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우 편집국장
며칠 전 독자 한 분이 편집국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지난호 시사신조어 제목 ‘특종 외면하는 조중동의 애꾸 저널리즘’에 대해서였다. 〈시사IN〉마저도 장애인의 인권을 짓밟느냐는 질책이셨다. 이 분의 지적은 뼈아프다. 대체로 나쁜 짓을 비난한답시고 절름발이 내각이니, 눈먼 행정이니 하며 장애인을 끌어다 붙이는 것은 정말 못된 습성이다.

미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꼽혔던 뉴욕 주 주지사 엘리엇 스피처가 성매매 사실이 드러나 공직에서 끝내 물러났다. 전도양양했던 주지사를  패가망신하게 만든 듀프레라는 이름의 고급 콜걸은 거꾸로 돈방석에 앉게 생겼다니 미국 사회는 그야말로 요지경 속처럼 보인다. 하지만 뉴욕 주 검찰총장까지 지낸 스피처가 법망에 걸려드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미국 사회는 결코 녹록지 않다.

검찰총장 시절 성매매 수사를 지휘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는 말 그대로 ‘선수’였다. 철저하게 현금으로 거래했고, 호텔방도 다른 사람 이름으로 잡았다. 그런 그가 꼬리를 잡힌 것은 ‘겨우’ 수천 달러의 수상한 현금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은행 직원은 그가 자금 출처와 송금 대상을 숨기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감지했고, 그것을 금융 당국과 국세청에 신고해 전모가 드러났다.

그 기사를 접했을 때 머릿속에 맨 처음 떠오른 단어는 엉뚱하게도 ‘장님’이었다. 우리나라의 금융 당국과 국세청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까지 지냈던 김용철씨가 삼성이 차명 계좌 수천 개를 관리한다고 폭로한 것이 지난해 10월 말이었다. 김씨가 자기 차명 계좌까지 밝혔지만 금융 당국이나 국세청은 넉 달이 지나도록 한 일이 없다. 냄새나는 ‘혐의 거래’와 ‘고액 현금 거래’를 감시하는 게 임무인 금융감독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은 심상정 의원 등이 삼성의 혐의 거래 사실을 은행이 보고했는지 밝히라는데도 묵묵부답이다.

게다가 요즘 6공화국 황태자였던 박철언씨가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차명으로 관리해왔다는 폭로가 연일 꼬리를 무는데, 국세청이나 금융정보분석원은 그동안 뭘 했는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미국의 관료는 수천 달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한국 관료의 눈에는 수조원, 수천억원이 마구 굴러다녀도 안 보이는 듯해 장님이라는 단어를 연상했던 것이다.

독자분 지적대로 그들을 장님에 비유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도둑이 들어도 짖지 않는 개라고나 할까. 심지어는 도둑에게 꼬리를 흔드는 것 같다. 어지러운 인간사에 죄 없는 개나 (철)새를 끌어들이는 것도 좋은 습관은 아니겠지만.

기자명 문정우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mjw2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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