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초기에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필자에게 한 말이 있다. 정부 출범 이후 외교안보 분야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마치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 같더라”라는 것이었다. 주로 미국과의 안보 현안으로 눈코 뜰 새 없던 당시 심경을 표현한 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첫 외교 무대라고 할 수 있는 이번 미국 방문을 지켜보며, 또다시 외교안보 분야에 위기가 오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된다. 믿어 의심치 않았을 법한 미국과의 관계조차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국익을 둘러싼 냉혹한 이해타산뿐이라는 점이 확인된 마당이다. 이제, 미국 방문 결과가 나오기를 북한·중국·러시아 등, 이 정권에 응어리진 국가가 눈을 부라리며 지켜보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후환이 두려울 뿐이다.

사실 이번 방미는 초장부터 북한과의 숨막히는 외교전이었다. 3월13일 제네바 북·미 회담 때까지만 해도 미국에 큰소리를 치며 애를 태운 북한이 3월18일 뉴욕 채널로 한 걸음 진전된 안을 흘리며 싱가포르 회동을 제의할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일부 전문가는 북한이 ‘남한이 없는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대미 양보 카드를 꺼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4·8 싱가포르 합의를 계기로 북한은 더 이상 미국이 남한만의 전유물이 아니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믿기 어렵고 적은 많아지고…

ⓒ연합뉴스외교부 업무보고에서 직원과 인사를 나누는 이명박 대통령(가운데).

그 다음 북한의 순서는 무엇일까. 우선은 지켜볼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다녀오고 난 뒤 어떻게 하는지. 물론 이 정부와 대통령이 거듭 얘기하는 것처럼 식량·비료를 지원해달라고 먼저 얘기하는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 오히려 반대로 압박 수위를 높여갈 것이다. 개성공단 폐쇄 시나리오가 매우 현실감 있게 거론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 얘기가 계속 떠돈다. 구체적으로 5월 초라는 시기도 거론된다. 요즘 북한은 티베트 사태며 타이완 문제며 중국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박수부대’ 노릇을 톡톡히 한다. 한동안 중국에 자존심을 세우며 민족주의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던 때도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심경을 가눌 수 없다. 저 사람들이 저러면서 속으로 얼마나 칼을 갈까,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칼을 가는 게 북한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지난해 12월19일부터 정권 주변 사람이 무책임하게 내뱉은 말의 파편들을 떠올려보라. 누구는 더러 심장을 맞고 누구는 더러 마음을 다치고, 그 말 하나하나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도 지금 벼른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돈다. 중국은 한마디로 당신들이 친미만 해서 잘살게 되는지 보겠다는 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에는 새로 중국 대사로 임명된 신정승 전 뉴질랜드 대사에 대해 중국 측이 격이 안 맞는다며 불만이 많다고 한다. 5월 초 이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손에 땀이 난다.

러시아와는 한마디로 그놈의 자원 외교 때문에 망했다. 러시아가 한갓 자원외교 대상에 불과하냐며, 지난해부터 모스크바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실용주의를 얘기하면서, 러시아가 친미 국가에는 자원을 팔지 않는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모르는가 보다.

한마디로 무례하고 오만불손하다는 것이다. 미국만이 내 친구라며 그동안 너무 떠들어댔다. 지난 몇 달간 오직 말로써 주변을 전부 적으로 만들어놓았다. 믿었던 미국도 이제 무작정 기대기 어려운데, 그 ‘적’들의 반격을 앞으로 어찌 감당할 건가. 이게 위기가 아니고 뭔가.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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