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 Jeong-geun(박정근)’이라는 이름이 다섯 번 나왔다. 그를 지칭한 ‘Mr. Park’까지 합치면 열한 번이다. 한국 국민이던 김형진씨(34·가명)가 올해 4월24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난민심사재판소(Refu– gee Review Tribunal· RRT)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은 서류에서다. RRT는 ‘김씨가 한국에 돌아갈 경우 지금이나 예측 가능한 미래에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김씨는 난민 협약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가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난민이다’라고 결정하면서, 그 사례 중 하나로 ‘박정근 사건’을 들었다. RRT는 오스트레일리아 이민부(DIAC)에서 보호비자 발급을 거절당한 경우 이의신청을 하면 이를 심사하는 기관이다. 김씨 공판은 지난 4월11일 열렸다.

4월23일 호주 난민심사재판소(RRT)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김씨.
난민 인정을 받은 김씨는 동성애자이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공개 선언했으나 우울증 악화 등 개인적 사유로 중도 포기했다. 군 복무를 어렵게 마쳤지만 예비군 훈련에는 한 번 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김씨는 반전·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총 들기를 거부한다. 2012년 6월 스웨덴으로 가 난민 신청을 했던 김씨는 신청을 거부당한 뒤인 같은 해 12월 오스트레일리아에 입국했다.

김씨는 공항에서 난민 신청 의사를 밝힌 뒤 비자 발급을 받을 때까지 난민수용소에서 지냈다. ‘한국에서 동성애자가 사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내용의 미국 국무부 보고서를 인용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부가 난민 인정을 거절하자, 김씨는 바로 이의를 신청했다. RRT는 김씨가 한국에서 동성애자로서 차별을 받아온 점과 양심적 병역 거부로 예비군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이 외에도 △김씨가 2008년 FTA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가 집시법·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체포돼 법원에 사건이 계류 중인 점 △김씨가 좌파 정당인 진보신당의 당원이었던 점 등을 처벌 가능성의 근거로 들었다. 전체 17쪽짜리 결정문 중에서 박정근 사건 등 언론·표현의 자유가 주로 논의되는 부분은 14~15쪽이다.

박정근씨(25)는 북한 트위터 계정 ‘우리민족끼리’를 리트윗한 혐의(국가보안법 7조 위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박씨의 이름을 RRT가 언급한 것은, 김형진씨가 향후 한국에서 비슷한 이유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RRT는 서류에서 “신청자(김씨)는 (2012년 11월) 박정근에 대한 정부의 행동에 반대하고 박정근을 응원하고자 박정근과 같은 방식으로 트윗을 올렸다. 즉, 북한 정부의 말을 언급하는 트윗을 올리고 그 말들을 비웃거나 조롱했다”라고 밝혔다.

김씨는 박정근 사례가 인용된 첫 난민이다. 박정근 사건을 사례로 들며 RRT가 인용한 보고서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2012년 11월 발간한 ‘한국:국가보안법-안보의 이름으로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제약하다’이다. RRT는 ‘(박씨가) 풍자적으로 사용했음에도 북한 웹사이트 자료를 업로드했다는 이유로 국보법 7조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2012년 11월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았다’는 보고서 내용을 결정문에 인용했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법학과)는 “이번 난민 결정의 핵심은 김씨가 한국에 들어오면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는데, 박정근씨에 대한 국보법 유죄 판결이 그 처벌 가능성의 매우 중요한 근거였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그러한 유죄 판결은 국제난민협약이 보호하려는 규범을 위반한다고 판사가 천명했다. 국보법의 찬양·고무 조항이 국제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해준 사례다”라고 덧붙였다.

“병역 거부 불인정과 국보법은 폭력”

서류를 보면, RRT는 한국 내 표현의 자유 위축 상황을 상당 부분 참작했다. RRT는 결정문에서 미국 인권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보고서 ‘2012년 인터넷상의 자유:한국’(Freedom on the Net 2012: South Korea) 중에서 ‘한국 정부가 외설·명예훼손·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온라인 콘텐츠를 감시하지만, 대부분 보고된 사건들은 북한에 대한 동조나 정부에 대한 비판에 관한 것이다’라는 내용을 인용했다. 보수당(MB) 집권 이후 온라인 활동으로 기소된 사람의 수가 2008년 5명에서 2010년 82명으로 늘었고 이런 경향이 2011년까지 계속됐다는 내용도 인용했다.

ⓒ시사IN 신선영 RRT는 결정문에서 난민 인정 사유의 하나로, 패러디를 위해 북한 계정을 리트윗했다가 국보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박정근씨 사건을 언급했다.

김씨는 박정근 사건을 난민 신청 사유에 넣은 이유에 대해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 불인정과 리트윗 보안법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박정근 사건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 중 최고봉’이었다. 그는 ‘난민으로 인정받는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이민법 제36조 제2(a)항에 따라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신청인이 오스트레일리아 국민이 아니어야 하고 국적국 밖에 있어야 하며 △신청인에게 ‘심각한 위해’(serious harm)가 가해지는 ‘박해’가 증명돼야 한다. RRT는 이를 인정한 셈이다. 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박정근 사건을 형사처분의 범위를 넘어선 사건으로 본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한 사건이 난민 협약에서 말하는 ‘박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우리 모두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결정이다”라고 말했다.

박정근 사건 당시 박씨의 석방을 촉구한 바 있는 ‘앰네스티 한국지부’ 변정필 캠페인팀장은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리트윗 국보법’을 적용해 기소를 시도하는 행위를 국제사회가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평화적 의견 표현을 처벌하는 건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이런 우려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국보법의 자의적 적용을 멈춰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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