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3월25일. 순국 하루 전날 안중근 의사(1979∼1910)는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동생 정근·공근씨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에 반장해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유해는 끝내 유족에게 인도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안 의사의 시신은 가슴에 성화(聖畵)를 넣은 채 백포(白布)에 덮여 감옥에서 제작한 관에 담겨 감옥묘지에 매장됐다. 그리고 안 의사의 유해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일제가 안 의사의 묘소가 성역화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안 의사가 서거한 지 거의 100년 만에 뤼순 감옥에서 처형된 뒤 행방을 알 수 없는 안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하고 있다. 언론은 금방이라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것같이 법석을 떤다. 하지만 유해 발굴에 회의적인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누가, 무엇 때문에 잠자는 안중근 의사를 깨우는가. 주인공은 국가보훈처,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의사기념관건립위원회, 조선일보이다. 그들이 왜 갑자기 안 의사를 숭모하겠다고 나섰을까. 안 의사 유해 발굴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

정부는 중국 정부에 안 의사의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 지역의 보존과 발굴 작업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지난 3월 초 중국 정부는 적극 협조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중국 측이 안중근 의사 유해 매장 추정 지역에 대한 개발 작업을 중단하고 유해 발굴을 돕겠다는 방침을 밝혔다”라고 말했다. 뤼순 감옥 뒤편으로 알려진 안 의사 유해 매장 추정지는 지난해 10월부터 진행된 아파트 부지 공사로 일부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정부가 추정하는 묘지 위치 신빙성 떨어져

국가보훈처는 3월25일 중국 뤼순에 유해 발굴 전문가를 포함한 발굴단을 파견한다. 국가보훈처의 고위 관계자는 “안 의사 유해와 관련된 조사는 많이 했지만 실제로 유해를 찾기 위한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안 의사 매장지에 대한 잠정 결론을 내렸다. 뤼순 감옥 뒤편에 있는 현재 해군기지 군수기지창 내부의 야산. GPS로 정확한 위치까지 확인했다. 북위 38도 49분 3초, 동경 121도 15분 43초.
이 지점은 당시 뤼순 감옥 소장의 딸인 이마이 후사코 씨(사망)가 안 의사의 관을 감옥 뒷문을 통해 운반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에서 비롯됐다. 1982년 8월2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마이 씨가 안 의사의 유해와 관련해 증언한 부분이다. ‘두 사람이 둥근 통을 갖고 갔는데 그 안에 안 의사의 유해를 담아 형무소 뒷산 묘지 쪽으로 옮겨 갔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위)의 동쪽 언덕에 있는 감옥묘지에 묻혔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1990년 중국인 주상영씨가 쓴 〈여순일아감옥구지〉에도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안중근 사형 집행 보고서와 안중근의사숭모회 자료집 등 여러 문서에 의해 뒷받침된다. 1918년 일본 참모본부육지측량부가 만든 〈여순비밀군사지도〉에 표시된 지역(오른쪽)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불행하게도 이 장소에는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안 의사 유해가 뤼순 감옥 뒤편 야산에 묻혔다며 여기를 발굴하겠다고 한다.

이마이 씨는 1911년 수감 중 사망한 재소자를 추모하는 법회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한 장을 내놓았다. 그리고는 사진에 안 의사 묘 위치를 표시해주었다고 한다. 이 사진을 입수한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현지를 방문해 사진과 현지 지형을 비교해서 일치한 곳을 찾아냈다. 최서면 원장이 GPS를 통해 위도와 경도를 계산했더니 정확한 위치가 나왔다고 한다. 

이마이 씨는 소학교 시절 1~2년을 뤼순 감옥 관사에서 생활해 감옥 생활과 주변 정황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마이 씨의 증언은 따져볼 대목이 있다. 우선 팔순 노인이 8~9세 때 경험한 기억을 되살렸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70년 전 타국 땅에서의 기억을 떠올려 정확한 위치를 지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 사형수가 항아리 같은 둥근 통에 묻힌 데 반해, 안 의사는 나무관에 묻혔다는 점도 석연찮다. 이마이 씨가 목격한 둥근 통에는 안 의사와 다른 인물이 담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더구나 이마이 씨의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거의 없다. 최서면씨는 이마이 씨가 제공한 재감사망자추모회 사진이 찍혀 있는 곳에서 작은 집회소 건물의 지붕 기와로 보이는 파편 두 점을 증거로 들었다고 한다. 이를 주목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마이 씨와 최서면씨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언론도 그들의 얘기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가 추정한 안 의사 묘지 위치에 대해 회의적으로 본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운용 박사는 “안 의사의 유해를 후문을 통해 운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안 의사 묘지가 뤼순 감옥의 동쪽 언덕의 감옥묘지 터라는 학설을 뒤집을 근거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교수는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장소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렇게 중대한 사실을 20년 넘게 묻어두었다가 이제 와서 불을 지피는 것은 기념관을 짓기 위한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라고 말했다.

북한 관계자 “안중근 유해 못 찾습네다”

정부가 추정한 안 의사 묘지 위치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에 대해 숭모회 관계자는 “추정 위치가 모호한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염려된다. 그러나 발견되기만 기원할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 고위 관계자는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안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조국에 묻어달라는 안 의사의 유언을 실현하는 노력 차원이다”라고 말했다.
 

1982년 8월20일과 21일자 동아일보 기사. 이마이 후사코 씨는 최서면씨에게 안중근 의사의 유해와 관련한 증언을 했다.

남북이 공동으로 안 의사 유해 발굴에 나선다는 보도도 되짚어볼 대목이 많다. 국가보훈처는 남북이 공동으로 안 의사 유해 발굴에 나섰다고 했다가 최근 남한에서 유해를 발굴하는 것을 북한이 양해하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그동안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데 적극적인 태도였다.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북한에 살던 안 의사 조카 안우생씨에게 유해 발굴을 지시했다. 북한은 두 차례나 대규모 유해 발굴단을 중국에 파견했다고 한다. 1986년에는 김 주석이 중국 뤼순 감옥을 방문해 유해 발굴을 요청했다. 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6년 기자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안 의사의 유해 발굴사업에 관해 북한 측에 물은 적이 있다. 북한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기자 선생, 우리가 할 조사는 다했습네다. 못 찾습네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북한에서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 모두 실패해 포기했다고 한다’는 얘기를 전하자 국가보훈처 고위 관계자는 “나도 그렇게 들었다”라고 말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윤원일 사무총장은 “유해 발굴 사업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북한이 더 잘 안다. 때문에 요즘 안 의사 유해 발굴 추진은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라고 말했다.

안 의사 유해를 찾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정부와 안중근의사숭모회 등이 갑자기 안 의사 유해를 찾겠다고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족문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적 인물을 부각해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설친다. 이번 정권에서는 안 의사를 우상화해서 기념관을 만들고 각종 이권 사업을 하려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윤원일 총장은 “정부와 숭모회가 안 의사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은 없이 기념관 건립과 유해 발굴 등 물질적인 부분에만 매달린다. 안 의사 유해를 당장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여론을 만드는 것은 성금을 모아 기념관을 크게 지어 장사를 하겠다는 꼼수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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