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을 잇는 도로가 1984년 연결되자 성삼재를 넘어 지리산에 오르는 이가 줄었다. 등산객은 관광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지리산에 올랐다. 교통이 발달할수록 지리산 자락에 있는 마을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해졌다.

2004년 도법 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 탁발 순례단은 ‘지리산 순례길’을 제안했다. 옛것을 보존하고, 지역을 살리는 길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이후 지리산을 지키는 여러 시민단체와 산림청은 지리산을 두르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길, 마을길을 찾아 나섰다. 2007년 사단법인 ‘숲길’이 결성되면서 ‘지리산 둘레길’이 본격적으로 움트기 시작했다. 2008년 4월 남원 산내마을에서 산청 수철마을을 잇는 71㎞ 구간이 시범적으로 개통됐다.

길을 조성한 지 5년여 만인 5월25일, 드디어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이 열린다. 경남 함양(23㎞)·산청(60㎞)·하동(68㎞), 전북 남원(46㎞), 전남 구례(77㎞) 구간 도합 274㎞에 이르는 길이 3개 도와 5개 시·군을 연결한다. 그런가 하면 지리산 둘레길에 이어 출범한 제주올레 또한 오는 9월이면 제주 해안가를 따라 걷는 올레길 전 구간이 연결된다. 국내 ‘걷기 여행’의 새 장을 연 지리산 둘레길과 제주올레가 개장 5년 만에 나란히 겹경사를 맞는 셈이다.


ⓒ시사IN 백승기‘지리산 둘레길 이음단’ 참가자들이 하동호를 지나 본촌마을(하동호〜위태 구간)을 향해 걷고 있다(왼쪽).


‘지리산 둘레길 이음단’으로 선발된 14인은 완결된 이 길을 최초로 완주할 자격을 얻었다. 5월9일 전북 남원시와 전남 구례군의 경계인 지리산 밤재(구례군 산동면 계천리)에서 출발한 이들은 각 7명씩 두 개의 조로 나뉘었다. 밤재에서 구례로, 밤재에서 함양으로 떠났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이들은 보름에 걸쳐 20개 읍과 면, 117개 마을을 지난다. 퇴직 이후 걷기 여행을 즐겼다는 참가자 이의선씨(65)는 “걷는 행위 자체만으로 온몸이 깨어난다”라고 말했다.

이음단 일정이 절반가량 지난 5월15일, 기자는 구례 방면으로 7일째 걷던 참가자들과 하동호에서 만나 동행했다. 이날은 하동호∼위태 구간(11.8㎞)을 지나 위태∼덕산 구간 내 중태마을(5.4㎞)까지 총 17㎞가량을 걷는 일정이었다. 두 팀으로 나뉜 이음단이 중간 지점인 중태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날이기도 하다.

하동호∼위태 구간은 나본·궁항·오율·위태 마을을 지난다.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물의 북쪽은 낙동강, 남쪽은 섬진강이다. 그동안 구례군을 걸으며 섬진강 수계권의 물길들을 만났지만, 이제부터는 낙동강 수계권에 들어선다. 하동호 옆으로 난 임도(林道)를 걷다보니 대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이 나온다. 기다란 대나무 사이로 햇살이 일렁인다. 검은등뻐꾸기가 운다. 시골에서 온 참가자 최하나양(19)은 ‘이 소리가 학교가-자, ’학교가-자!’라고 들린단다.


ⓒ시사IN 백승기둘레길에서는 멀리 지리산을 바라보며 걷게 된다. 위는 남원 매동마을에서 함양 창원마을로 이르는 둘레길.


‘마을민박’에서 자고 ‘여행실명제’에 참여

2시간여를 걸어 궁항마을을 지나는 길, 한 노인이 마당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다. 딸기잼을 만드는 중이었다. 딸기농가다. 과일 그대로 내다팔기도 하고, 직접 잼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기도 한단다. 어르신 주변을 뱅뱅 돌자 식빵 한 조각에 갓 만든 딸기잼을 발라주신다. 이렇게 담백한 딸기잼은 처음 맛본다. 인근에서 마주친 한 할머니는 “젊은이들, 지리산 구경 왔느냐”라며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가 계신 궁항마을 끝자락에는 일흔이 넘은 어르신만 네 명이 산다. 하루에 세 번 오는 버스를 타고 이따금 시장에 나가기도 한단다. 아기자기한 숲길이 이어지는 오율마을에선 주위에 닥나무가 많아 한지를 생산했다.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는 나무장승 모양으로 세워졌다. 장승의 날개에는 빨간색과 검은색 화살 모양으로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을 구분해놓았다.

위태에서 덕산에 이르는 구간(9.8㎞)에 들어섰다. 위태·중태재(갈치재)·유점·중태·천평교·덕산에 이르는 길이다. 위태마을에서 유점마을을 잇는 길은 시멘트 임도가 이어졌다. 양지바른 곳마다 농가에서 내놓은 고사리가 널려 있었다. 말리기 위해서다.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은 개구리도 자주 눈에 띄었다. 전날, 온종일 비가 온 탓이란다. 위태마을의 상수리나무 당산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당산제를 올린다고 한다. 그런데 나무가 병충해를 입은 것을 보니, 당산신이 힘을 잘 못쓰는 것 아닐까 괜한 걱정이 든다.

기운이 소진될 무렵 중태재에 올랐다. 참가자들은 민박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냈다. 지리산 둘레길은 마을을 끼고 있어 ‘마을민박’에서 잠을 청하고, 민박에서 싼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해결할 수도 있다. 특히 마을민박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일정 소득을 지역을 위해 사용한다. 주민들이 지리산 둘레길에 적극 참여하면서 관계를 맺는 셈이다.

오후 3시, 중태마을에 이르렀다. 이곳에 들어선 여행객들은 ‘중태마을 안내소’에 들러야 한다. ‘여행실명제’를 위해서다. 농가의 피해를 줄이고, 공정한 여행을 다짐하는 기록을 하며 마을에 대한 책임감을 북돋우기 위해서다. 안내소에서 설명을 듣고 난 뒤, 느티나무 정자에 앉아 쉬었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꼬마부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까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윗동네와 차 맛이 또 다르다며, 아랫동네 녹차를 내어준다. 새로운 사람에게 스스럼이 없었다.

함양 방면으로 떠났던 이음단도 마을에 도착했다. 이어 이음단의 만남을 기념하며 마을에서 조촐한 잔치를 벌였다. 통기타 연주와 동네 어르신의 구성진 트로트 한 가락이 더해졌다. 최하나양은 7일간의 여정을 돌아보며 “숲길, 농지, 시멘트 길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게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 느끼는 게 매번 달랐다”라고 말했다.


ⓒ시사IN 백승기하동호〜위태 구간을 한 시간가량 걸으면 양이터재 쉼터가 나온다.


등산조차 경쟁인 시대, 지리산 둘레길은…

최양의 말처럼 지리산 둘레길에는 걷기 좋은 길만 있는 게 아니다. 가파른 고갯길과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지루한 길, 땡볕 속을 걷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도 있다. 그러나 ‘더 농촌스럽게’ ‘더 걷기 좋게’ 애써 바꿔내지 않았다. 제주도 올레길이 화려한 경관을 자랑한다면, 지리산 둘레길에서는 있는 그대로 소박함을 느낄 수 있다.

이상윤 사단법인 ‘숲길’ 이사장은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국립공원을 바라보며 걷는다. 등산조차 경쟁적으로 하는 시대에 높고 낮음이 없는 평등과 수평의 현장이다”라고 말했다. 쉽게 범접하기 힘든 지리산과 달리 지리산 둘레길은 사람들의 삶을 품어주며 연결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2011년 둘레길을 찾은 여행객은 7만7000여 명에 이른다. 같은 해 경북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리산 둘레길을 35만명이 방문한다면 소득 40억원, 고용 371명에 이르는 효과를 창출한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모텔이나 대형 음식점 따위의 외지 자본이 몰려 지역 주민의 생활을 파괴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농작물 훼손도 걱정거리다. 이 때문에 주민 일부는 둘레길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남 하동군 청암면에 사는 주민 김재돌씨는 “아직까지 괜찮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마을에 활기가 돌기 때문이란다. 이상윤 이사장은 여행객과 지역주민 모두 마을에 더 파고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을민박’이 좋은 예다. 외따로 떨어져 지내는 할머니와 이랑을 내고 밭을 일구는 농부가 없는 지리산 둘레길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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