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대안 교과서 책임 편집자인 이영훈 교수(위)는 “친일 지식인을 따뜻한 눈길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책이 나온 이후 많은 항의에 시달리는 것으로 안다.
욕하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테러 협박 전화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편하게 죽지 못할 거다’라고 공격하더라.

책을 보면,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장경제 체제, 사유재산과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현 제도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진지하게 탐구했다.

동학농민운동, 3·1운동,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사건보다는 김옥균, 이승만, 박정희 같은 소수 개인의 활동에 더 많이 주목했다.
그들에게 더 분명한 근대적 비전이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동학 봉기 자체에는 어떤 근대국가를 창출할 것인가 하는 비전이 없었다.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려는 선각자의 노력을 통해 보통 사람의 사회·경제적 생활이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그렇다고 소수 선각자의 영웅사를 펼친 것은 결코 아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유교적 근왕주의’에 입각한 복고적 개혁운동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뒤에는 또 ‘갑오경장의 기폭제’가 됐다고 서술했다. 모순 아닌가?
무슨 말인가?

45쪽 중간 부분을 읽어보라. ‘갑오경장의 기폭제’이자 ‘항일 민족운동의 선구’를 이루었다고 되어 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다른 표현을 썼어야 했다. 갑오경장이라는 사건의 계기가 됐다는 것이지, 이데올로기적·이념적 지향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 갑오경장은 갑신정변을 계승했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이 ‘근왕주의’라면 조선 왕조는 왜 농민군을 진압했을까.
그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당시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일본군이 개입한 뒤 갑오 정권이 들어서면서 농민군을 탄압했던 것 아닌가?

일제의 근대화 정책은 긍정적으로 서술했지만,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은 평가 절하했다.
대한제국은 한 개인의 정치·경제적 권리를 보장해주는 법·제도적 조처를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도시 정비 등을 말하는데 근대화의 본질은 아니다. 대한제국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의회 설립 요구를 억압했다. 그런 전제주의가 결국 우리를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일제는 한 개인의 정치·경제적 권리를 인정했다고 보나?
정치적 권리를 인정 안 한 것은 맞다. 그래서 우리도 ‘폭압적 지배 체제’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재산권이라든가 경제적 분야에서는 진전이 있었다. 반토막의 근대화라고 할 수 있다.

윤치호·김성수·이병도 등의 친일 행적을 모호하게 서술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도 눈에 띈다. 있는 그대로 썼다는 실증주의에 어긋나지 않나?
친일파에도 다양한 부류가 있다. 이를테면 적극적 친일과 소극적 친일. 윤치호의 경우는 은둔을 한 것이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 그는 1910년대까지만 한국 사람이었다. 3·1운동 때도 관망했다. 그 뒤로는 은둔 생활을 했다.

윤치호는 3·1운동 때 관망하지 않고 ‘약자는 강자에 항상 순종해야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 것까지는 몰랐다. 어쨌든 우리가 굴곡 많은 역사를 살아오지 않았나. 좌절한 근대 지식인으로서 아픔 같은 것을 깊이 성찰해봤으면 좋겠다. 좀더 따뜻한 눈으로, 그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는지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제주 4·3사건을 ‘좌파 세력의 무장반란’이라고 규정했다. 경찰의 폭력성, 도민들의 반감이 결합된 사건으로 아는데, 너무 편협한 해석 아닌가?
기존 교과서도 ‘공산주의자와 일부 주민의 무장봉기’로 쓰고 있다. 우리는 온건하게 쓴 편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단순명쾌한 논리’, 미국을 압박하는 ‘탁월한 외교 수완’으로 칭송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세력 탄압과 정권 유지를 위한 내부 정치용 수사라는 시각도 많다.
당시에는 북한식의 계급 독재, 사회주의 노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소수의 자유주의자들과 도시 상공업자들을 기반으로 국가를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혈이 낭자하는 대단히 폭력적인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과격하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전쟁 없이 나라가 세워지거나 망한 역사를 본 적이 있나? 이승만에게는 공산주의자는 안 된다는, 아주 강인한 건국의 원칙과 방향이 있었다. 북진통일론도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김일성의 남진통일론에 맞서,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이념투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희생되기도 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도 정당했다고 보는 것 같다.
한 개인의 권력욕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커다란 변화를 한국인에게 안겨주었다고 썼다.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자주 대화를 한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냐고. 1979년 10월 그가 죽은 뒤 수백 명이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 그 희생으로 중화학공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큰 희생이었나? 노예처럼 끌려가 채찍 맞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 국회의원, 대통령을 하고 싶었는데 한동안 못했을 뿐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역사상 유례없는 시대를 만들었다. 당시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지 않았으면 지금 대한민국이 과연 어디에 있었을지 암담할 따름이다.

기자명 고동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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