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선행학습, 학습이 아니라 학대다

학생 평균 70% 이상이 선행학습을 하며 학교도 이를 인정하고 진도를 나간다. 그러나 그 효과를 긍정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규제법 논란이 뜨겁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2012년 07월 19일 목요일 제252호
댓글 0
고등학교 1학년 과정 수학을 ‘복습’하려는 중학교 1학년 학생. 최영석 송파청산수학원 원장은 ‘선행학습’ 얘기만 나오면 올해 3월 상담한 그 여학생이 떠오른다. 어느 날, 학생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국제중학교에 다니는 중1 학생인데, 고1 과정을 이미 배웠고 고1 과정을 복습해줄 수 있느냐고. 최 원장은 일단 테스트를 해보자고 했다. 학생에게 자신 있는 영역을 선택하라고 하니 고1 수학의 한 단원을 꼽았다. 테스트 결과는 100점 만점에서 30점이 채 나오지 않았다. 학원 기준으로 ‘과락’. 중학교 영역으로 다시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자, 이 여학생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중학교 수학은 배운 지 오래돼 더 생각이 안 난다”라고.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중학교 1학년 수학 과정은 초등학교 4∼5학년에 배워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장면. 과도한 선행학습 열풍이 낳은, 웃지 못할 풍경이다.


   
ⓒ시사IN 자료


최 원장은 사교육 업계에 들어온 지 15년째다. 그가 보기에 선행학습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다. 과학고·외고 따위 특목고 열풍이 불면서부터다. 경시대회, 한국수학올림피아드(KMO)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최 원장은 “KMO는 한국 대표를 선발하는 시험이고, 외국 학생들과 함께 대회를 치르다보니 교과에 대한 배려가 없다. 한마디로 난이도가 살벌하다. 정규 교과만 배워서는 풀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학원가에는 ‘올림피아드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6학년이 고1 과목까지는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표준 진도’가 생겨났다. 그가 보기에 그 학습량은 ‘한 학교에 한두 명은 할 수 있지만, 보통 초등학생은 감당하기 어려운 양’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선행학습을 ‘아동 학대’라고 말한다.

7월4일, 최 원장의 책상에는 강남 학원가의 선행학습 광고물이 올려져 있었다. 7월 첫째 주면 기말고사가 거의 끝난다. 새 학년을 앞둔 12월, 신학기인 2~3월, 그리고 곧 여름방학에 들어갈 지금 이 시기가 학원가의 ‘3대 시즌’이다. 학원 광고가 집중된다. 한 학원의 광고물에는 ‘2년 연속 KMO 1차 전국 1등 석권’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영재고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다. 최 원장은 “재작년부터 특목고는 내신으로 선발해 선행학습 수요가 많이 사라졌다. 그런데 영재고는 아직도 올림피아드 가산점을 준다. 특목고 수요가 사라진 순간, 학원계가 새 장삿거리를 등장시킨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교육 업계로서는 선행학습은 ‘효자 상품’이다. 선행학습을 하게 되면, 새로 교재 개발을 할 필요성이 적어진다. 또 선행학습의 경우 당장 학교 성적 결과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선행학습 학원’이라고 내세우면서 앞서가는 학원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내용을 배우니 항상 어려워해 결국 학원 의존도를 높이게 만들 수 있다. 


   
 
교육정책이 선행학습 열풍 유발


최영석 원장이 지적했듯 이 같은 선행학습 열풍은 2000년대 초반 특목고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사교육 시장의 마케팅이 가세했다. 또 일부 학교에서는 일제고사 점수를 높이기 위해 선행학습을 시키는 부작용도 나타났다(39쪽 상자 기사 참조). 교육 정책이 선행학습을 유발하고, 시장이 여기에 반응하는 식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김승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실장은 “내신으로 선발하면서 특목고 입시 자체는 선행학습 요인이 사라졌다. 하지만 내신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학교 시험 문제를 어렵게 내고, 고교에서는 선행학습을 전제한 상태로 교과를 운영하니까 그 과정을 따라가려고 선행학습을 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실제로 학생들은 어느 정도 선행학습을 하는 것일까. 지난 6월21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김춘진 의원실과 함께 전국 사교육 과열지역의 선행학습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가장 선행학습이 빈번한 수학과 조기 영어교육에 대해 주로 물었다. 설문조사 대상 지역은 서울 5개 구, 경기 5개 구, 부산 2개 구 등 전국 대도시 17개 구에서 ‘2011학년 학업성취도 조사결과’ 상위에 있는 초·중·고교 101곳이었다. 학생 7087명과 학부모 4062명이 응답했다(아래 그림 참조). 


   
 


조사 결과, 김승현 정책실장의 표현처럼 아이들은 ‘인권 침해 수준’으로 선행학습을 하고 있었다. 초·중·고 학생의 수학 선행학습(최소 1개월 이상 학교 진도보다 빠른 학습) 참여 비율은 70.1%. 초등학생 80.0%, 중학생 69.8%, 고등학생 59.8%로 초등학생의 선행학습 참여율이 가장 높았다. 선행학습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초등학생의 72.9%, 중학생의 69.2%는 한 학기 이상 선행학습을 하고 있었다. 1년 이상 선행학습을 하는 경우도 초등학생 47.7%, 중학생 47.9%에 달했다. 2년 이상 선행학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초등학생이 15.1%, 중학생이 21.2%에 이르렀다.

선행학습에 참여하는 학생 중에서 일주일에 3회 이상 수학 선행학습을 하는 초등학생 비율은 65.9%(중학생 75.0%, 고등학생 40.2%). 하루 평균 수학 선행학습을 위해 사용하는 공부 시간을 조사한 결과, 하루 평균 2시간 이상 선행학습을 한다고 응답한 초등학생이 53.1%였다. 김승현 정책실장은 “도대체 초등학생이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현재 진도보다 앞선, 어려운 수학 선행학습을 위해 공부하는 상황이 과연 상식적인지, 놀라울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규제법, 위헌 논란 피해갈까

이번 설문에서는 학교 수업과 시험이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학원에서 미리 배운 것으로 인정하고 학교 수업을 나간다’(39.3%)는 응답과 ‘선행학습을 받지 않으면 학교 시험을 치르기 어렵다’(47.3%)는 응답이 많았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선행학습 실태를 조사한 결과 영어 유치원(26.4%), 공인 영어시험 대비(41.1%), 한 학기 이상 조기유학(11.5%)을 경험한 아이도 많았다.

선행학습에는 지방과 서울이 따로 없었다. 부산 금정구에 사는 정연미씨(39)도 중학교 1학년 아들을 수학 선행학습을 하는 ‘과외방’에 보낸다. 과외방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보통 한 학기 정도 선행학습을 한다. 잘하는 아이들은 1년가량 선행해 공부를 시킨다. 자신을 ‘중간 정도 학부모’라고 말한 정씨는 지난해 9월 아이를 중학 예비반으로 옮길 때 선행학습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씨는 “다들 선행학습을 한다고 해 학원을 옮기려고 4년 동안 아이가 다니던 과외방을 갔다. 그때 선행학습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 저희도 여태 선행학습 시켰어요’ 하더라. 그때 이 작은 과외방도 선행학습을 하는구나 하고 알았다”라고 말했다. 정씨는 아이가 잘 놀면서 자라기를 바랐는데, 중학교에 들어가 등수가 나오기 시작하니까 자신도 ‘보통 엄마’로 바뀌더라고 말했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등수가 안 나온다고 생각해 앞으로도 계속 선행학습을 시킬 계획이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또 다른 학부모 김정미씨(가명·43)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영어 캠프에도 보내고, 수학 선행학습도 시켰다. 영어도 동네 학원에서 중등 과정 교재로 공부시켰다. 수학 과목 같은 경우 한 학기 진도가 앞서는 것은 보통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김씨는 얼마 전 학원을 끊었다. “월·수·금요일에 수학 학원을 다니고, 화·목·금요일에는 영어 학원을 다녔는데, 집에 와서 서너 시간씩 숙제하면 밤 11시가 다 되었다. 그나마 재미있어 하던 영어도 숙제에 치여 흥미를 잃고, 수학은 어려운 문제만 하게 되니 학원에서 평가하면 점수가 50~60점대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아들과 척지게 생겨 두 달 전부터 학원을 끊었다.” 


   
ⓒ시사IN 조남진
수학 선행학습을 홍보하는 학원. 학원에서 미리 배운 것을 인정하고 수업을 하는 학교도 많다.


지금 아들은 집에서 학교 교과서를 갖고 공부한다. 시간이 여유로워지면서 관계가 돈독해진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학원에 안 보내면 내 아이만 뒤처진다는 불안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겨울방학 때는 학원에 보낼 생각이다.

앞서 설문조사에서 자녀에게 선행학습형 사교육을 한다고 응답한 중학생 학부모들은 그 이유로 ‘미리 배워두면 학교 수업을 받는 데 유리할 것 같아서(63.7%)’ ‘학교 수업과 시험이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따라가기 어려워서(51.6%)’라고 주로 대답했다(복수 응답). 하지만 교육 전문가들의 진단은 다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따르면, 선행학습과 관련한 연구 논문 수십 편 가운데 선행학습의 효과에 대해 긍정적 결론을 낸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2002년에 한국교육개발원은 <선행학습 효과에 관한 연구>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통계 분석 결과, 대체로 단기든 장기든 선행학습이 성적의 상승을 가져왔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학교 수업에 흥미를 잃고, 학원에 의존하게 되고, 성적의 기복이 상대적으로 심하며 고등학교 때 성적이 하락하는 경우가 많고, 잘못된 개념이나 부정확한 지식을 갖는 경우가 많은 등 선행학습의 부작용이 심하다는 요지였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3년 전부터 선행학습 실태조사를 벌여왔다. 최근에는 ‘선행학습 규제법 시안’을 만들어 입법 활동을 벌이려 한다. 김승현 정책실장은 “선행학습은 전국적 현상이고, 그 피해가 광범위하다. 시민의식 개선운동으로 한계가 있고, 법으로 강제해야 할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선행학습 규제법’ 시안이 발표된 7월5일 오후 6시30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회의실에서는 늦은 밤까지 교육부 관계자, 변호사 등이 모여 시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선행학습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다. 과도한 선행학습을 줄이자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이를 입법화하자니 위헌 논란 등 실효성 문제가 지적되는 것이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선행학습금지법은 자녀의 인격 발현권, 부모의 교육권 침해 등으로 논란의 소지가 많다”라고 말했다. 예전에 과외금지법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난 것처럼 논란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다. 반면 김승현 정책실장은 “위헌 논란이 있었지만 학생의 건강권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학원 영업시간을 밤 10시로 규제하는 조처를 취한 바 있다. 선행학습금지법 제정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해결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올지는 아직 말하기 이르나 ‘선행학습’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커졌다. 여·야의 각 대선 캠프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선행학습 규제’에 대한 자료를 요청해왔다. 서울시교육청도 7월5일 강남·서초·송파·양천·노원구 등 ‘사교육 특구’ 내 자율고를 대상으로 선행학습 특별 점검에 돌입했다. 중·고교 기말고사 문제에 진도를 벗어난 ‘선행학습형 문제’가 출제될 경우 경고 조치 등을 하겠다며 ‘시험지 조사’에 나선 것이다. 교육청은 중학교 382곳과 고등학교 317곳의 1학기 수학교과 기말고사 문제지를 제출받아 교육과정을 벗어난 문제를 출제했는지 등을 분석해 조처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전 LiveRe 댓글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