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뒤 가장 바빴던 인물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다. 박정희 사망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그는 하나회 소속 정치군인들을 소집해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법적 수사권한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엄 상황임을 앞세워 합동수사본부장 자리를 꿰찬 그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무주공산이 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는 착착 진행됐다. 다시 법을 무시하고 민간인인 김재규를 군사법정에 세운 합수부는 막후에서 10·26을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부패한 측근이 저지른 사적 범죄’로 몰아갔다. 누가 김재규 재판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방이 결정된다고 정치군인들은 판단한 듯하다. 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10·26이 절대로 박정희의 반민주 폭정에 대한 응징이어서는 안 되었다. 합수부는 집요하게 가족을 협박해 12·12 군사반란 전날 사선변호인단을 물리치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를 펴낸 작가 문영심에게 최근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 부부(김정숙·김양환씨)가 연락을 해왔다. 이제는 모든 걸 털어놓고 싶다고 했다. 김재규 유족이 입을 연 것은 10·26 이후 처음이다.

ⓒ시사IN 조남진
12월9일 문영심 작가(맨 왼쪽)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셋째 여동생 부부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문영심(문):1979년 12월11일 김재규 장군(당시 변호인단과 문 작가는 김재규를 ‘장군’이라 불렀다. 김재규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이 사선변호인단을 물리쳤다. 당시 상황이 어땠나?

김양환(양):10·26 직후 합수부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정권이 무주공산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김재규의 친동생인 항규씨가 합수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항규씨를 내보내면서 가족이 변호사를 전부 사퇴시키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최종적으로 형님(김재규)을 면회했고, 그분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문:사선변호인단을 물리친 다음 날 12·12 사태가 일어났다.

양:전두환 같은 사람들이 청와대 언저리 군인이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빨리 알아채고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본다. 그 전부터 계획을 세운 건 아닌 듯하다.

문:김 장군은 군 경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정치군인에 대한 우려를 들은 적 있나?

 양:평소 자기가 죽으면 군복을 입혀 입관해달라고 했을 정도로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컸다. 국회의원도, 장관도 했지만 그걸 본인이 자랑스럽게 생각한 적은 없다. 전두환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다. 전두환은 당시 계급이 낮았다. 그땐 상대가 아니었다.

“최태민 목사 문제가 갈등 부추겨”

최근 발간된 김재규 평전(위).

문:가족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들었다.

양:봉건사회나 왕정도 아닌데, 3족을 멸한다는 말이 실감 났다. 김영희 여사(김재규 부인)는 합수부에 끌려가서 오랜 시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을 겪어 심신이 쇠약해졌다. 상당 기간 사회생활을 못했다. 지금도 비슷한 얘기만 나와도 입을 다물고 있다. 동생 항규씨는 집과 회사를 몰수당했다. 

문:김재규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나?

양:밖에서는 차지철과의 문제를 많이 거론하는데, 최태민 사건도 컸다. 여러 곳에서 최 목사에 대한 정보가 올라와 이걸 종합해서 보고하면 그 자리에서 딸 박근혜를 불러와 대질신문하듯이 물어봤다고 한다. 이때 매번 딸의 말을 믿었다. 그러면서 (김재규가) 자기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쪽(김재규)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졌다.

문:김재규 장군 추모비 비문 가운데 ‘장군’과 ‘의사’ 글씨가 훼손됐던데.

양:광주·전남 송죽회에서 직접 만들어서 세웠다. 송죽회 멤버 중에 시인이신 분이 추모사를 썼고, 석공이신 분이 밤마다 담요 뒤집어쓰고 돌을 쪼개 만들었다. 어느 날 묘비에 가보니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에서 ‘의사’와 ‘장군’ 글씨가 파여 있더라. 송죽회 총무가 “(훼손된) 그 자체가 기념이고 역사다. 고칠 필요가 없다. 훗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두었다.

문:2004년 5월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장군에 대한 명예 회복이 될 거라 기대했다가 결국 결정이 유보되었다고 들었다.

양:당시에 나는 몰랐는데, 함세웅 신부가 쓴 〈껍데기는 가라〉를 읽고 나중에 알았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서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함 신부가 가족에게 말해서 서둘러 신청을 취하했다. 한 번 기각당하면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다시 기회를 갖기 어렵다는 게 함 신부의 얘기였다.

문:전태일 열사 같은 경우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가 전 열사 몫까지 사회활동을 하셨다. 그런데 김재규 장군 댁은 우리 사회에서 상류층이라 잃을 게 많아서 그동안 나서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양:그런 지적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합수부에서 그만큼 모질게 당했다는 얘기도 된다. 이건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문:김정숙 여사는 언제 김재규 장군을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김정숙(숙):사형 전날. 5월23일이었다. 합수부에서 오전 오후로 나눠 가족들을 불렀다. 그다음 날 사형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문:대법원 판결이 난 지 불과 사흘 만이었다.

숙:그때 오빠가 “나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대통령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해라”라고 말했다. 다음 날 수행비서가 “가셨습니다”라고 전화를 했다. 내가 우니까 어머니께서 “울지 마라. 효자는 불충이 없다. 네 오빠는 충신으로 죽었다”라고 하셨다.

양:처음에는 유가족끼리 상의해 함께 사형당한 이들을 한자리에 모시려고 했다. (김재규) 본인이 자신을 중심으로 양쪽에 나머지 사람들을 묻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유가족들이 얘기하는 걸 옆에서 듣고 있던 수사관들이 바로 보고하자 위에서 난리가 났다고 했다. 결국 경기도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문:김 장군과 관련해 생각나는 일이 있나?

양:어느 날 나한테 유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더라. 나는 “이 정권에 핵심 멤버로 참여하셨으니 발을 뺄 수 없다면 형님도 언젠가 책임을 지셔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심각하게 ‘김 서방 니도 그리 생각하나’라고 되물었다. 처음부터 유신에 문제가 있다는 걸 분명히 얘기했던 분이다.

문:여동생을 많이 챙겼다고 하는데, 그날도 박 전 대통령이 여자들 불러 술 마시는 자리에서 일이 벌어졌다. 나중에 오빠가 힘들었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숙:그런 고민을 많이 하셨다. 어떤 때 “오빠, 그런 소문이 있던데”라면서 슬며시 물으면 “내가 그게 제일 고민이다. 여자 형제 다섯이 있는 사람이 그 짓을 하려니 나도 힘들다. 너희들은 모르는 척해라”라고 하셨다.

“살려준다 해도 자결할 작정”이라고 했다

문:김재규 장군도 대법원 판사 중에 소수 의견이 있었다는 얘길 듣고 위안 삼으셨다던데.

양:그렇다. 대법관으로서 소수 의견을 냈을 때 다가올 일을 예측 못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다’라고 얘기한 걸 보면 그분들도 대단하다. 당시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 같은 분들도 역사에 기억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제로 옷을 벗어야 했던 분도 있다고 들었다.

문:지금도 10·26에 관한 많은 억측이 떠돈다. 가족 입장에서 정리해보신 적 있나?

양:처음부터 세력화·조직화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조직을 안 갖추고, 중앙정보부로 방향을 틀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하는 건 맞지 않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자기가 정리해놓으면 반드시 국민과 야당이 복원할 것이라고 보았다. 지금까지 나온 책 중에 문 작가가 쓰신 책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러 연락을 드렸다.

문:왜 오빠가 평소 가까웠던 박 대통령을 총으로 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나?

숙:측근인 자기가 하지 않으면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끝까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쓰지 마라. 나는 가는 게 마땅하다. 만약에 나를 살려준다 하더라도 일이 해결되면 자결할 작정이다”라고 하셨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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