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6일 새벽 5시40분. 서울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 수유분소 앞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신고를 받고 112와 119가 출동했지만 사내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얼굴과 배에서 피가 흘렀고, 창자가 도로에 쏟아져 있었다. 양쪽 눈썹, 콧구멍 주위, 입술 등 얼굴과 가슴, 배에 ‘ㄱ’자와 ‘V’자로 찢긴 상처가 있었다. 칼이 깊숙이 들어가 많은 장기가 손상돼 있었다. 시체 옆에는 망치가 떨어져 있었다. 사내는 망치로 머리를 세 차례 가격 당해 두개골이 함몰돼 있었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내는 박용철씨(당시 49세)였다.

사건 현장에서 3㎞ 정도 떨어진 북한산 용암문 옆. 나뭇가지에 또 다른 사내가 목을 매 숨져 있었다. 사내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숨진 박용철씨의 차 열쇠와 유서 등이 나왔다. 바지와 끼고 있던 장갑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박용철씨의 혈흔이었다. 시체 옆에 놓인 가방에는 약병, 회칼, 손전등, 우편물 등이 담겨 있었다. 이 사내의 이름은 박용수(당시 51세). 경찰은 박용수씨가 박용철씨를 죽인 후 자살했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수사에 들어갔다.
 

 

살해된 박용철씨와 용의자 박용수씨는 사촌 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형인 박무희씨의 두 아들 박재석씨와 박재호씨의 아들이었다(아래 가계도 참조). 박용수·박용철씨는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와는 5촌 간이다. 하지만 사건 당시 박근혜 후보 측은 박용철·박용수씨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지난해 9월8일 KBS 보도에 따르면, 박 후보의 한 측근은 “박근혜 전 대표는 (숨진 두 사람이) 가족이다, 친척이다라는 건 알겠지만 왕래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분인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왕래가 없으시니까”라고 말했다.


살해된 박용철씨는 박 후보의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박 후보의 동생인 박근령·박지만 남매와 관계된 사건에 꾸준히 이름이 오르내린 ‘박씨 가문 송사의 핵심’이기도 했다. 2007년 11월에는 ‘육영재단 폭력사건’을 주도했다가 형사처분을 받기도 했다. 당시 박용철씨는 한센인 100여 명과 폭력배를 동원해 육영재단에 쳐들어가 이사장이던 박근령씨를 강제로 쫓아냈다. 이후 육영재단은 박지만의 지인들이 차지하게 된다. 박용철씨는 2008년 5월부터 9개월 동안 육영재단 내 어린이회관 관장을 지냈다.

2007년 7월에는 박용철씨가 박근령 전 이사장의 남편 신동욱씨와 함께 중국 칭다오로 출장을 갔다. 여기서 박씨는 ‘청부살인 사건’ 논란에 휩싸였다. 신씨는 박용철씨의 권유로 함께 중국에 갔다가 청부살인을 당할 뻔했다고 주장했다. 칭다오에 도착한 첫날 밤, 신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며 속옷만 입은 채 숙소에서 뛰어내려 골절상을 입었다. 박용철씨는 먼저 한국으로 돌아와 경찰서에 자진 출두해 마약을 했다고 신고했다. 그는 “중국 칭다오의 한 술집에서 (둘이 함께) 마약을 흡입했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신씨가 마약에 취해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신씨가 한국에서 받은 마약 조사에서는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육영재단 폭력사건’과 ‘중국 칭다오 납치 사건’으로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신동욱씨는 두 사건 모두 박용철씨가 관계되어 있고, 배후에는 박지만 회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내용을 박근혜 후보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익명으로 40차례 올렸다. 신씨의 청부살인 의혹 사건은 결국 법정으로 갔다. 신씨는 박지만 회장을 고소했지만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박지만 회장은 무고 혐의로 신씨를 맞고소했다. 또 신씨는 박근혜 후보에게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박 후보 미니홈피에 글을 올렸다는 이유에서다. 

 

 

 

 

 

신씨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여겨지던 이 사건의 이야기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박용철씨가 말을 바꾸기 시작하면서다. 2010년 7월 박씨는 이 아무개 전 육영재단 법인실 부장에게 사건의 실체라며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 전 부장이 2010년 9월1일 법정에 나와 증언한 내용이다. “박용철씨가 ‘신 교수를 죽이라고 박지만 회장이 이야기한 내용을 녹음한 것이 있고, 통장으로 비용을 부쳐준 증빙이 있다. 나 혼자 그냥 죽을 수 없다(2010.7.28)’라고 말했다.” 그즈음 박용철씨는 박지만 회장에 대해 서운함을 자주 표시했다고 한다. 박 회장 일을 돕다 각종 송사에 휘말렸는데도 인지대 한번 내준 적이 없다는 식의 불만과 무엇보다 자신이 맡았던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관장 후임으로 박 회장 비서실장인 정용희씨가 온 데 대한 불만을 표출하곤 했다.


이런 박용철씨의 심경은 검찰 진술 조서 등에도 나온다. “박근령 고모의 사무국장 신분도 인정하지 않고 월급도 한 푼 안 주고 방치하는 것을 보고 정용희와 박지만 아제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굉장히 컸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육영재단 폭력사태와 관련해 저는 정용희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2009년 12월29일 검찰 참고인 진술 조서).”

박용철씨가 이런 속내를 털어놓았다는 얘기가 신동욱씨 귀에 들어갔다. 신씨는 자기 재판의 증인으로 박용철씨를 불렀다. 2010년 9월1일 박씨는 법정에 섰다. 박씨는 이렇게 진술했다. “(박지만 회장의) 정용희 비서실장이 나에게 ‘박지만 회장님 뜻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증인이 녹음한 테이프가 있다. …테이프라고 할 것도 없고 증인이 핸드폰에 녹음해놓은 것이 핸드폰을 바꾸면서 캐나다에 가져다놓았다.” 정 비서실장은 법정에서 박씨의 이야기가 다 소설이라고 맞섰다.

지난해 9월 박용철씨는 증인으로 다시 법정에 나오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9월6일 피살되면서 법정에 다시는 설 수 없게 됐다. 사건 당시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의 남편 신동욱씨 측은 박용철씨가 죽은 시점이 묘하다고 지적했다. 박용철씨가 죽을 당시, 신동욱씨 변호를 맡았던 조성래 변호사는 “오는 9월27일 박용철씨를 증인으로 신청해놨는데, 그 전에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누가 반사이익을 볼지 생각해봐라. 석연찮은 죽음이다”라고 말했다. 서울구치소에 구속 중인 신동욱씨도 지난해 10월28일 기자와의 면회에서 “나에게 증언을 하기로 하고 (박용철씨가) 바로 죽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진짜 그런 일이 발생했다”라고 말했다.

 

 

 

 

 

신씨는 1, 2, 3심에서 징역 1년6월이 확정됐다. 다만, 육영재단 폭력 사태에 박지만 회장이 관련되었다는 신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무죄 판단이 내려졌다. 판결문에 “박지만 EG 회장이 육영재단 폭력 강탈 사건을 지시했다는 부분은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허위라는 점에 대해서도 검찰이 입증을 다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신씨는 대선이 끝난 내년 2월 풀려나게 된다.


박용철·박용수,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채무 관계도 없었다. 사건 전날인 9월5일 밤에도 둘은 함께 술을 마셨다. 서울 강남 신사동에서 시작한 술자리는 왕십리 술집으로 이어졌다. 그 자리에는 두 사람을 아는 황 아무개씨(37)가 함께했다. 술자리에서 다툼은 없었다. 특별히 이상한 낌새도 없었다고 한다.

만취한 박용철씨가 술자리를 끝내고 귀가하려 하자 술집 종업원이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 대리운전 기사가 도착하자 박용철·박용수씨는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출발한 대리기사는 박용철씨 집이 있는 일산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술에 취한 박용철씨는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다. 갑자기 박용수씨가 자기 집이 있는 수유리 쪽으로 방향을 틀자고 했다. 9월6일 새벽 1시께, 차량이 수유동 4·19 사거리에 도착하자 박용수씨는 거의 왔다며 대리기사를 돌려보냈다. 박용수씨는 사건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이 틀 무렵 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범행에 사용된 흉기와 박용수씨 옷과 손에 묻어 있는 피가 박용철씨 DNA와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사촌 간의 살인사건 그리고 자살’로 결론 내렸다. 박용수씨가 박용철씨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죽인 뒤 스스로 목을 맸다는 내용으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2011년 10월7일 서울 강북경찰서는 이 사건을 ‘불기소(공소권 없음) 의견’으로 서울북부지검에 송치했다. 닷새 후 사건은 ‘피의자 변사’로 내사 종결된다.

 

 

 

 

키 176㎝, 몸무게 105㎏의 거구에 폭력 전과가 6개나 있는 박용철씨를 키 167㎝에 몸무게 73㎏인 박용수씨가 잔인하게 살해했다. 망치로 머리를 세 차례나 가격해 두개골을 함몰시켰다는 박용수씨는 폭력과 관련된 전과가 하나도 없다. 용수씨의 한 지인은 “온화한 성격이어서 누구를 때리거나 그럴 사람이 아니다. 살인사건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박용철이 박용수를 죽인 줄로만 알았다”라고 말했다. 강북경찰서 한 담당 경찰은 “전과도 경험도 없는 사람이 지인을 수십 차례 칼로 찌르고 망치로 머리를 깬다는 것은 현장에서 접해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죽인 사람 또한 죽은 상태라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시사IN〉이 단독으로 입수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감정서와 사건 기록을 살펴보면, 단순 피살과 자살 사건으로 보기 힘든 정황이 여럿 발견된다. 경찰의 사건 발표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도 있다.

 그들 몸에 남겨진 흔적

두 사람은 사건 당일 저녁 함께 술을 마셨다. 1차에 이어 2차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박용철씨는 만취 상태였지만 박용수씨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피살된 박용철씨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96%, 자살한 박용수씨는 0.01% 미만이다. 그런데 이들의 체내에서 졸피뎀·디아제팜과 같은 수면제 성분도 검출되었다. 박용철씨는 졸피뎀 0.52㎎/L, 디아제팜 0.25㎎/L로 다량 검출됐다. 박용수씨는 졸피뎀 0.01㎎g/L, 디아제팜은 정량 한계 이하였다. 두 성분은 모두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는 향정신성의약품이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모두 졸피뎀과 디아제팜을 처방받은 사실이 없다. 누군가 술이나 음식에 약을 탄 것이다.

 

 

 

 

 

자살한 박용수씨 위에서는 녹지 않은 알약 1정이 발견됐다. 부검 감정서에는 알약 성분에 대한 분석은 없다. 다만 박용수씨의 자살 현장에서 발견된 가방에서 정장제(설사약) 약병이 발견된 바 있다. 한 약사는 “건강한 남성의 경우, 대부분의 정장제 알약은 30분 이내 녹는다. 정장제가 아닌 보통 알약은 10분 이내 녹고, 혈압약·심장약·수면제는 투입 즉시 녹는다”라고 말했다. 잔인하게 사촌을 난자하고 자살을 앞둔 사람이 소화를 위해 설사약을 먹은 셈이다. 한 베테랑 강력반 형사는 “목을 매 숨진 사람은 대부분 사정을 하고 용변을 본다. 누군가 자살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설사약을 먹였다는 추리는 지나친 비약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용철씨를 죽인 북한산 수유분소 탐방안내센터 앞 주차장에서 박용수씨가 자살한 용암문까지는 3㎞가량 떨어졌다. 걸어서는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이다. 적어도 죽기 30분 전에 박씨가 약을 먹었다면 걸어가면서거나,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중이어야 한다. 만약 차를 탔다면, 택시나 제3자의 도움이 있어야 용암문까지 짧은 시간 내 도착할 수 있다. 박씨가 북한산 입구까지 타고 온 박용철씨 차는 사건 현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족적을 떠서 자살 현장 근처의 박용수씨 외 다른 발자국은 없었는지를 확인해야 했지만 경찰 조사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자살한 박용수씨의 목과 팔·무릎 곳곳에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목을 맨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상처였다. 누군가와 몸싸움을 벌인 흔적으로 보인다. 이 상처가 박용철씨를 죽이는 과정에서 생긴 것인지, 죽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끌려간 것인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박용철씨는 만취 상태에서 약물에까지 취해 있었다. 저항이 어려운 상태였다.

 유서 속 글씨는?

경찰은 자살한 박용수씨 뒷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유서’라고 적혀 있었다. ‘유서,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주세요. 절대 땅에 묻지 마세요. 매형(○○○) ×××-××××-××××.’ 경찰은 유서가 쓰인 종이를 자살의 근거로 들었다. 강북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박용수씨가 자신이 묵던 여관방에서 발견된 노트에 유서를 적고 찢은 흔적이 있다. 같은 노트에 대고 쓰면 눌러서 뒤에 남는 게 있는데 그 노트가 여관에 있었다”라고 밝혔다. 당시 필적 조회를 해봤냐는 기자의 물음에는 “현재 남아 있는 필적이 거의 없어서 감정 불가인데, 어차피 그 여관방에서 노트가 발견되었고 여관 주인 말에 의하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누가 와서 쓴 거라고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사IN〉이 입수한 국과수 문서영상과의 감정서를 보면, ‘매형(○○○) ×××-××××-××××’ 부분에는 필압이 확인되지 않았다.

〈시사IN〉은 박용수씨가 쓴 한 오피스텔 입주등록 신청서에 대한 국과수의 필적 감정서도 입수했다. 이 또한 “서로 비교 대조할 수 있는 동일 내용의 문자도 구성이 단순한 아라비아 숫자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으므로 이들 필적에 대한 특이한 부분과 공통된 부분의 특징을 구분할 수 없다”라는 결과를 받았다. 박씨의 유서는 여전히 박씨가 직접 쓴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다. 유서와 유서 노트에 대한 별도의 지문 감식은 이뤄지지 않았다. 강북경찰서의 한 담당 경찰은 “유서에는 일반적으로 미안하다거나 원망하는 내용을 쓴다. ‘절대 땅에 묻지 마세요’라고 쓴 것은 이 사건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라고 말했다.

 

 

 

 

 

 

 사라진 증거, 의문의 증거


경찰이 박용철씨 피살을 ‘박용수씨의 원한에 의한 계획범죄’라고 결론 내리면서 든 근거 중 하나가 두 달 전 미리 사놓은 흉기였다. 강북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지난 2월 기자와 만나 “(박용수씨가) 범행 두 달 전에 시장에 가서 칼을 사고, 자기 숙소에서 테이프를 감고 준비를 했다. 칼에 감긴 것과 동일한 테이프가 여관방에 남아 있었다.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고 실행을 두 달 후에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박용수씨 가방에서 회칼이 나왔다. 정작 그 칼에서는 박용수씨의 지문이나 DNA가 검출되지 않았다. 사용되지 않은 채 가방에 그대로 있었다. 또 숨진 박용철씨의 혈흔이 나온 다른 한 칼은 범행 장소에서 60m 떨어진 개천에서 발견됐지만 역시 박용수씨 지문은 없었다.

반면 사건 현장에서 수거된 한 담배꽁초에서는 “박용철·박용수가 아닌 다른 남성 DNA형이 검출된다”라고 국과수가 보고했다. 제3자가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박용철씨의 휴대전화기도 사라졌다. 박씨는 일반 휴대전화와 태블릿 PC를 썼다. 일반 휴대전화의 행방이 묘연하다. 사라진 박씨의 휴대전화에 관심이 모이는 까닭은 박씨의 발언 때문이다. 박씨는 2010년 9월1일 재판에서 자신의 휴대전화에 사건 관련 녹음파일이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기자명 주진우·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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