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병아리’. 표지는 사랑스러운 노랑 병아리 한 마리의 아주 단순한 그림. 펼친 페이지로 열 장면 정도의 구성에 두꺼운 보드북 형식. 얼핏 이 책은 유아들에게 사물의 이름과 생김새 정도를 알려주는 ‘인지 그림책’처럼 보인다.

그런데 첫 장면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왠지 다급한 표정으로 황망하게 달리는 병아리에게 “아기 병아리야, 어디 가니?”라는 물음이 나오고, 다음 페이지는 “곧 밤이 올 텐데”이다. 순간, 가슴이 왈칵 메어온다. 아름답지만 무겁고 불길하게 드리워진 황혼의 하늘에 이미 캄캄해진 땅. 그 안에서 병아리는 걸음을 멈추고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이 어린것의 이 망연한 표정이라니!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다 주저앉은 병아리는 옆에서 구르던 나뭇잎 하나를 물어다 덮고 잠이 든다. 콜콜. 엄마 발치를 맴돌다 엄마 품에 잠들어야 할 어린 병아리가 홀로 들판에서 총총한 별 아래 나뭇잎 하나 의지하고 누워 있는 이 상황이 왜 이렇게 가슴이 에일까. 그 세상이 위협적이고 적대적이라면 화를 내며 싸울 의지라도 불태우련만, 하릴없이 아름다울 따름이니 더 막막하기만 하다.

<병아리> 소야 기요시 글·하야시 아키코 그림/김난주 옮김/한림출판사 펴냄
삶의 기운을 아이들과 나누게 만드는 힘

〈달님 안녕〉으로 유명한 하야시 아키코는 주로 어린아이들의 일상과 심리를 포근하게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병아리〉도 소재나 그림 풍에서 보자면 크게 그 범주를 벗어나 있지 않은데, 묘하게도 인생 황혼녘의 쓸쓸함과 애잔함이 풍겨온다. 왜 이런 분위기일까. 그러다 작가 소개 글을 읽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글을 쓴 작가 소야 기요시는 하야시 아키코의 남편으로,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동물원의 우리 앞에서 병아리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는 “그 병아리들은 천국에서 남편이 보낸 선물일 거라고 생각”하고 남편의 글에 그림을 보탰다. 18년 만에 만든 신작 그림책이라니, 남편의 메시지가 얼마나 사무쳤겠는가.

남편이 떠나고 아내는 혼자 남아 병아리를 그렸지만, 그림책은 그림책인지라 병아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뭇잎 밑의 아기를 엄마가 찾아와 품어주는 것이다. 보얗게 밝아오는 아침 하늘 아래 엄마와 아기가 서로 바라보며 반기는 장면의 안도감이라니!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아기 병아리는 하룻밤 사이에 왠지 다른 차원의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는 아마도 작가 자신이 겪은 게 아니었을까. 노년의 작가가 배우자의 죽음을 넘어 새로이 얻은 삶의 기운을 어린아이들과도 나누게 만드는, 그림책의 힘을 뭉클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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