 얼마나 소망했던가.

서귀포 칠십리 해안을 휘돌아 걷노라면

여름이면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을 걸어 자구리 바닷가, 이중섭의 그림에 등장하는 벌거숭이 아이들과 게가 어우러져 노는 그곳으로 멱을 감으러 다녔다. 양은 세숫대야에 달랑 팬티 한 장, 운 좋은 날엔 참외 하나쯤 더 넣고서. 한나절 물속에서 첨벙거리다가 이를 덜덜 떨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제서야 바다로 오는 친구가 꾀면 자구리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만큼 남국의 태양은 강렬했고 길은 한없이 멀었다.

어른이 된 뒤 찾으니 그 길은 싱거우리만큼 짧아서 서운했다. 흙길은 거의가 콘크리트로 덮이거나 수입산 나무로 단장되었지만, 여전히 서귀포 바다는 푸르렀고 그 바다 위의 섬들은 그림 같았다. 아니, 길은 변했어도 산천은 더 아름답고 정겨웠다. 열망하던 도시에서 치솟은 잿빛 빌딩과 아파트 숲에 치이고 시달린 끝에야 제주 바당(바다의 제주어)이 주는 위안과 평화를 깨닫게 된 내게는…. 서귀포 칠십리 길을 걷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사하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마침내 3월 초순 보슬비가 내리는 날, 여자 열  명이 보목리 검은여(여는 바닷가 큰 바위를 뜻하는 제주어)를 출발했다. 색깔이 각기 다른 우산을 쓰고서. 촉촉이 젖어 검은빛을 더한 검은여의 풍경은 고혹적이었다. 검은여-소정방폭포-정방폭포-자구리 해안-서귀포 부두-천지연-남성리-외돌개까지(‘제주 올레’ 두 번째 코스에 해당한다) 여자 열 명은 가끔 멈춰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떠는 것 외에는 마냥 걸었다. 빗발은 세차지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오락가락, 변덕스러운 날씨조차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도보여행자라고 미리 못 박아둔 덕분에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서너 시간에 고즈넉한 칠십리 해안길에서 마주친 사람은 빨래를 걷는 할머니와 어구를 걷어들이는 어부 등 서너 명도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외쳤다. “이 멋진 길에 걷는 사람이 왜 우리밖에 없는 거야? 오늘 아침 비행기에 탔던 관광객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내 어린 시절 1960~1970년대의 서귀포는 신혼부부의 파라다이스, 도보여행자들의 메카였다. 골목마다 여관이 있었고, 사람들은 주민이건 여행자이건 느릿느릿 걸어다녔다. 귤림여관, 장춘여관, 유림여관 근처에는 배낭을 멘 여행자가 무리지어, 혹은 혼자서 신발끈을 풀고 있었다.

ⓒ시사IN 한향란사단법인 ‘제주 올레’는 지난 3월 제주 성산읍에서 말미오름, 종달리 소금밭, 오조리 해안도로, 성산 일출봉을 거쳐 섭지코지에 이르는 15km 걷기 행사를 개최했다. 걷기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시흥 해안도로에서 ‘제주 바당’을 감상하고 있다.
헌데 제주 곳곳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거미줄처럼 생겨나면서 서귀포에는 도보여행자는 물론 하룻밤 묵어가는 여행자도 드물어졌다. 여유 있게 휴식을 취하려고 떠나는 여행에서조차도 ‘빨리빨리’ 섬을 한 바퀴 돌고, 우후죽순 생겨나는 무슨 무슨 박물관이나 놀이시설을 ‘하나라도 더’ 보려는 속도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빗속에서도 여자들은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마침내 골인 지점인 외돌개에 도착해서 그곳 찻집에서 솔숲에 내리는 비를 ‘즐감’하며 젖은 몸을 녹였다. 한 선배 언니가 말했다. “제주를 워낙 좋아해서 열댓 번도 더 왔는데, 걸어보니까 그동안 다녀간 게 다 헛거였더라고. 겉만 봤지 속살은 못 봤지 뭐냐.”

그랬다. 걷는다는 건 그곳의 속살, 고갱이를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주위의 뜨거운 반응을 확인하고 나자 ‘제주 걷는 길’ 만들기에 깊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위기에 처한 제주 관광의 새 활로를 찾으려는 지역 주민들에게도, 환경을 보호하고 유지하면서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는 제주 올레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올레의 최초 조력자들을 규합했다. 40년 친구 허영선 시인, 제주가 좋아 제주로 이주해온 시사만화가 김경수 화백이 그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길을 답사하고 올레 코스가 하나씩 확정될 때마다 그 길에 대한 정보를 ‘간세다리의 바당올레 하늘올레’라는 팸플릿에 담아내기로 했다. 제주자치도가 그 일에 필요한 최소한의 재정적 지원을 약속한 것도 일을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나고 자란 서귀포를 빼놓으면 나머지 지역은 제대로 걸어본 적도, 그곳에 대해 변변히 아는 것도 없었다. 나부터가 제주의 속살을 두루 들여다보고 경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어느 지역에 얼마만큼 옛길이 남아 있는지, 사라진 길을 되살릴 수는 없는지, 길과 길을 어떻게 이어야 풍경과 이야기를 두루 보여줄 수 있을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두 발로 걸어봐야만 했다.

서울 일을 대강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간 건 지난 7월25일. 여름의 절정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8월 말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서귀포시(예전 행정구역 편제로는 남제주군) 해안가 일대를 답사했다. 가끔 혼자서, 때로는 여중 동창생들과, 대부분은 올레 팀들과 함께. 어떤 식으로 걷든, 어디를 걷든 길을 걷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길에서는 제주만이 지닌 독특한 풍광과 함께 제주 오름과 바당을 닮은 넉넉하고 싱그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다.

마을마다 하나쯤은 있는 ‘해녀식당’을 운영하는 해녀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씩씩하고 당당하고 웃음이 풍성했다. 동하리 해녀식당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직접 배워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할머니들이 그곳 해안에서 잡아 돌절구에 빻아서 끓여낸 겡이(게)죽을 목덜미를 간질이는 해풍을 맞으며 먹는 맛이란(아쉽게도 그들은 6월에서 9월 사이에만 영업을 하므로 내년 6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일장에서 대나무 구덕을 파는 할머니는 처음 보는 내게 오라버니가 4·3 사건 때 억울하게 죽어간 사연을 구구절절 털어놓았다. 굶주림과 무학의 설움과 아픈 가족사를 온몸으로 견뎌낸 할머니의 웃음은 해탈한 부처 같았다.

길을 걸을수록 확신은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 길은 숨어 있다가도 열심히 찾는 이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해안 마을 가마리에서 길이 막혀 돌아서려다가 아무래도 아쉬워서 이리저리 헤매다 해녀 탈의장과 연결된 길을 발견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 폭은 좁지만 바다에 딱 붙은 언덕길이라서 전망만은 기막힌 그 길은 다름 아닌 ‘해녀 올레’였다. 태흥리 바닷가 근처 대나무가 우거진 절벽 길은 오랫동안 인적이 끊어져 입구에 거미줄이 사방으로 둘러처져 있었다.

바당에서 기정까지 올랐던 길 되살린다

올레 탐사반의 탄성을 자아낸 건 화순해수욕장 근처 대평포구 앞 박수기정(기정은 벼랑을 뜻하는 제주어)으로 올라가는 ‘좆은 길’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마을에서 기정 위에 펼쳐진 드넓은 초지로 농사지으러 가기 위해 돌을 쪼아서 조랑말이 오를 만한 완만하고 넓은 길과 한 사람이 겨우 오를 만한 가파른 길을 만들어 오랫동안 이용해왔단다. 하지만 기정 뒤로 올라가는 자동차도로가 생기면서 ‘좆은 길’은 서서히 용도 폐기되었고, 지금은 잡목과 가시덤불이 우거져 사라져버린 길이 되고 말았단다.

ⓒ시사IN 한향란제주 올레는 국내외 도보여행자들이 느리게 걸으면서 제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위는 광치기 해변을 걷는 올레꾼들.
우리 올레 답사반은 서귀포시 100km를 답사한 끝에 바당과 하늘, 그리고 마을 올레가 적절히 섞인 ‘말미오름에서 섭지코지까지’를 첫 코스로 결정했다. 더 아름다운 길, 멋진 풍광도 많은데 굳이 첫 코스로 이 길을 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바당과 하늘과 마을 올레가 섞여 제주 길의 특징과 미덕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코스의 출발점인 말미오름(두산봉) 입구에 올레꾼들이 모일 수 있는 예쁜 시골학교(시흥초등학교)도 장점이었다. 1947년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웠다는 이 학교의 초록색 잔디구장은 학교 졸업생들이 예비군 훈련 때마다 한 줄씩 심어서 조성한 것이라니 여러 모로 아름다운 사연을 간직한 학교였다. 그곳 마을들이 가진 상징성도 고려되었다. 시흥리와 종달리는 과거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의 경계선이었다. 본디 제주 순력 길은 ‘시흥에서 시작해서 종달에서 끝나는’ 순서였다. 

제주 올레는 시흥리에서 막 출발했다. 종달리에서 올레 코스를 끝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길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올레와 올레를 이어놓으면 대체 제주를 다 걷는 데 며칠, 아니 몇 달이 걸릴지 또한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수많은 올레꾼들이 파란색 화살표(올레 사인)를 따라 차량의 위협을 받지 않고 느릿느릿 간세다리가 되어 걸어가게 되리라, 그 길 위에서 제주의 신화와 역사를 호흡하게 되리라, 이곳에 살다 간 여신들과 살아가는 여신들을 만나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 
(창간 기념 특별 기획은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참여 이벤트를 마감합니다
〈시사IN〉 창간 기념 ‘독자 참여 이벤트’ 〈오름에서 바다까지, 제주 길 걷기〉를 마감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열띤 참여 덕에 모집 인원 70명이 다 찼습니다.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일정과 코스는 변함이 없습니다. 10월20일(토)~21일(일) 이틀간 제주 성산읍에서 외돌개까지 걷습니다. 비가 오더라도 행사를 진행하오니, 비옷과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 모자를 꼭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문의 02-3700-3200(배은옥).
기자명 서명숙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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