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딘디덩 씨가 딸 혜정이를 품에 안았다. 집 마당엔 혜정이가 쓰는 천 기저귀 빨래를 널어놨다.
딘디덩 씨(23)는 집 앞 텃밭에서 시금치를 캐고 있었다. 텃밭에는 파와 마늘, 시금치가 계통 없이 뒤엉켜 자란다. 텃밭의 한 뼘 공간도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고 다른 작물을 심어놓은 탓이다. 자갈 투성이 마당에 욕심을 부려 상추씨를 뿌렸더니 자갈 사이로 파란 상추도 솟아났다. 오늘 저녁 메뉴는 시금치 나물과 상추쌈이다.

이런 집안 일은 모두 베트남 신부 딘디덩 씨의 몫이다. 지난 2006년 이곳 전북 부안으로 시집온 그녀는 명실상부한 이 집의 ‘안주인’이다. 하지만 갓 돌을 지난 딸 혜정이, 그리고 몸을 가누기 힘든 팔순의 시어머니를 모시며 안살림을 꾸리는 건 20대 여성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얼굴 화장을 빠뜨리는 날이 없다. 시어머니 양복순씨는 “집안 일 잘하고, 아이 키우면서도 몸치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라며 며느리를 추어올린다. 남편과 시어머니 처지에서는 ‘복덩이’가 들어온 셈이다.

“천 기저귀요?
1회용 기저귀는 비싸잖아요.” 딘디덩 씨는 요즘 보기 드물게 천 기저귀를 쓴다. 환경운동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아이 사랑이 각별해서도 아니다. 그저 천 기저귀를 쓰는 게 돈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이 조금이라도 돈을 헤프게 쓰면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지자체에서 ‘알뜰주부상’이라도 수여해야 할 판인데, 딘디덩 씨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다.
“남편 월급 나왔어요?”
“아뇨, 3개월째 못 받았어요.”

지적장애 4급인 남편 오현모씨(45)는 벽돌공장에서 일한다. 100만원 남짓 하는 공장 급여로는 네 식구가 먹고살기에도 빠듯한데 설상가상으로 임금이 체불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차상위 계층으로서 의료비 혜택 등을 받을 수도 있지만,  시어머니가 시골집 한 채를 가졌다는 이유로 아무런 사회보장 혜택도 받지 못한다.

딘디덩 씨의 경우처럼 이주여성과의 결혼을 하는 한국인 남성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결혼 이주여성이 속한 농어촌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78만원이다. 도시근로자 가구의 평균 소득 367만원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남편이 지나치게 고령이거나 재혼인 경우도 많다. 이런 ‘현실’을 모른 채 결혼중개업체의 사탕발림에 속아 바다를 건너온 여성들로서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고국의 가족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송금하겠다는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면서 가정불화의 심각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딘디덩 씨 역시 정기적으로 친정에 돈을 부치지 못한다. 억척스레 돈을 절약해야 이따금 돈을 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사례를 알뜰 주부의 ‘미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이다.

'텔미' 부르는 이주여성의 아이

이러니 이주여성이 가장 원하는 것은 하루빨리 한국어를 배워 일자리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가 유창한 조선족 신부를 제외하면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수가 중국·베트남·캄보디아의 빈농 출신인 이주여성 중에는 고국의 언어마저 읽고 쓰지 못하는 이들이 있어 한국어 학습에도 제약이 따른다. 한국어를 익힌다 해도 농촌 지역에서는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결국 홀로 가슴만 태우다 가정불화에 휩싸이거나 끝내 집을 나가는 이들도 생겨난다.  

지난 4월3일 오전 부안종합사회복지관. 이곳에서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결혼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좌가 열린다. 한글교실·임산부교실·문화교실 등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교실마다 10명에서 20명씩 모두 60여 명의 결혼 이주여성이 수업을 듣는다. 출석률이 거의 100%에 가까울 만큼 인기 폭발이지만, 교실 분위기는 ‘봉숭아 학당’에 가깝다. 모처럼 집안일에서 벗어나 고국의 친구들끼리 모국어로 실컷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해방구’인 셈이다.

ⓒ시사IN 한향란결혼 이주여성을 위한 한글교실이 열리는 부안종합사회복지관. 한국 말이 서투른 어머니와 달리 아이들은 말이 유창하다.
대다수 남편과 가족은 복지관 강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날도 어느 한국인 남편은 수업 중인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밥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황한 아내가 작은 목소리로 ‘아직 수업 중’이라고 말해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며 막무가내였다. 복지관의 한 교사는 “아직도 농촌 사회에는 ‘여자와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깨진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일손이 바쁜 농번기에는 복지관 수업을 개설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날 가장 눈에 띈 건 한글 중급반의 강의 풍경이었다. ‘중급반’이라고는 하지만 대다수 이주여성은 ‘올아라’와 ‘올라라’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빙글빙글’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 이들 여성의 아이 중 한 명이 교실을 ‘빙글빙글’ 돌며 여성그룹 원더걸스의 히트곡 ‘텔미’를 흥겹게 부르고 있었다. 

“엄마도 이 노래 알아?”
“알아요, 그런데 또박또박 부르진 못해요. 그냥 음음음~ 하면서 따라 불러요.”
“엄마가 한국 말 잘 못해서 불편해?”
“별로··· 아니, 그냥 좀 답답하기도 하고. 몰라요.”

이 풍경은 다문화 가정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아이와 평생 한국어가 서투를 수밖에 없는 어머니 간의 ‘의사소통 단절’ 문제는 이미 다문화 가정의 가장 큰 갈등 요인으로 꼽힌다. 단순히 부모·자식 간의 대화 단절을 넘어 아이의 성장발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다른 아이에 비해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폭력적이라는 지적도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됐다.

심각한 것은 예견되는 문제에 대해 뚜렷한 해법이 없다는 점이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국제결혼 실태조사’에 따르면 농촌 결혼 이주여성의 56%가 미취학 자녀의 양육을 본인이나 배우자 등이 맡는다고 대답했다(도표). 어린이집 등 전문 보육시설에 보내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보육시설이 부족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농촌 가정으로서는 아이의 양육을 가족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농촌 사회의 특성상 양육은 거의 이주여성의 몫이다. 심지어 아이를 혼자 방치한다는 비율도 30%나 됐다. 도시 다문화 가정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아이를 혼자 방치한다는 비율은 41%로 더욱 높았다. 부부의 맞벌이 때문이다. 

결혼 이주여성들도 이런 문제를 걱정한다. 딘디덩 씨의 말이다. “한국 엄마는 한국말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아서 공부 잘 시켜요. 하지만 우리는 외국인이라서 그렇게 못해요. 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들이 우리 아이더러 ‘네 엄마는 외국인’이라며 놀릴까 봐 걱정이에요.”

1년 새 국제결혼 자녀 재학생 68% 증가

오수진 부안종합사회복지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팀장은 ‘어머니의 말’을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요즘에는 가족에게 한국말은 물론, 어머니 나라의 말도 가르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야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생기니까요. 쉽지는 않습니다. 남편조차 아내 나라 말을 잘 모르니까요. 심지어 아이가 ‘어머니 나라의 말’을 배울까 봐 걱정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통계청이 지난 3월25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결혼한 부부 열 쌍 중 한 쌍 이상이 국제결혼 커플이었다. 농어촌으로 눈을 돌리면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져서 농림·어업에 종사하는 남성 중 40%가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도표). 거의 둘 중 하나꼴로 다문화 가정이 탄생하는 셈이다.

이 수치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지지난해에도 농림·어업 종사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결혼비율은 40%를 넘어섰다. 눈여겨볼 것은 2년 연속으로 이 비율이 40%를 넘었다는 점이다. 다문화 가정이 농어촌 지역의 대세로 굳어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결과다. 자연스럽게 ‘2세’의 증가 폭도 두드러진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초·중·고에 재학 중인 국제결혼 가정 자녀는 총 1만3455명으로 2006년 7998명에 비해 68%나 증가했다. ‘다산’ 문화에 익숙한 베트남 여성과의 결혼이 크게 증가한 시점이 2005년부터임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앞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부안군만 해도 전체 국제결혼 가정이 모두 180곳인데 자녀 수가 이미 180명을 넘어섰다. 한 가구당 1명 이상의 아이를 키우는 셈이다.

다문화 사회는 어쩌면 생각보다 더욱 빨리, 심각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농어촌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10년 안에 농어촌 지역 초등학교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로 가득 찰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런 미래를 예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려의 목소리는 높지만 국가 차원의 대비책은 거의 없다. 일부 지역단체나 기관이 기업 등의 후원을 받아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수준이다.

딘디덩 씨가 사는 마을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떨어진 부안군 상서면에 사는 베트남 신부 몽띠 씨(27). 팔순의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그녀에게는 아이가 둘 있다. 남편 김동철씨(51)와의 사이에서 지난해 낳은 딸 현아와 18살짜리 큰아들 현도가 그들이다. 큰아들의 친모는 여러 해 전 종교 문제로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언뜻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다문화 가정의 모습이지만 이들의 가족 사랑은 각별하다. 남편은 동네에서 소문난 ‘팔불출’이고 시어머니는 몽띠 씨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뻐한다. 큰아들도 그녀를 스스럼없이 ‘엄마’라고 부르며 따른다. 지난 겨울에는 남편, 딸과 함께 베트남 고향 마을에 열흘간 다녀오기도 했다.

ⓒ시사IN 한향란몽띠 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몽띠 씨와 딸 현아, 남편, 큰아들, 시어머니(오른쪽부터).
'현아가 커서 외교관 됐으면...'

몽띠 씨네가 처음부터 화목했던 건 아니다. 다른 이주여성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처음 시집왔을 때는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가족끼리 한국어로만 이야기하며 늘 자기를 흉보는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로 입안이 다 헐 지경이었다. ‘변화’는 작은 해프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해 봄, 임신 9개월째인 몽띠 씨는 다른 마을에 마실을 나갔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녀가 도망쳤을 것이라며 땅을 치고 통곡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친 게 아니라 집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하루에 몇 편 다니지 않는 버스를 놓친 탓이었다. 몽띠 씨가 만삭의 몸으로 두 시간 동안 시골길을 걸어 귀가하자 가족은 두 번 통곡했다. 돌아온 신부가 고마워서 한 번, 며느리를 믿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며 또 한 번. 그 사건 이후 남편 김동철씨는 “가족 간의 믿음을 찾았다”라고 말한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 사람이 무조건 믿음을 줘야 합니다. 그들은 멀리 타국 땅에서 건너온 귀빈 아니에요? 얼마나 외롭겠어요. 부부 이전에 친가족으로서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야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김씨가 그렇게 ‘다문화 가정의 행복비법’을 귀띔했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국가가 외면하고 사회가 돌보지 않는 다문화 가정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 ‘사랑과 믿음’에 호소하는 일 뿐인 것 같아서다. 김씨의 꿈은 딸 현아가 커서 외교관이 되는 것이다. 가능하면 아내의 나라를 상대로 하는 외교관이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다문화 가정 2세의 직업으로서는 무척 맞춤하다. 과연 몇십 년 뒤 김씨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앞으로 현아가 헤쳐나가야 할 관문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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